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마케터

실패한 물리학도의 커리어 표류기

by노다해


마케터를 하고 있다. 나와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케팅은 뭐랄까 트렌디한 감각을 지닌 사람이 하는 일 같았다. 나의 고정관념과 선입관으로 마케팅은 문과의 영역이었다. 내가 속한 딱딱한 숫자의 세계와 알록달록한 마케팅의 세계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 나는 마케터로 밥 벌어먹고 산다. 물리학을 전공한 내가 어쩌다가 마케팅을 하게 되었는지 설명하려면 지금까지 겪은 실패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진로 고민을 늦게 시작한 편이다. 막연히 계속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밖에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렇게 계속 공부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박사 학위를 받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대학원에 진학해 연구를 해보니, 적성과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른 도리가 없어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박사 수료까지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남은 인생을 연구자로 살아갈 것 같지는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석사로 학위 과정을 마무리했다.


물리학과 졸업생이 취업을 한다면 보통은 반도체 분야로 간다. 거의 모든 전자기기에는 반도체가 필요하고, 양자역학에서는 반도체의 기작을 다룬다. 하지만 나의 전공은 양자역학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실험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었다. 대학원에서는 통계물리학을 전공했는데, 다루는 주제들은 꽤나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업에서 쓸모가 있다고 하기는 어려운 그런 분야이다. 순전히 나의 흥미와 호기심으로 고른 분야였으니, 막상 졸업을 하고 취업을 고민할 때가 되어 막막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과학의 언저리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는 과학기술인이 모인 사단법인에서 일했다. 과학이 슬롯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고 싶었다. 주로 행정 업무를 맡았다. 전공과 직접 맞닿는 업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오랜 세월 흥미를 느낀 과학 가까이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위안 삼았다. 한편으로는 내 전공과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과학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 흥미롭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길지 않았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1년의 기간을 끝으로 퇴직했다. 그렇지만 다음 온라인 게임도 가능하면 과학과 연관성이 있는 곳으로 구하고 싶었다.


새로운 온라인 게임을 찾아 헤매다 이번에는 연구 자금을 지원하는 재단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니, 시작하게 될 줄 알았다. 서류와 면접에 합격하고 건강검진까지 받았으니, 입사는 확정된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원래 1명을 뽑는 공고였는데 무리해서 2명을 채용하려다 결국 원래대로 1명만 뽑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건강검진을 받을 무렵, 사무실에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느니 하는 이유로 입사일을 한 달이나 더 뒤로 이야기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왜 불안한 예감은 빗나가지를 않는지.


이미 주변에 소문을 낸 참이었다. 이전 온라인 게임에서 알게 된, 나의 퇴직을 아쉬워한 많은 사람을 비롯해 부모님과 예비 시부모님께도 소식을 알렸다. 출근을 위해 기존에 하고 있던 취미 활동도 정리했다. 바빠질 것을 대비하여 입사 기념 여행 일정도 잡아두었고, 결혼식 준비에도 박차를 가한 참이었다. 하지만 불합격 통보를 받으면서, 들뜬 마음으로 추진력을 얻은 일상이 갑자기 김이 빠졌다.


역시 계약서를 쓰기 전까지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확실해지기 전에 주변에 알린 나 자신을 자바카라하기도 하고, 이럴 거면 애초에 면접을 합격시키지 말든가 하는 원망도 들었다가, 갑자기 비어버린 시간에 무얼 해야 할지 허탈하기도 했다.



어쩌다, 마케터


새로운 채용 공고에 지원서를 내야 마땅하겠지만, 도무지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에서 데이터 분석 부트캠프를 발견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공부만큼 속 편한 일도 없는 법이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수풀을 헤쳐가며 샛길을 만들어내는 연구와는 달랐다. 커리큘럼이 짜여 무엇을 공부할지 정해져 있고, 이미 많은 사람이 지나다녀 만들어진 길을 따라가는 일만큼 바카라임 없는 쾌락도 있을까.


데이터 분석이라는 소위 핫한 분야를 이번 기회에 공부해 보는 것도 좋아 보였다. 사단법인에서 일하면서 수치를 기반으로 한 이과적 사고방식을 살리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데이터 분석이라면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데이터 분석 부트캠프를 수료하고 작은 스타트업에서 인턴을 시작했다. 작은 조직이다 보니 맡은 업무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마케팅을 맡게 되었다.


막상 마케팅을 해보니 나의 선입견이 꼭 들어맞지는 않았다. 요즘 마케팅에서는 알고리즘의 규칙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했다. 어떤 콘텐츠가 검색 결과 상단에 뜨는지, SNS 알고리즘이 어떤 게시물을 더 퍼뜨리는지 등 이런 것들을 파고들다 보니 생각보다 숫자에 기반한 논리적 사고가 필요한 일이었다. 콘텐츠를 매끄럽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담을지 설계하는 데에는 이과스러움이 필요했다. 따지고 보면 딱딱한 숫자의 세계와 그리 멀지 않은 셈이었다.


게다가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원래도 내가 즐겨 하던 일이었다. 영상 편집 툴로 브이로그를 만들어 올리고, 과학을 일상적인 소재로 풀어내는 에세이를 한 달에 한 번 뉴스레터로 연재하고 있다. 다만 이전에는 나의 일상이 소재였고 콘텐츠를 만드는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기업의 서비스가 소재가 되었고 더 많은 사람에게 닿는 것이 목적이 되었다.



실패로 쌓아올린 인생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내가 학교 밖에 나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이런저런 시도해 보았지만, 내 길이라고 할 만한 것은 찾지 못한 채로 부유했다. 시간은 흘러 친구들은 모두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나는 여전히 어느 것 하나 증명해 내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마케팅 업무를 맡으면서 이제는 나의 길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학원에서 좌절한 덕분에 비영리법인이라는 전혀 다른 분야로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새로운 온라인 게임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좌절한 덕분에 데이터 분석가로 전향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우연한 기회로 예상치 못한 업무를 맡게 되면서 멀게만 느껴졌던 마케팅이 사실은 내가 즐길 수 있는 업무라는 것도 발견했다.


물론 이렇게 과거의 실패를 긍정하는 것도 지금 내가 하는 일에 만족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테다. 또 마케팅 일을 조금 더 하다 보면, 이것도 내 길이 아니었다며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설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껏 문이 하나 닫히면 반드시 또 다른 문이 열렸다. 여러 실패를 겪으면서 인생은 예상치 못한 경로로 나를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내 인생은 조금씩 더 다채로워진 듯하다. 그러니 예상치 못한 일로 또다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더라도, 그리 좌절하지는 않을 듯하다. 내 인생에 또 다른 색채가 추가되는 일일 테니.


tempImagenxVz6a.heic(사진: Unsplash의 Fatih)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자전거, 뱃살, 고래, 커피 두 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