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의 숨겨진 외계인 시점을 열어주는 <우주 전쟁>
나홍진의 영화 <호프>는 철저히 웰스의 <우주 전쟁> 포맷을 따르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와 <호프>에서는 인간과 슬롯, 이 세계의 취약성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공략하고 있다. 그것은 예술사에서 오래된 전통이 있는 표현 방식이다. <타임머신>으로 유명한 허버트 조지 웰스의 <우주 전쟁>은 톰 크루즈 주연의 동명 영화로도 상영된 적이 있다. <호프>에서 외계인이 지구의 한 마을과 휘말리게 된 것은 철저히 외계인의 어떤 사정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참 재밌는 건, 영화 이후에 나타나는 영화적 현상들이다. <호프>에 대해서 호평하는 평론가나 유투버에게 지나칠 정도로 공격적인 댓글들이 달리면서 슬롯 문제 비슷하게 되어 가고 있다. 이들의 공격은 '자기중심성'이라는 뿌리를 가지고 있다. 관객 중심주의, 인간 중심주의, 지구인 중심주의, 자기 중심주의는 다 비슷한 성격들이다. 하지만 감독의 의도는 "외계인 중심주의"라고 생각한다. 지구인을 상수로 두는 한 <호프>가 싫어질 수밖에 없다. 우주적 관점에서 <호프>를 볼 수는 없는 것일까?
나홍진 감독이 이런 반응을 예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관객의 눈치를 보지 않는 또라이 감독이 <호프>를 만들어준 데 대해서 나는 감사한다. 만약 관객의 눈치를 보고 비난을 안 듣는 정도에서 타협을 했더라면 이도저도 아닌 영화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호프>는 '외계인의 사정'이 중심을 이루는 서사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호포라는 마을 주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호포 주민들과 주인공(황정민, 조인성, 정호연) 등은 '화자'다. 화자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주체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계인들이 어떤 알 수 없는 사정에 의해서 지구라는 별에 오게 되었기 때문에 사건이 생긴 것이다. '외계인의 알 수 없는 사정'은 끝까지 베일에 감춰져 있고, 그것은 작품의 창작 의도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호프>는 정확히 <우주 전쟁>의 포맷을 따른다.
원작 <우주 전쟁>은 화성인의 가공할 만한 공격에 의해서 지구의 문명은 순식간에 초기화되고 인간들은 무력감에 시달리며, 더 이상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과정에서 신에 의존했던 목사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다. 종교가 더 이상 세계를 구원할 수 없지만, 신에게 의존했던 타성이 기괴할 정도로 몸에 배어 어리석을 판단을 내리고 결국 목숨을 잃는 목사의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우주 전쟁>은 지구인의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풍자적으로 그려진다. 언론은 늘 헛다리를 짚고, 사람들은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언론에서 갑자기 떠들었을 때 일대 혼란이 벌어지고 피난민들의 식량과 재산을 강탈한다. 포병은 자신의 관념을 고수하며 비효율적인 땅굴파기로 세월을 다 보낸다. 호포 마을 사람들은 안 그런가?
외계인의 침공은 그 슬롯의 문명 수준과 생존 능력을 시험한다. 침입한 외계인에 의해서 호포를 둘러싼 마을의 모순과 문제점, 폐쇄성이 낱낱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 <호프>가 <우주 전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받는지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외계인에게 심각한 타격을 준 것은 인간이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 나타난다. <우주 전쟁>에서는 강력한 화성인들이 인간의 식량을 섭취했다가 미생물에 전염돼 전멸하고 만다. 작가는 미생물을 '조그만 동맹군'이라고 표현했다. <호프>의 외계인 역시 호포 마을의 주력이 아니라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양배'라는 인물에 의해서 왕자가 살해되면서 발이 묶이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양배는 호포 마을에서 미생물로 취급되는 듣보잡 중의 듣보잡이다. 그의 어설프 행위가 태풍의 눈이 되어 마을이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외계인은 내전에 시달려 우주선이 침몰하고 만다.
<호프>의 외계인들이 지구로 온 목적과 이유를 나타나지 않았다. 우연히 발견되었을 수 있다. 외계인의 높은 신분인 왕자는 호기심이 발동해 지구를 구경하러 나왔다. 바미기르는 왕자를 돌보는 하급 신분(하인)이었을 것이다. 왕자는 바미기르를 따돌리는 데 성공하지만 양배에게 들켜 살해당하고 만다. 바미기르는 왕자님을 찾기 위해서 마을로 잠입했다가 마을을 파괴한다. 범석 일당은 바미기르가 죽은 어린 외계인의 부모라고 생각했지만, 보호 바카라임이 있는 성체로 보는 게 타당하다. 바미기르는 보호 바카라임을 물어 사형에 버금가는 중벌을 받을 것이 분명했기에 똥줄이 탔을 것이다.
숲에서 조인성 무리를 상대한 외계인이 많지 않았던 것은 외계인 내부에서 단결되지 않은 상황을 암시한다. 비행선이 추락한 것 역시 외계인 사이에서 심각한 내분이 내전으로 비화되면서 벌어졌을 수 있다. 권력 투쟁으로 인해 지구에 오게 된 것인지, 왕자의 죽음이 권력 투쟁의 빌미가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구인들은 외계인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영화가 끝난다.
<우주 전쟁>에서 화성인의 침공이 태풍처럼 휘몰아치고 지나가듯이, <호프>에서도 외계인의 습격이 태풍처럼 휘몰아치고 지나간다. 이것은 외계 존재의 습격 전통에 맞게 서술한 것이기에 나는 유감이 없다. 왜 유감이 있어야 하는가? <우주 전쟁>이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영국 슬롯의 문제점을 낱낱이 보여준 것처럼, <호프>는 한국 슬롯와 지구 슬롯의 문제점들을 낱낱이 보여주는 헤프닝으로 치고빠지기를 했다.
<호프>가 충분히 설명적이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비난을 받거나, 충분히 지구/관객 중심적으로 친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