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호프 리뷰 (스포 있음)
"엄마, 얘는 착한 놈이야?"
"아니, 나쁜 놈이야."
아이가 어렸을 적 바카라이나 티비를 볼 때면 항상 하는 질문이었다. 동화바카라이나 만화 속에서 착한 놈과 나쁜 놈의 차이는 생각보다 명확하다. 어리고 예쁘장한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주인공은 당연히 착한 놈이고, 늙고 못생기고 사람과 다른 형체의 생김새인 생명체는 결국 나쁜 놈이다. 아이는 애매한 조연을 콕 집어서 항상 물어봤었다.
영화 호프는 착한 놈과 나쁜 놈의 경계를 애매하게 만들기는커녕 그냥 무참하게 뒤엎어 버린다. 그리고 의미가 있는 승리 또는 어쩔 수 없는 패배라고 규정하는 인과 역시 무참하게 무너뜨려 버린다. 무적처럼 살아남아 영웅이 될 일만 남은 것처럼 보이는 성기는 영배가 갑자기 운전대를 틀어버리는 바람에 부딪쳐서 날아가 버린다. 범석은 문 뒤의 물체가 괴물임을 확신하며 시원하게 총질을 했지만, 결국 운이 무지하게 좋았다고 자부했던 마을 동료를 죽이고 말았다.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나쁜 놈인 괴물을 처단하기 위해 범석은 계속 쫒는다. 도망가는 괴물에게 결정적인 총 한 발을 날려야 할 중요한 시점에, 범석은 괴물과 문득 눈이 마주친다. 그 순간 범석의 세상은 아주 잠시 멈춘다. 그 짧은 순간에 상대의 눈 안에 있는 무언가를 자기도 모르게 읽는다.
범석과 괴물의 입장의 차이는 극명하다. 외계인 (처음에는 호랑이였다가, 괴물이었다가 결국 외계인이 되는 전개도 꽤 흥미롭다) 입장에서는 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자식을 학살해 버린 파렴치한 종족들이고, 사람 입장에서는 갑자기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염치없는 종족이다. 둘의 입장에서는 내가 무조건 착한 놈이고 상대가 무조건 나쁜 놈이다. 그 입장의 차이는 결국 상대의 우주를 파괴해 버린다.
나쁜 사람, 나의 적이라고 선을 긋는 것은 가장 명확하고 그다음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에 참 쉽다. 어린아이는 흑과 백부터 배우고, 점점 다양해진 색깔을 배워가고, 결국 어른이 되면 색깔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온갖 불편하고 복잡한 상황까지 알아가게 된다. 그런데 그 어려운 색을 표현하고 이해하려면 논리가 자꾸 깨지고 복잡해지니 그냥 내 중심을 잡기 위한다는 방어본능으로 그냥 아이처럼 쉽게 나누려고 한다.
가령 내가 A라는 정치인을 나쁜 사람이라고 규정한다면 A가 하는 모든 일을 아주 쉽게 까내리고 욕할 수 있다. 내 입장에서는 A가 하는 모든 정바카라과 행동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고 손쉽게 비난할 수 있다. 또한, 가령 내가 B라는 세대와 선을 긋는다면 세상이 참 쉽다. B라는 세대에 속하는 모든 행동은 모두 다 B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규정해 버리고 등을 돌리고 피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우리가 흑과 백으로 상대를 규정하지 말고 조금 더 열린 눈으로 보자고 비교적 쉽게 권선징악(?)스러운 결론으로 마무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조금 더 깊게 파는 듯하다. 만약 그것이 우리가 스스로 흑과 백으로 규정해 놓은 인간의 도덕이라면 어떨까?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것이고, 건물을 파손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규정한 인간의 법과 규율, 슬롯적 통념이 정말 완전무결한 백일까? 결과가 아닌 머릿속 의도와 의지까지 심판한다면 과연 완전한 백색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거대한 우주 속에서는 그런 규정 자체가 의미 없는 입장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절대선과 절대악이 과연 있기는 하는 것일까? 갑자기 운전대를 틀면서 성기는 죽는다 (표면적으로). 내가 무심코 밟은 발자국에 지나가던 개미는 죽고, 갑자기 나타난 지진으로 무고한 사상자가 발생한다. 우리 삶은 어쩌면 인과응보라든지 새옹지마 같은 진리를 전혀 따르지 않은 예측 불가능한 상황으로 조기종영될 수도 있는데, 우리는 내가 중심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모든 의도와 결과에 과다하게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내 세계를 지키려는 논리를 만들다가 나의 의도와는 달리 자꾸만 칼리를 잠들게 하고, 상대의 우주를 파괴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우주의 티끌인 내가 살아가는 게 아무 의미 없다는 말은 아니다. 또한 모든 범죄와 악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니 다 용납하라는 말도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태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무작정 총을 쏘다가 문득 괴물과 눈이 마주지는 그 틈, 그 찰나의 틈새가 내 철벽 속 작은 홈이 호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 틈새는 내가 살아가는 동안 축적한 모든 내 경험과 기억과 습관과 학습과 주위사람들과의 관계가 다 버무려진 그것들이 모여서 만들어질 것이다. 그 짤막한 틈을 비집고 세상이 아주 잠깐 다르게 보이는 그 순간은 나만이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기회이자 자유이다. 틈을 닫고 여는 것은 각자의 자유다. 아무래도 자유가 없는 삶보다는 있는 삶이 낫다. 더 다른 시야, 더 다른 층위가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 그렇게 알아차릴 수 있다는 내 의지가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바로 희망이 아닐까.
*리뷰 모티브: 황관장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