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교, 그 이름 뒤에 있던 것들

해외살이 설렘과 생존 사이

by바람따라들레



무식하게 용감한 모녀의 국제학교 입성기


해외 국제학교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보통 비슷한 그림을 떠올린다.

영어유치원을 거쳐 탄탄한 선행을 마친 아이, 프리토킹이 가능한 영어 실력과 세련된 해외 매너를 갖춘 엄마, 여기에 넉넉한 자금력까지 갖춘 아빠. 국제학교라는 단어만으로도 꽤 여유로운 가족의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하지만 우리 집 사정은 그 상상과는 많이 달랐다.

아이들은 영어유치원 출신은커녕 강원도 산골에서 흙만지며 풀밭에서 뛰어놀던 농촌유학파 출신.

나는 수능 이후 영어를 거의 입 밖에 내본 적 없는 ‘영알못’ 엄마였기에 세련된 해외 매너와는 거리가 멀고, 그저 동방예의지국에서 배운 식사예절이 전부인 엄마였다.

군인 남편의 월급봉투 하나로 네 식구가 복작거리며 살면서, PX에서 저렴한 생필품들을 쇼핑하며 작은 행복을 누리던 평범한 가족일뿐이였다.

이곳에 와보니 아이들을 국제학교에 보내며 해외살이를 선택한 엄마들은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 것 같다.


영어 전공이거나 자신의 일로 영어 실력이 유창한 엄마

주재원 생활이나 유학 등 해외 거주 경험이 있는 엄마

해외 경험도 영어도 잘 못하지만 무식하게 용감한 엄마


나는 주저 없이 세 번째 유형이다. 정말, 무식해서 용감한 경우.


아이들은 사실 ‘엄마표 영어의 실패작’에 가까웠다. 파닉스도 제대로 마스터하지 못한 상태였다.

해외 영어 캠프를 다녀온 뒤 잠깐 동기가 생긴 적이 있었지만, 영어 학습지, 과외, 학원까지 1년 동안 이것저것 시켜 보았음에도 결과는 기대와 달랐다. 문제를 풀고 정답을 맞히는 공부만으로는 언어가 몸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 느꼈고, 그래서 아이들이 몰입할 수 있는 언어 환경을 만들어 주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사람들은 이런 선택을 ‘전략적인 이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치밀한 전략보다는, 어쩌면 무식해서 가능했던 용기에 가까웠다.


그렇게 조금은 무식하게 용감한 엄마와,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두 딸이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SNS 속 해외 국제학교 vs 현실속 국제학교


입국 한 달 차, 휴양지 같은 여유를 꿈꿨던 이곳에서 나는 현실이라는 매운맛 삼발소스와 마주해야했다.

장바구니 물가와 아이의 영어 실력을 붙들고 매일 씨름해야 하는 '고난도의 서바이벌장'에 들어온 것이다.

낙원은커녕, 1년 내내 푹푹 찌는 날씨 속에서 나는 한국에서 말레이시아로 그저 장소만 옮겨온 '글로벌 걱정 인형'일 뿐이었다.


동남아 국제학교 생활을 떠올릴 때 사람들은 SNS에서 본 장면들을 먼저 생각한다.

초록 잔디가 깔린 넓은 캠퍼스, 수영장과 체육관을 자유롭게 오가는 아이들, 영어로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친구들, 럭셔리한 호텔급 수영장과 화려한 야경이 보이는 통유리창의 고층 콘도 또는 넓은 마당이 있는 타운하우스.


방학이면 발리나 호주를 내 집 드나듯이 오가며 아이에게 “세상이 너의 무대야”라고 말해주는 부모들.

그들은 이 국제학교 시스템에 완벽한 승리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화려한 프레임 뒤에는 환율걱정, 물가걱정에 여유롭지 못한 나 같은 엄마도 있다.



마트를 누비는 하이에나


아이들이 등교하면 나는 다시 전장으로 나간다. 예전에는 PX에서 안온한 보급을 누렸다면, 지금은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현지 마트가 전장이다. 야채는 조금이라도 더 신선하고 저렴한 로컬 마트에서 사수한다.

동남아에서 망고와 두리안을 실컷 먹을 줄 알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사과와 포도 같은 과일은 먼 나라에서 온 귀한 수입품이라 한국보다 비쌌고, 열대 과일조차 물가 상승을 피해 가지 못했다.

결국 내 입은 건너뛰고, 아이들 입에만 넣어줄 만큼만 사 들고 돌아와 어미새처럼 배고픈 아기새들에게 한입씩 넣어준다. 이곳은 이슬람 국가라 돼지고기사기도 번거롭고 질좋은 고기를 구하기도 어렵다.

자연스레 식탁은 닭과 계란, 두부로 채워진 '강제 건강식'이 되었다. 집밥으로 식비를 줄이기 위해 매번 영수증을 챗GPT에 올려 현지 물가를 학습 시키고 어느 마트가 더 싼지, 어떤 재료로 요리를 하면 좋을지, 하루 채워야할 영양소까지 고려해가며 한 달 식단과 가계부 예산을 짠다.

1링깃이라도 아끼기 위해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오른쪽 운전석의 차를 몰며 하이에나처럼 먹잇감을 찾아 마트를 누벼다닌다.



하지만 진짜 전쟁터는, 방과 후부터


진짜 싸움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온 뒤 시작된다.

학교 진도는 빠르게 지나가고, 아이의 영어 결손은 눈덩이처럼 불어간다. 하지만 비싼 국제학교 학비만으로도 경제는 이미 과부하 상태, 여기서 추가로 한국식 학원이나 과외까지 감당할 여력은 없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눈물겨운 ‘엄마표 학습’과 나의 만능 친구이자 비서인 ‘챗GPT’.

(언젠가 내 전공을 살려 챗GPT를 활용한 해외살이 잘하는 법과 AI 교육법 등도 글로 써볼 생각이다.)

숙제가 있는 날이면 아이보다 내가 먼저 바카라상에 앉는다. 노트북을 열고 구글 번역기와 챗GPT를 켠다.

“국제학교 캠브릿지 year3 과정을 참고하여 이 숙제 내용을 10살 아이가 이해할 수 있게 단계별로 설명해 줘.” “00가 이 부분을 어려워하는데 이해하기 쉽게 예시도 들어줄래?”


챗GPT가 헛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구체적으로 프롬프트를 입력하고 나면 그 답변을 바탕으로 나는 아이의 숙제 가이드이자 일일 영어 선생님이 된다. 하지만 아이 공부를 도와줘본 엄마들은 알겠지.

화내지 않고 상냥하게 꾹 참고 설명하는게 얼마나 어려운일인지..

매번 가장 먼저 무너지는 건 엄마의 정서였다.

낯선 용어와 까마득한 문법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대면서도 가르쳐보려 애써도, 영어교육법을 알 턱이 있나. 아이는 배울 마음 1도 없으니 배꼽에서부터 화약처럼 뜨거운 것이 피어오르더니, 파파팍! 형형색색의 폭죽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

“이럴 거면 컴퓨터 선생님이 아니라 영어 선생님을 했겠지!”

그렇게 엄마의 정서와 아이의 영어도 와르르 무너지는 날이 수두룩하다.


전쟁터 속에서 하루를 쏟고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아등바등 버텨낸 피로가 해일처럼 밀려온다.

이것이 SNS 속 화려한 '국제학교 맘'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치열하고 처절한 엄마의 '버티기 현장'이다.

매일 밤 소진된 몸을 뉘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토록 고단한 해외생활 끝에 우리가 만나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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