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니?
20대는 20km/h로.
30대는 30km/h로..
누군가 웃자고 한
소리일지도 모르는 이 말이
아빠가 살아보니
비단 웃자고만 한 소리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
너희가 태어나고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어느덧 30대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말야.
점점 챙길 게 많아져서,
신경 쓸 게 많아져서,
평생 혼자 써오던 시간이
더 이상
내 시간만이 아니게 되버려서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는 건 아니었을까?
하도 많은 시간이 지나서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도윤이가 3살 때인가?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어.
"아빠! 도아 울어요. 시끄루와!"
옷을 입고 있는 아빠에게 쪼르르 달려와서
동생을 일러바치던 너.
"달래주면 되지?"
바로 앞에 있었건만 뭐가 그리 바쁘다고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영혼 없는
대답만 하는 아빠였어.
"아빠 이 로봇은 세 번 변신한다요?"
"좋겠네.. 세 번이나 변신하고.."
그러거나 말거나 로봇을 갖고 와서는
계속 재잘재잘대는 너였지.
"뽀로로에서 @#$$# .."
'하.. 시끄러..'
출근 준비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자꾸 말을 걸자 조금은 짜증이 났었나봐
"미진아! 뭐해?"
고함치듯이 엄마를 부르자
큰 소리에 놀랐는지 말을 멈추고
커진 눈으로 아빠를 쳐다보던 너.
그 눈이 마주치자
조금은 미안해지더라.
"어~ 나 뭐 좀 하느라고"
"아침부터 뭘 하는데? 도아는 울고
도윤이는 옆에서 잔소리하고
나 좀 도와주라..좀.."
아빠의 하소연에 거실 끝에서부터
한순간에 달려와 너를 안던 엄마
"으이그~ 우리 도윤이
아빠 출근 준비할 때 괴롭히면
안 된다고 했지?"
"아빠 바빠요?"
엄마의 말에 의아하다는 듯이 물어오던 너.
"그럼 바쁘지 인마"
휴대폰과 차키를 찾으며 여전히
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던 아빠.
"찾았다! 나 갔다올게"
그런 아빠를 보며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아빠에게 말을 건넸어.
"그럼 안 바쁠 때 얘기해줄게요~"
"그러자... 나 간다? 당신도 수고해."
부랴부랴 신발을 신는 아빠를 보며
현관 앞에서 도아를 안은 채
손을 흔들던 엄마.
그 옆에서 안아달라는 듯이
팔을 내밀던 너.
"... 이따가.."
결국 시간을 핑계로
안아주진 못하고 출근길에 올랐지.
"너도 .. 나이를 먹긴 먹는구나.."
출근하자마자 짐을 정리하고 향한 흡연실.
이미 와있던 경태형이
안으로 들어서는 아빠를 보며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을 걸었어.
"이제 저도 곧 서른인데요."
"와..좋겠다 서른.. 나랑 바꿀래?
나 조금 있음 마흔인데.."
"그럴까요? 어디 가서 바꾸면 되요?"
"... 이 새끼 진짜 많이 능글맞아졌네?
많이 컸어.. 왕따당하고 울고 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누..누가 울어.."
"울어는 반말이고 인마..."
혼자 끌끌대며 놀리던 경태형.
짧아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뒤
아빠 어깨를 한번 살짝 툭 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지.
나도 따라 나갈까 하다가
하나만 더 피자란 생각에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흡연실 문이 쾅 열리더니
정현이가 씩씩거리며 들어오더라고.
"야! 너 왜 혼자 와있어?"
"아닌데.. 경태형이랑 같이 있었는데.."
"화장실 갔다왔는데
네 자리에 가방만 있어서
혹시나 해 와봤더니 역시 여기 있었어!"
'아..시끄러..'
아빠를 보자마자 끝없이 말을 토해내던
정현이.
항상 출근하면 같이 흡연실 와서
수다 떠는 게 이제 일상이 된 정현이로서는
아빠 혼자 흡연실에 온 게 서운했었나봐.
"저기.. 내가 진짜 헷갈려서 그러는데
니들 사귀냐?"
그렇게 정현이와 흡연실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데
다른 부서 과장님이 우리를 빤히 보시더니
한마디 하시더라고.
"에이~ 아닙니다 그냥 친구예요
나이가 같아서."
아빠의 변명에 고개를 갸웃하던 과장님.
"정현이는 담배 안 피지 않아?"
"전 담배 연기 싫어해요~ 그리고
담배! 몸에 안 좋아요!"
"그러니까..그런데 굳이 여기 와서..둘이.."
별로 신경 쓸 문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명까지 할 문제도 아니어서
그냥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해버리는
아빠였지.
오전 업무시간은 왜 그렇게 빨리 가는지.
이제 막 시작한 것 같은데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더라고.
옆자리에서 칸막이 사이로 얼굴만
내밀어 아빠에게 말을 건네던 정현이.
"들었어?"
"뭐를.."
"오늘 점심 청국장이래..으윽.."
"오? 난 좋은데?"
".. 나가서 먹을까?"
"돈 없다.. 회사밥 놔두고 왜 돈 쓰냐?
그리고 나 청국장 좋아해~
맛나게 먹고와."
"야. 내가 사줄. 야! 이씨.."
매번 얻어먹기도 미안해서.
아예 거절을 하고 일어나
식당으로 향하던 아빠였어.
'청국장.. 이게 뭐 어때서..'
밥을 퍼서 자리에 앉은 아빠.
4명이 앉을 수 있는 식탁에
자리가 채워지는 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어.
"어? 도대리 혼자네? 여기서 먹어도되지?"
"웬일로 혼자야? 정현이는? 밥 안 먹는데?"
"니 마누라 어쩌고 혼자 있냐?"
마누라란 소리에 사레가 들려버린 아빠
"케케켁.. 마..마누라요?"
당황하며 되묻는 아빠를 보며.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조용히
말을 건네던 다른 팀 선배.
"정현이가 니 오피스 와이프라며?
내가 또 이런 뉴스엔 강하잖아."
"누..누가 그래요? 그냥 친구라니까?"
"에헤이 이 양반아.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딨나?
그리고 너넨 .. 좀 많이 그래.. 너도 알잖아?"
어이가 없었지.
늘 들어왔던 둘이 사귀냐는 말.
하지만 이번엔
그냥 웃어넘길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무슨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 모르겠는데
이거 상당히 불쾌합니다.."
"어? 야 아님 마는 거지 뭘 불쾌까지.."
"몇 년 전에 이상한 소문 때문에
저 고생하는 거 보셨잖아요."
"이야..도리 생각보다 뒷끝 기네..
너 퇴사하네 마네, 김과장을 쫓아냈네
하면서 소문났던 거? 그게 언제 적 일인데"
"헛소문이란 게
진짜 사람 피 말리는 거거든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나 잔반통에 음식을 쏟아붓고는
사무실로 향했어.
"야..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거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듯한
선배의 혼잣말을 뒤로하고 말야.
"짠! 니가 좋아하는 헤이즐넛으로 사왔지.
와.. 청국장 냄새.. 반찬은 뭐 나왔어? 고기?
아..아무리 고기라도 청국장은 좀.."
점심시간이 끝나갈 때쯤
자리로 돌아오던 정현이.
언제나처럼 한 손엔 자기 거,
또 한 손에는 아빠 커피를 들고 와서는
아빠에게 내미는 정현이었어.
"뭐해? 안 받아?"
잠시 말없이 커피를 바라보던 아빠.
"고마워. 근데 굳이 안 사줘도 돼"
예상치 못한 아빠의 말에 당황하는 듯
보이던 정현이
"응? 왜? 혼자 먹기 그래서 사오는 건데?"
"돈도 아깝고.. 사람들도.. 아니 아무튼"
"와..이제 누나 지갑까지 신경 써주는 거야?"
사람들 소문 때문이라고 말하려다가
정현이 성격에 또 길길이 날뛰거나
아니면 반대로 상처를 받거나
뭐가 됐든 둘 다 좋지 않을 거란 생각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어.
"오늘 저녁에 소주 한잔 어때?
예서언니는 오늘 약속 있어서 못 간대"
"아.. 나도 오늘 약속이.."
"어?"
커피에 이어 술까지 거절당하자
한동안 말이 없던 정현이.
"야."
언제 일어났는지 아빠 옆에 서서
내려다보며 말을 건네던 정현이
"담배 피러 가자."
"아까 다녀왔어."
"그럼 담배 하나 줘봐"
"뭐?"
"담배 하나 줘봐. 이참에 한번 펴보게.
아니면 따라나오던가"
바카라상 위에 올려둔 담배갑을 집어들려는
정현이의 손을 툭 치고서는 잽싸게
낚아채는 아빠였지.
"하아..그래.. 가자.."
그렇게 평소처럼 둘이 흡연실로 향하는데
왜 그렇게 뒤통수와 등이 따갑던지...
흡연실에 들어서자마자
담배를 꺼낼 새도 없이 아빠를 노려보며
묻던 정현이.
"너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다 얘기해봐 누나가 들어줄게."
정현이의 질문에 답 대신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한동안 말이 없던 아빠를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던 정현이.
그렇게 2분 정도 지났을까?
"뭔데~? 청국장 맛이 별로였어?
벌레라도 나왔어?"
"아니.."
"그럼 뭔데? 너 뭔가
지금 굉장히 뭐가 많은 사람 같아."
담배를 비벼 끄고 다시 입에 문 담배.
불을 붙인 뒤 힘껏 빨아들이는데
가슴에서 갑갑한 뭔가가 울컥하는
바람에 한숨과 함께 확 쏟아내버렸어.
"후~아!"
"어? 한숨까지? 뭔데? 또 누가 괴롭혀?
이번엔 누구야? 내가 혼내줄게."
자기가 혼내준다며 팔까지 걷어붙이면서
오버하던 정현이.
"너..."
"그러니까 너. 너가 누군.. 아? 나...?
내가 널 괴롭혀?"
갑자기 우울모드로 들어간 정현이.
이야기를 해줄까 말까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그날 점심에 있었던 일을
털어내버린 아빠였지.
"푸하하. 난 또 뭐라고. 너 몰랐어?
그런 소문 도는 거? 되게 오래됐는데?"
"너 알고 있었어? 그런데 괜찮아?"
"너.. 나 여자로 보여? 이러지 마..
너 내 취향 아니야.."
"뭐래? 실성한 거야?"
뭐가 그리 웃긴지 배까지 부여잡고
한참을 깔깔대던 정현이.
이내 웃음이 잦아들더니
갑자기 흡연실 문을 열고는 어디론가
뛰어가더라고.
'하아.. 하나 더 필까..?'
이미 두 개를 핀 뒤라 살짝 고민됐지만
결국 손은 담배를 꺼내고 있었지.
"뭐야? 또 펴? 너 그거 세 개째야. 너 그러다 죽어.
죽더라도 애들 시집장가는 보내고
죽어야지. 노후에 침대에 누워서 손주들 재롱대신
링거 방울 떨어지는 것만 보고 있을 거야?"
다시 열린 흡연실 문.
그곳엔 정현이가 테이크아웃용 커피를
들고서 아빠에게 잔소리를 하고 있었어.
"야! 이거 받어. 난 또 뭐라고.
뭐 굉장한 일이 있는 줄 알았잖아."
"넌 어떻게 그렇게 무심하냐?"
아빠에게 성큼 다가와 직접 손에
커피를 쥐어주던 정현이.
"이게 신경 쓸 일인가?
우리가 연애를 했냐? 아니면 잠을 잤냐?
그냥 자기네들끼리 뒷담하는 거잖아.
그런 거에 일일이 신경 쓰기엔 내 청춘이
너무 아까워."
"속 편하네.."
"냅둬 저들은 친구가 없어서
부러워서 그래~ 그리고 어쩔 거야?
소문이 어쨌든 우린 친군데~"
"그렇지 친구지."
"그냥 친구인가? 너 하루에 몇 시간 깨있어?
내가 대충 계산해보니까. 16시간 정도
깨있거든?"
뭔가 떠올리려 하는 듯이
천장을 바라보는가 하면
손가락을 하나씩 세며 말을 잇는 정현이.
"출근 준비하고 출근하고 뭐 마트 가고
개인적인 거 뭐 하고 하는 시간 빼면
12시간 정도? 그중에 우리가 9시간을 봐.
가족들이랑 얘기하고 같이 살 부대끼는
3시간의 무려 3배라고.
이 정도면 가족 보다 가까운 사이 아냐?"
정현이는 이미 아빠를 친구라기 보다
가족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
아빠도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에
그날 직원들에게 들은
정현이 오피스와이프설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져버렸지.
"아빠 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자동응답처럼 들려오는
엄마의 아빠 왔다는 소리.
도도도 뛰어오는 도아와 어딘가 후다닥
달려갔다가 많이 불편해 보이는
로봇 장난감을 들고 나타나던 도윤이였지.
"아빠 이거 해주세요."
아직 신발을 벗지도 않았는데
로봇을 내밀며 마저 조립을 해달라던 너.
"어 좀 이따가. 아빠 일단 씻고."
"네.. 그럼 좀 이따 해요!"
그렇게 장난감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던
도윤이었지.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려는데
엄마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을 건네더라고
"헤헤 도씨 아저씨~"
"기분 좋아 보이네? 무슨 좋은 일 있어?"
"응! 씻고 와 밥 먹자. 애들도 지금 씻길 거지?
이따 얘기해~"
씻고, 밥 먹고, 너희들을 재우기까지
얼마나 할 일이 많던지..
뭐가 그리 재밌는지 물줄기만 닿으면
입을 벌리는 도아.
"아빠 뽀로로는요."
"아빠 동화바카라에서요"
"아빠 아까요"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씻기 전부터 다 씻을 때까지 쉬지 않고
떠들던 도윤이.
".. 다음부턴 우리 밥 먹이고 씻길까?.."
방금 씻겼는데도 밥 먹으면서
여기저기 흘리고, 묻히고..
옷도 갈아입히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어느새 잘 시간이더라고.
"결국 로봇은 못 만들어줬네?"
"그러게.. 흐아~ 시간이 너무 빠르다."
"아침엔 이따가 안아준다고 하더니
안아주지도 않고.. 나쁜 아빠다!"
"아..맞네.."
널브러져 자고 있는 너와 동생의 가슴을
살짝살짝 토닥이며 아쉬움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엄마였지.
"그나저나 무슨 일인데?
좋은 일 있어 보이던데?"
"응! 나 있잖아."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침대 위에서
핸드폰을 들고 와 다시 앉는 엄마.
핸드폰을 이것저것 만지더니
화면을 보여주던 엄마였지.
"어? 이게.."
"이거 봐라~ 나 최종 합격했다?
다음 주부터 나오래~"
엄마가 지원한 병원 합격 통보 문자였지.
기뻐하는 엄마를 보며 아빠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어.
"이제 나도 일하면 우리 형편도
나아질 거야~ 고생했다 도씨 아저씨~"
"어.."
아빠의 얼굴에서 걱정하는 모습이
보였던 걸까? 엄마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가더니 아빠에게 물었어.
"무슨 걱정 있어?"
"어..아니..그럼 애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