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해지는 '통일'의 이름 앞에 서서
철원 소이산 전망대에 오르면,
계절의 정직한 노동이 빚어낸 광활한 철원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 막 모내기를 끝낸 무수한 논들이 거대한 거울이 되어 하늘을 담고 있는 풍경.
머지않아 저 들녘은 가을의 뜨거운 햇살을 머금고 황금빛 바다로 일렁일 것이다.
그러나 그 평화로운 들녘 너머로 시선을 돌리면,
지난 수십 년간 인간의 발길을 거부한 채 스스로를 키워온 4km 폭의 DMZ 정글이 끝도 없이 드리워져 있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아 더욱 울창해진 저 초록의 띠는,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넘을 수 없는 가장 견고한 심리적 장벽이 되어 그곳에 누워 있다.
정글 너머,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북의 땅.
저 멀리 지평선 끝에 흐릿하게 제방처럼 펼쳐진 산맥이 보인다.
개마고원 다음으로 높다는 '평강고원'이다.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지열 너머로 보이는 저 고원은 마치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깝게 느껴진다.
언제쯤이면 저곳에 내 두 발을 딛고 서서 평강의 바람을 맞을 수 있을까.
눈으로만 만족해야 하는 이 시각의 유희가 안타까워 자꾸만 시력이 흐릿해진다.
가볼 수 없는 곳이기에 더욱 선명해지는 그리움이 평강고원의 능선을 따라 아프게 흐른다.
언젠가부터 '통일'이라는 단어가 우리 곁에서 점점 휘발되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한때는 민족의 숙명이자 당위였던 그 이름이,
이제는 복잡한 국제질서의 파고 속에서 당사자들의 의지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거대한 퍼즐이 되어버렸다.
더욱 서글픈 것은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통일은 더 이상 간절한 염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미 '두 개의 국가'라는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으며,
굳이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가 공유했던 그 뜨거웠던 약속은 점점 묘원(渺遠)해지고,
소이산에서 바라본 평강고원의 풍경처럼 안갯속에 갇혀가는 것만 같다.
전망대 데크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눈으로만 담기에는 저 땅이 품고 있는 생명력과 역사의 무게가 너무도 뜨겁다.
인위적으로 그어놓은 선 하나에 가로막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바람을 맞으면서도 끝내 서로의 흙을 밟아보지 못하는 이 가혹한 현실.
언젠가는 이 눈의 만족을 넘어, 내 두 발로 저 평강의 대지를 밟으며 걷고 싶다.
통일이라는 단어가 희미해질지언정,
저 땅이 우리와 이어진 한 몸이라는 감각만은 잊지 말아야 하기에.
소이산의 바람은 오늘도 나를 대신해 DMZ 정글을 지나 평강고원으로 자유로이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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