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일이 많아서만 지치는 게 아니다.
내가 한 일이 어디로 갔는지 모를 때 더 빨리 지친다.
아침부터 데이터를 뽑는다.
슬랙에 답하고 엑셀을 고치고 PPT 마지막 장의 문장을 세 번 바꾼다.
저녁이 된다.
오늘 하루 종일 일했는데 무엇이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내가 만든 분석으로 누군가의 판단이 바뀌었는지 알 수 없다.
남는 것은 캘린더에 빽빽하게 찍힌 회의와 피로뿐이다.
나는 이런 일을 ‘증발하는 노동’이라고 부르고 싶다.
일을 했는데 결과와 연결되지 않는 노동이다.
게임은 아주 영리하게 해결한다.
몬스터를 잡으면 경험치가 오른다.
달리면 거리가 쌓인다.
체스에서는 말을 움직이는 순간 판이 달라진다.
내 행동과 결과 사이의 거리가 짧다.
별것 아닌 게임에서도 몇 시간을 견딘다.
반대로 회사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직원에게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겨놓고 결과를 몇 달 동안 보여주지 않는다.
“이번 캠페인 성과 어떻게 됐어요?”
“나중에 정리해서 공유할게요.”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사람은 질문하지 않게 된다.
개선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일을 못하게 된 것이 아니다.
자기 행동과 세상의 변화 사이에 연결선이 보이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하버드경영대학원의 테레사 아마빌과 스티븐 크레이머는 지식노동자들의 약 1만2천 건에 가까운 업무일지를 분석했다.
그들이 발견한 강력한 동기 중 하나는 의외로 거창한 보상이 아니었다.
의미 있는 일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
작은 진전이었다.
오늘 코드를 하나 고쳤다.
고객의 불만이 하나 줄었다.
분석 때문에 회의의 결론이 바뀌었다.
엄청난 성공일 필요도 없다.
앞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간이 확인할 수 있으면 된다. 연구자들은 ‘Progress Principle’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약 700명의 관리자에게 직원의 가장 중요한 동기가 무엇인지 물었을 때, 진전을 1순위로 꼽은 관리자는 불과 5% 정도였다는 점이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연봉.
승진.
스톡옵션.
복지.
회사 비전.
중요하다.
하지만 월요일 아침 사람을 다시 노트북 앞으로 데려오는 힘은 때때로 훨씬 사소하다.
“지난주 내가 한 일이 먹혔다.”
한 문장이다.
2026년의 온라인 게임은 감각을 잃기 쉬워지고 있다.
Microsoft가 2025년 생산성 데이터를 분석했더니 일부 지식근로자들은 핵심 근무시간 동안 회의·메일·메시지 등의 방해를 평균 2분마다 경험했다. 하루라는 단위에서 보면 ‘무언가를 끝냈다’기보다 수많은 요청에 반응하다 하루가 종료될 가능성이 커지는 환경이다.
일은 많아졌는데 완결감은 사라진다.
AI까지 들어오면서 상황은 더 묘해지고 있다.
예전에는 내가 결과물을 완성했다.
이제는 AI가 조사하고 요약하고 초안을 만들고 심지어 실행까지 한다.
생산성은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인간은 무엇을 했다고 느껴야 하는가.
버튼을 누르고 결과를 전달하는 사람만 남는다면 노동시간은 줄어도 일의 만족감까지 올라간다고 장담할 수 없다.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업무 자동화만이 아니다.
기여의 가시화다.
Gallup의 최신 글로벌 조사에서도 세계 직원 몰입도는 2025년 20%까지 내려갔다.
특히 관리자 몰입 감소가 두드러졌다.
Gallup 연구에서는 최근 일주일 안에 의미 있는 피드백을 받았다고 강하게 동의한 사람들의 약 70%가 높은 몰입 상태를 보인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약 25% 수준이었다.
피드백 하나가 모든 차이를 만든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중요한 단서가 있다.
피드백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다.
내 행동이 어떤 결과를 만들었는지 알려주는 신호다.
“수고했어요”보다 좋은 말이 있다.
“덕분에 이탈률이 줄었습니다.”
“덕분에 고객 대기시간이 짧아졌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일은 갑자기 달라진다.
엑셀의 셀이 고객으로 변하고,
코드 한 줄이 사용자 경험으로 변하고,
보고서 한 장이 의사결정으로 변한다.
숫자 뒤에 결과가 생긴다.
좋은 조직은 KPI를 많이 보여주는 조직이 아니다.
사람과 결과 사이의 거리를 짧게 만드는 조직이다.
개발자에게는 자신이 만든 기능을 고객이 어떻게 쓰는지 보여주고,
마케터에게는 어떤 고객 행동이 바뀌었는지 보여주고,
데이터 분석가에게는 분석 때문에 어떤 결정이 내려졌는지를 알려줘야 한다.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는 사실도 보여줘야 한다.
“우리가 세 달 동안 만들었는데 고객은 거의 쓰지 않았다.”
괴로운 결과다.
결과가 없는 것보다 낫다.
실패를 보면 다음 행동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실패가 아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다.
일을 오래 하게 만드는 힘을 ‘열정’이라고만 부르는 데 의심이 생겼다.
사람에게 매일 열정을 요구하는 것은 잔인하다.
사람은 매일 뜨거울 수 없다.
확인할 수는 있다.
어제보다 하나 나아졌는지.
내 일이 누군가에게 닿았는지.
내 판단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다음 하루를 시작할 이유가 생긴다.
리더가 해야 할 일은 사람을 끊임없이 독려하는 것이 아니다.
뒤를 돌아보게 해주는 것이다.
“여기까지 당신이 바꿨습니다.”
사람은 목적지만 보고 걷지 않는다.
자신이 지나온 거리를 확인하면서 걷는다.
거리가 보이는 순간
더 갈 수 있다.
자료와 출처
Teresa Amabile & Steven Kramer, The Power of Small Wins, Harvard Business Review — 지식노동자의 동기와 ‘Progress Principle’ 연구.
Gallup, State of the Global Workplace 2026 — 2025년 글로벌 직원 몰입도 및 관리자 몰입 변화.
Gallup, 관리자 피드백과 직원 몰입 연구 — 최근의 의미 있는 피드백과 높은 몰입도의 관계.
Microsoft Work Trend Index — 회의·메일·메시지가 만드는 업무 단절과 ‘Infinite Workday’ 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