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적인 예술가 (전주국제영화제, 폴링 인 전주)
전시를 보는 것, 연극과 뮤지컬을 보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취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멋져 보이고 고상해 보이는 이 취미에는 커다란 단점이 있습니다. 돈이 많이 듭니다. 놀랍게도 이것들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돈이 제법 들지만, 전시해설분야에서 종사하고 있는 제 월급은 최저에 가깝습니다. 종종 밥을 줄여가며 전시를 보고, 연극과 뮤지컬을 보는데 이게 맞는 건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예술이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은 냉랭하고, 한계가 명확합니다.
현실에 타협한 예술가가 있습니다. 시인으로 나름의 명성도 쌓고, 하나의 시집도 냈으며, 신문에도 실렸던 색스버거입니다. 하지만, 대중들은 그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생활에 필수가 아닌 예술에서 ‘나름’ 유명했던 것은 생계에는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잊힌 채 생계만 유지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 지금의 시인도 알고 있고, 세상도 그에게 그런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삶은 소중하지만, 모두가 자신이 원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의 삶도 그저 흘러갈 뿐입니다.
흘러갈 뿐인 삶에 다시 빛을 찾아준 사람이 나타납니다. 자기의 시가 무척 영감을 주는 시라고 하며 예술가들의 모임에 초대하고 낭독회도 엽니다. 색스버거는 묻어두었던 꿈을 다시 꺼냅니다. 30년이 넘게 묻어두었던 빛나는 꿈. 하지만, 현실은 냉혹합니다. 모임의 낭독회는 혹평으로 끝나고, 색스버거의 시를 제대로 읽고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가장 이해받는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그를 제대로 보고 이야기해주는 사람들은 오히려 술집에서 저급한 농담이나 하는 지금의 친구들에 가까웠죠.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다시 전등이 어두침침한 술집으로 돌아가는 색스버거의 뒷모습은 어쩐지 쓸쓸해 보입니다.
예술의 한계는 명확합니다. 당장 예술을 한다고 먹고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술이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밥을 먹기 위해 필요한 것도, 집을 짓기 위해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요. 그래서 예술은 설자리가 많지 않습니다. 문제없이 살고 있는 현실에 불평불만을 마구 내뿜는 예술이 좋아 보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술은 대단해보이지만, 정작 향유하고 이해하는 사람은 적고, 자본주의 슬롯에서 가장 중요한 자본을 크게 만들어내는 사업은 아닙니다.
예술가들은 그래서 재능과 노력을 모두 갖춰야만 합니다. 색스버거의 젊은 날의 재능과 노력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30년을 넘게 우체부로만 살았는데 이제 와서 시를 쓰는 건 헛된 욕심입니다. 그의 재능은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 당시에 성공할 정도로 넘치지 않았고, 안정된 삶을 택하며 그만둔 노력을 메꿀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멋진 시가 탄생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꿈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갑니다. 누군가의 사적인 예술가로서 슬롯의 인정을 원했던 그였지만, 현실에서 색스버거가 사적인 예술가로 있을 자리는 없었습니다.
예술이 삶을 풍요롭게 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준다는 말은 무척 공허하게 들립니다. 예술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생계와는 다른 곳에 돈과 시간을 쓸 여유가 필요합니다. 색스버거를 초청한 모임의 부유한 구성원들이 대표적이 예입니다. 말로만 잘 포장된 공기 덩어리 같은 예술의 허망함을, 그리고 그런 예술을 만들어낸 현실을 확인합니다. 예술로 다가가는 빛나는 기적은 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예술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예술이 밥을 먹여주지 못한다 한들, 슬롯에 예술의 자리가 좁다 한들, 예술의 새로움을 저는 사랑합니다. 누군가의 깊은 고민과 지난한 노력, 화려한 재능으로 만들어진 예술은 흘러가는 일상에 꿈을 쥐어줍니다. 색스버거가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빛나는 눈으로 잠시 꿈을 꿀 수 있었듯 저 또한 손에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린대도 예술을 보고, 느끼며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못할 겁니다. 현실은 차갑고, 참담할지언정 빛나는 눈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