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디세이> 리뷰: 멧 데이먼이 오디세이를 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
요즘 한달에 한 번씩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오디세이>는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크리스토퍼 놀란과 멧 데이먼의 조합도 좋았고(오펜하이머에서는 조연을 맡았지만) 왜 멧 데이먼일까 질문하면서 보았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최근 작품들을 보면서 그가 '인간의 취약성'을 '영웅'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웅의 취약성'이 주제가 되어야 하는 까닭은 니체의 바카라 제목처럼 '권력에의 의지'를 깨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고주몽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위계적인 슬롯에서는 기업 총수나 대통령, 국회의원 같은 힘센 자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은 동경이 묻어 있을 수밖에 없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바로 그 신화를 집중 공격하고 있다. 우리들 자신이 영웅이며, 우리들의 취약성을 깨뜨리고 일어서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영웅들의 그림자에 갇혀 있는 언제까지나 세계의 손님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멧 데이먼은 <오펜하이머>에서도 비중 있는 역할을 했지만 <오디세이>에서는 반드시 주연을 맡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본 아이덴티티>의 콘셉트를 <오디세이>에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본 아이덴티티의 '제이슨 본'은 자신이 살인 기계로 길러졌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기억상실증에 빠져 진실의 조각들을 맞춰가는 영화다. 살인 기계가 필요했던 이너서클은 이제 그를 제거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누군가 그것을 막기 위해서 몸에 스위스은행 계좌번호 문신을 새기고 빼돌렸던 것이다. <오디세이>의 이너서클 역시 오디세이라는 지략가를 소비할 필요가 있었다.
정확히 이런 유형과 어울리는 작품은 <어스시의 마법사>이다. 주인공 게드는 마법 학교에서 귀족 출신 마법사 보옥에게 시달리며 급발진을 한다.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오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그로 인해서 대현자는 죽고 만다. 게드가 만난 소녀 역시 게드의 자만심을 자극하면서 변신을 해봐라, 영혼을 불러 내 봐라 하고 부추긴다. 소녀의 뒤에는 왕족이라는 이너서클이 있었다. 이 작품은 게드가 자신의 그림자와 싸우는 이야기이지만, 게드의 힘을 소비해 국가의 근심을 해결하려는 이너서클의 이이제이도 함께 담겨 있다.
<오디세이> 역시 변두시 섬 나라 이타카의 지략가 오디세이를 끌어들여 트로이의 해상무역권을 빼앗으려는 아가멤논의 정치 구도라는 판 위에서 오디세이가 이이제이를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지 않을 수도 없는 지독한 딜레마에 빠져서 망각의 열매를 먹고 기억을 잊고 싶기도 하고 기억을 열매를 끊고 기억을 되찾고 싶기도 한 인간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오디세이> 첫 장면과 <본 아이덴티티> 첫 장면이 이상하게 오버랩되는 것은 분명히 놀란 감독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이너서클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며 그들에게 소비당하는 개인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하나의 현실인식으로서 놀란 감독의 세계관 안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하지만 본질적인 메시지는 소비당하는 개인 그 자체다. 그래서 이 영화를 한 줄로 정리하면 파스칼이 팡세에서 했던 말보다 더 적절한 건 없을 것 같다.
인간은 위대하다. 왜냐하면 자신이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파스칼 『팡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