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능한 사랑> 리뷰
요즘은 내 어머니에 대한 단편소설을 쓰고 있다. 어느덧 팔순으로 기울고 4.3때 양친을 모두 잃은 현대사의 피해자이자 고단한 생계 투쟁을 멈출 수 없었던 내 생명의 원천인 어머니를 소설화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표현방식으로 소설을 선택했을 때 나는 '가능한 사랑'의 스펙트럼을 계단처럼 밟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지독한 역설이다. 나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가능한 사랑'의 출발점은 '불가능한 사랑'이어야만 한다
이창동 감독이 개봉 후 인터뷰에서 밝혔던 제목에 대한 모호한 발언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꼽씹어야만 해석의 단초를 건질 수 있다.
흔히 사랑 이야기라고 하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전제로 생각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반대로 '가능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창동 인터뷰 발언)
이창동 감독 신작 <가능한 사랑>의 주인공 예지(조여정 분)가 거꾸로 출발했다는 것이 잘못 끼운 단추였지만 영화의 출발점이자 진보적인 인간들이 범하는 실수이자 진보적인 의제가 지지부진한 이유이기도 하다. 가능한 사랑이 가능하라는 기대를 일단 접어야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한 깨달음이지만, 예지에게는 PC함을 넘어서 약간 트로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거기다 자기연민까지 더해져서 상대방의 고통을 '금광'처럼 인식하게 만드는 비인간성까지 치닫는다. 문제는 이와 같은 파국이 가랑비에 옷 젖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전개되며, 예지는 파국이 찾아온 이후에도 왜 파국이 찾아왔는지 깨닫지 못한다.
예지는 이창동 감독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어머니를 단편소설로 다루려는 나 자신에게도 날카로운 질문이다. 예지의 존재가 던지는 질문은 한마디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네가 만들고자 하는 작품과 시선은 고통에 근거하고 있는가?
예지는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지만 극 영화를 지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단지보처럼 다큐멘터리도 극 영화도 되지 못한 어정쩡한 지점에서 사람들을 휘말리게 하고 생활을 구겨버리는 고통스러운 구멍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다.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권을 표방한 역대 진보 정권은 결국 중산층과 서민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정치적 자해행위가 되고 말았던 최근의 한국 정치를 영화적으로 풍자한다고 보았다. 물론 감독이 우리의 현주소를 정조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장 상징적인 장면을 핀셋으로 포착함으로써 전체적인 본질을 고발하는 것이 예술이 하는 일이기에 이창동은 예술적으로 우리들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미옥–호석 부부와 예지–상우 부부가 이상했다. 부부 같아 보이지 않았다. 예지와 상우는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부부라기보다는 '친구'에 가깝다. 친구는 친구고 부부는 부부다. 부부여야 하는 순간에 친구는 외통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관계의 최소한의 표식은 남겨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미옥과 호석 부부는 더 부부 같지 않다. 아예 아들인 철까지 포함해서 각자도생의 상황으로 이혼하거나 자살하지 않고 지금까지 부부관계나 가족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기적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영화는 붕괴된 가족에서부터 출발한다. 다만 붕괴의 유형은 전혀 다르다.
미옥, 호석, 철 가족은 난파선 같은 유형이라면 예지-상우 가족은 관념적인 가족이다. 우선 상우에게 예지는 아내라기보다는 '극복 과제'에 가깝다. 가족들이 태권도를 반대했기 때문에 태권도를 잘 하게 된 상우는 예지와의 결혼 역시 태권도와 다를 바가 없다. 예지와 상우는 자아 비대증 환자 같은 인물들이었기에 더욱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상우의 자유는 계승된 자유이며 자의적인 자유이며, 한 번도 도전 받지 않았던 자유였다. 그렇기 때문에 위태로울 수밖에 없는 자유다.
미옥은 남편이 옥쇄파업 과정에서 동료들에게 배신당하고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욕망을 보존하고 있는 인물이었지만 '뿌리가 병든 욕망'으로 보인다. 그것은 호석으로부터 전염된 것으로 보인다. 호석은 재선충병에 걸린 소나무다. 불행중 다행은 자신이 재선충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최근에 깨달은 소나무다. 재선충병은 소나무의 울타리에 살던 미옥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미옥은 병의 전염을 상징하는데, 감독은 여기서 놀라운 장치를 추가했다. 병이 전염에 전염을 거듭하면서 치유의 틈을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맹렬하게 전염되면서 자연을 정화하고 손 씻는 습관의 강제로 공중위생에 혁신적인 발전을 자극한 것과 같다.
미옥은 상우와 예지가 노출한 병에 감염된다. 그것은 다시금 상우와 예지에게 되돌아온다. 특히 상우의 자유는 '패턴화된 자유'였다는 것이 미옥에 의해서 완전히 드런난다. 자유와 패턴화된 자유의 차이는 뜻밖의 일격이 왔을 때 보이는 유연성에서 나타난다. 상우의 자유는 미옥의 일격으로 완전히 부정됨으로써 결국 자유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나는 예지와 미옥이 던진 날카로운 질문 때문에 아직도 어지럽다. 내가 어머니를 단편소설로 씀으로써 그녀의 고통을 헤아린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가능하지 않음은 나의 소중한 출발점이며, 거기서부터 가능한 사랑이라는 조각을 1개씩 짜맞출 것이다.
그러니까 '가능한 사랑'은 1,000의 퍼즐을 맞추는 놀이다. 그리고 상우와 예지는 첫 번째 퍼즐 조각을 힘겹게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