영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살아가며 사람은 관계를 맺습니다. 관계들 사이에서 나를 구성하고, 어떤 관계는 내 삶을 크게 바꾸기도 합니다. 어떤 관계는 나를 멀리 나아가게도 해주지만, 어떤 관계는 나를 구속하기도 합니다. 말은 이렇게 단순할지라도 사실 관계는 이렇게 단순한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습니다. 양가적인 성격을 다 가지고 있기도 하고, 다면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관계도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관계가 있지만, 종종 사람들은 관계의 명칭에 집중하여 자신이 생각한 관계의 성격으로만 고정하여 관계를 규정하기도 합니다.
가족이라는 관계가 그렇습니다. 내가 속한 가장 작은 울타리, 그 울타리는 누군가를 보호하지만, 누군가를 가두기도 합니다. 걱정과 염려, 집착과 통제는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이는 건강하고 모두가 풍족하며 행복한 관계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아플 때 관계에는 균열이 생기고, 구성원의 누군가는 편집증적인 성격을 드러냅니다.
과학적으로 병은 원인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보통 누군가의 잘못으로 치부되곤 합니다. 하지만, 병이란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원인이 섞여 발생하고, 현대 과학으로 전부 다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자기만이 아는 과학의 권위나 상식의 권위에 기대어 병을 해결하고자 합니다. 널리 알려 다양한 해결바카라을 얻으려 하지 않고, 병은 ‘잘못’이라는 생각에 갇혀 폐쇄적으로 자신의 생각 안에서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런 폐쇄성은 종종 ‘가족’이라는 관계와 합쳐져 누군가의 인생에서 자유를 박탈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의 가족은 감독 누나이자 감독 부모의 딸이 조현병에 걸렸음을 보여주며 영상을 시작합니다. 딸은 아픈 게 아니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진 부모와 누나를 어떻게든 정신과로 보내고자 하는 아들의 갈등. 그리고 그 안에서 드러나는 의학 연구원 부모의 잘못되고 닫힌 생각들. 그 닫힌 생각들에 베이고 찢겨 세상으로 나가는 발걸음 자체를 끊어버린 누나. 중반부까지 영화는 너무 답답합니다. 정신과와는 관련 없는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자기 딸을 맘대로 재단해버린 엄마와 딸의 꿈보다는 딸의 앞길만을 말하며 끝까지 의사 국가고시를 강권하는 아빠의 모습은 보는 이들의 속을 터지게 만듭니다. 아마 분명 둘의 이런 성향과 행동은 딸의 조현병을 격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겠죠.
그러나 그들을 비판하기 이전에 있어서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발달장애에 대한 논의가 늘어난 요즘. 발달장애를 빠르게 확인하고,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이 무척 권장되고 있습니다. 많은 아이들을 지켜보아온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선생님들은 늘 발달장애 치료를 권장합니다. 하지만, 많은 부모들이 여전히 부정합니다. 내 자식이 발달장애일리 없다고. 내 자식이 아플 리 없다고. 이는 사실 분명 내 자식이 내 몸에서 나온 귀중한 사람임에는 분명하지만, 나와는 다른 타인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서 생기는 인식 오류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제3자가 되지 못하고, 가족이라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내 소중한 가족이기에 다른 이의 손에 맡기는 것을 믿을 수 없고, 내가 가장 오래 봐왔기에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것은 좀 더 내밀하고 가까우며, 복잡한 관계일 뿐, 서로는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타인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타인이라는 말이 주는 차가움이 가족에 묶인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아마 감독의 가족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친구에 가까운 누나와 동생 사이는 상황을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보고, 타자화를 할 수 있었지만, 마치 내 몸과 같은 부모 입장에서는 어떻게 딸을 타인이라고 볼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감정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누나의 치료는 조현병이 걸린 지 25년이 지나 엄마가 치매에 걸리고 나서야 가능해졌습니다. 조현병 발작을 일으키는 딸에게 마약을 먹은 금단증상이라고 말하는 치매 걸린 엄마는 이 영화의 가장 공포스런 부분입니다. 그 어둠 깊이 느껴지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확신의 광기는 가장 큰 무지의 폭력으로 읽힙니다.
그러한 일이 있고, 세 달 간의 치료 끝에 누나는 완전한 치료는 아니더라도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이 돌아왔고, 남은 생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보냅니다. 약 15년의 삶은 무난한 가족의 삶으로 읽힙니다. 폐암 4기에 걸린 누나의 죽음 후 동생이자 아들은 아빠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아빠는 이미 딸이 조현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진단에서도 비슷하게 나왔다고 합니다. 기억의 왜곡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진찰에서 문제가 없었다는 이미 돌아가신 엄마의 말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아빠는 아내의 선택을 존중했고, 딸의 자유를 완전히 가져다주지는 못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라는 질문에는 실패는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실패는 아니었습니다. 아빠는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내의 선택을 존중했고, 딸에게 죽기 전 15
년 정도는 하고 싶은 일을 시켜주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실패는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물쇠로 잠긴 현관문, 오랜 기간 딸을 밖으로 자유롭게 내보내지 않았던 그 시간은 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 모릅니다. 갑갑하고, 짜증나고, 다 부숴버리고 싶은 시간을 만들어줬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돌아가서 아내를 완전히 무시하고, 조현병의 제대로 된 치료법이 없는 1980년대에 딸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물음을 던집니다. 한 가족의 이야기일 뿐인 이 사례는 사실 우리 슬롯에 던지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발달장애에 걸린 아이를 그렇지 않다고 단정하고, 강제로 그들의 길을 정해버리는 사람들, 혹은 더 나아가 나 자신과 아이를 동일시하며 이야기하는 사람들. 그들은 감독의 부모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했을까?’라는 질문은 감독의 가족에게만 주어지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며 다양한 관계를 맺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질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한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단순한 방법이 있다면 이 세상에 다양함이라고는 없었겠죠. 하지만, 근본적으로 취해야 할 태도는 있습니다. ‘공감’입니다. 내가 누군가와 다름을 알고, 그 다름을 이해하여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것. 요즘 공감이라는 말이 너무 쉽게 쓰입니다. 그 사람의 말에 기계적 동의를 하면 공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하지만, 진정한 공감은 그것이 아니라 다름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과 내가 같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나를 타인에게 동일시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나를 확장시켜 전체를 보는 개인의 전체주의이지 타인의 입장에서 세상을 함께 보는 공감은 아닙니다. 내가 아닌 관계를 맺은 누군가의 온전한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 거기서 공감은 시작합니다.
타인이라는 말엔 분명히 차가움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차가움을 인지해야만 우리는 공감이라는 따뜻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르다는 차가움 없이 그 사람의 세계로 다가가는 따뜻함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가장 먼 이름 모를 누군가까지 관계를 맺은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세상에 던져진 존재, 유일한 나는 사실 무척 개성적이고, 특별합니다.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이들과 맺는 관계 하나로 그들을 하나하나 다 규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습니다.
여전히 감독의 말에 정확히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답은 할 수 없습니다. 가장 원론적이지만, 가장 진심을 담은 한 마디만 건넬 수 있을 따름입니다. ‘공감’하라고. 내 모든 생각과 마음을 다해 내가 눈으로 보고 있는 내가 말을 걸고, 말을 듣는 그 사람의 내면과 상황을 고민하라고. 그렇게 했다면 분명 처음에는 틀린 길을 잡았을 수는 있지만, 가족이라 불리는 그 관계가 균열과 침묵으로 가득해지는 것이 아니라 화합과 소통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겁니다. 이것은 분명 가족이라는 관계가 모여 만든 슬롯에도 해당되는 말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