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문이 열리기까지 남은 정거장은 셋이었다. 그는 손잡이를 잡은 채 서 있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몇 정거장이 지났는지도 방송을 듣고서야 알았다.
맞은편 유리창에 얼굴 하나가 비쳤다. 그의 것이었다. 그는 그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았다. 뭘 하다 왔는지, 뭘 하러 가는지 물으면 둘 다 대답할 수 있었지만, 그 사이에 뭐가 있었는지를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하루의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비어 있었다.
회사에서의 하루는 늘 비슷한 모양으로 끝난다. 팀장이 마지막으로 보낸 메신저 창을 닫으며, 오늘 처리한 일의 목록을 굳이 세어보지 않았다. 어제와 비슷한 개수일 게 뻔했으니까.
오늘 오후, 팀장은 그가 지난주 지시대로 정리해 둔 보고서 양식을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이거 왜 이렇게 했어?” “저번에 이 방식으로 하라고 하셔서요.” 그는 지난주 메신저 대화를 캡처해 둔 걸 보여줄까 잠깐 고민했지만, 결국 그러지 않았다. “아, 그랬나. 이번엔 이렇게 다시 해봐.” 팀장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파일을 다시 열어 처음부터 고치기 시작했다. 억울하다는 생각은 잠깐 스쳤다가 이내 어디론가 가라앉았다.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고, 아마 마지막도 아닐 것이었다. 매번 다르게 말하는 지시를 매번 다르게 받아 적는 일에, 그는 어느새 반박할 힘조차 들이지 않게 되어 있었다. 그게 편해서가 아니었다. 반박한 다음을 감당할 자신이, 그에게는 없었다.
입사한 지 이제 겨우 일 년 반. 옆자리 대리는 가끔 그에게 “신입 때가 좋을 때야”라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웃기만 했다. 좋을 때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 그는 매번 놓치고 지나갔다.
*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 부엌 쪽에서 늘 같은 냄새가 먼저 마중을 나왔다. 된장찌개, 혹은 고등어구이, 혹은 그 둘 다.
“왔니.”
“어.”
대답은 늘 한 단어를 넘지 않았다. 신발을 벗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짧았다.
그는 가방을 방바닥에 던져두고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오 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을 힘조차 어딘가에 맡겨두고 온 사람처럼,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벽시계 초침 소리만 방 안을 채웠다. 그 오 분이 그에겐 하루 중 가장 온전하게 혼자인 시간이라는 걸, 그는 굳이 헤아려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매일, 그 오 분을 다 흘려보내야 몸이 다음으로 움직였다.
밥상은 이미 차려져 있었다. 국그릇 위에 뚜껑이 덮여 있었고, 김이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늘 같은 맛과 비슷한 반찬, 그의 하루 일상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게 느껴지자 그는 저절로 수저를 내려놓았다.
“반찬 좀 더 줄까.”
“아니, 됐어.”
할머니는 그 말에 더 대꾸하지 않고 부엌으로 돌아갔다. 도마 소리가 몇 번 나더니 곧 멈췄다. 그는 숟가락을 내려놓은 손으로 잠깐 눈두덩을 눌렀다. 피곤해서인지, 뭔가 다른 것 때문인지는 그 자신도 구분하지 못했다.
*
문득, 밥그릇에 남은 밥알 몇 개를 보다가 그는 아주 오래된 장면 하나를 떠올렸다. 초등학생 때였다. 할머니는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모습으로 부엌에 서 있었고, 그는 식탁 의자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 있었던 일을 쉬지 않고 떠들었다. 담임선생님이 칭찬해 준 일, 짝꿍과 다툰 일, 운동장에서 주운 이상하게 생긴 돌멩이까지.
“그래서, 그래서?” 할머니는 그때마다 뒤도 안 돌아보고 그렇게 물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건지, 그냥 손이 바빠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린 그는 그 물음 하나로 충분했다. 자신의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궁금한 일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언제부터 그 이야기들이 사라졌는지, 그는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다. 중학교 때쯤이었는지, 아니면 그보다 더 나중이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저녁 식탁에서 그는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할머니도 더는 그래서, 그래서, 하고 묻지 않았다. 그 물음이 사라진 게 언제인지 몰랐다는 사실이, 그날 밤 유독 그를 오래 붙잡았다.
*
방으로 들어와 그는 핸드폰을 켰다. 화면 위로 소개팅 앱 알림이 하나 떠 있었다. 상대는 사흘 전에 먼저 말을 걸어온 사람이었다. 그는 알림을 눌렀다가, 대화창이 열리기도 전에 화면을 도로 껐다. 몇 글자만 쓰면 되는 일이었는데, 그 몇 글자를 쓰는 데 필요한 게, 지금 그에게는 없었다.
언젠가 동기 하나가 물은 적이 있었다. “너는 연애 안 해?” 그때 그는 “귀찮아서”라고 대답했다. 대답을 하고 나서, 그 말이 정확한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딱히 설득력 있는 대답은 지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냉장고 문 여닫는 소리,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벽 너머로 희미하게 들렸다. 그는 이불을 끌어당기고 눈을 감았다. 그 소리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확인하러 나가지는 않았다. 다만 그 소리가 끊기고 나서야, 그는 잠이 들었다.
*
주말이 되어도 크게 다른 건 없었다. 토요일 오전, 그는 늦게까지 자다가 해가 방 안 깊숙이 들어온 뒤에야 눈을 떴다. 거실에서는 텔레비전 소리가 낮게 흘렀다. 할머니가 보는 아침 드라마였다.
“밥 먹었니.”
“이따가.”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방문을 닫았다. 이따가,라고 말한 그 밥을 그는 결국 오후 세 시가 넘어서야 혼자 차려 먹었다. 할머니가 만들어둔 반찬을 꺼내면서, 그는 그게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명절이었던 어느 날 저녁, 상 위로 할머니의 목소리가 지나갔다. “너도 이제 여자친구 좀 만나야지.” 그는 젓가락으로 나물을 집으며 웃었다. 옆에 있던 사촌 하나가 따라 웃었고, 대화는 곧 다른 데로 옮겨갔다. 연습이 된 걸까? 웃는 얼굴을 만드는 데는 다른 무엇보다 힘이 덜 들었다.
그날 밤, 그는 오랜만에 잠들기 전 천장을 오래 보았다. 몇 년 전 이맘때는 뭘 하고 있었는지 떠올려보려 했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해가 바뀌는 동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라고는 야근이 조금 늘고, 후배가 하나 들어오고, 그런 것들뿐이었다. 그는 그 사실이 슬픈 건지 아닌지도 판단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
퇴근길, 그는 평소보다 한 정거장 먼저 내려걸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냥 조금 더 늦게 집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고, 그 생각의 이유를 캐묻지는 않았다. 걷는 동안 핸드폰은 주머니 속에서 두 번 진동했지만, 그는 꺼내 보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알람이 세 번 울린 뒤에야 그는 몸을 일으켰다. 씻고 옷을 입고 가방을 챙기는 순서는 어제와 같았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 말고, 그는 잠깐 고개를 돌려 부엌 쪽을 보았다. 할머니는 이미 도마 앞에 서 있었다. 뒷모습이 며칠 전보다 조금 작아 보인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는 그 생각을 오래 붙잡지 않았다.
“다녀오겠습니다.”
문이 닫혔다. 복도에 그의 발소리가 몇 번 울리다가 곧 사라진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동안, 그는 버튼 위 숫자가 바뀌는 걸 가만히 보았다. 문이 열린다.
가방끈을 고쳐 메는 손에 저도 모르게 조금 힘이 들어갔다. 오늘 하루도 다시, 어딘가에서부터 쌓아 올려야 했다. 그는 또 그 안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