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로의 듀얼 페르소나

bybeyond juri

조로에게 퇴근은 없다.


돈 디에고는 응접실에서 하품을 하고 있다. 마을에 도적 떼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부채를 부치며 딴청을 피운다. 관심 없는 척, 겁먹은 척이다. 하지만 손님이 돌아가고 문이 닫히는 순간, 디에고는 부채를 내던지고 마구간으로 내닫는다. 검은 옷으로 갈아입는 데는 채 몇 분이 걸리지 않는다. 사실 낮의 무기력함은 연기다. 밤의 조로가 진짜다.


매니저도 없고, 급여도 없다. 그에게는 이름과 칼, 그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만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찐으로 자발적 봉사다. 정규직 영웅들이 넘쳐나는 요즘 세상에 기꺼이 헌신하는 이 남자의 일상은 낮 시간의 철저한 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법정이 되지 못한 광장


18세기 말 스페인령 캘리포니아의 작은 마을. 부와 신분은 있지만 자치권이 없는 땅이다. 늙은 농부는 판결문 한 줄 없이 광장 한복판에서 채찍을 맞고 있다. 세금 며칠 늦게 냈다는 이유로. 매질을 명령한 사람은 사령관, 매질을 지켜보는 사람도 사령관. 세금을 걷는 사람, 세금 미납을 처벌하는 사람, 그 처벌이 정당한지 판단하는 사람은 모두 한 사람이다. 그러니 항소할 곳이 없다. 사령관 위의 총독은 너무 멀리 있다.


조로는 법의 외부에서 법의 내부를 심판한다. 검 끝에 새겨진 Z는 승리의 서명이 아니다. 아무도 고용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표시를 이렇게 남긴다. 다시 말해서 조로는 세상을 구하고 이름을 남기는 영웅이라기보다 세상이 외면한 일을 대신 처리하고 흔적 하나 달랑 남기고 사라지는 무기명의 용사다.


당시 상황이 무기명을 원했다. 맞설 수 없는 권력에 맞서려면 돈 디에고와 조로 사이에 두꺼운 벽이 필요했다. 가면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돈 디에고는 조로의 반대편에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부유한 집안의 한량이라는 평판은 그를 의심에서 벗어나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낮의 생활은 밤의 행동을 감춘다. 조로는 영웅이 되기 위해 먼저 평범한 사람을 완벽하게 연기해야 했다.조로는 악당을 물리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이 정상인 척하는 자리에 금을 긋는다.


버티기의 능력


이 이중생활을 지금 여기에 가져다 놓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게 읽힌다.


우리는 영웅에게 두 개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낭만적으로 생각한다. 가면을 쓰면 특별한 존재가 되고, 가면을 벗으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삶. 하지만 실제로는 두 개의 삶은 모두 노동이다. 돈 디에고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는 자신의 행동을 감춰야 했고, 조로가 된 뒤에는 목숨을 걸고 사람들을 구해야 했다. 어느 한쪽도 온전히 쉴 수 있는 삶은 아니었다.


낮의 디에고가 수행한 무능하고 유약한 한량의 역할조차 고된 감정노동이다. 부조리를 목격하면서도 딴청을 피워야 하고, 불의에 분노하는 대신 부채질로 겁먹은 척을 해야 하는 삶. 영웅노동을 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철저한 슬롯적 연기다. 밤의 폭발을 위해 낮 동안의 참아내는 일종의 에너지 축적이다.


사원증과 노트북


우리 역시 저마다의 응접실에서 낮동안 어설픈 가면을 쓰고 폭발의 위기를 넘긴다. 겉으로는 상사의 눈치를 보거나 무관심한 척 커피를 홀짝이지만, 속으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혼잣말을 한다. 팀장 앞에서는 야근할 기운도 없는 사람처럼 굴지만, 집에 도착하면 다른 사람이 된다. 조로가 부채를 내려놓고 검을 들었듯, 우리는 사원증을 내려놓고 노트북을 연다.


현대 삶도 하나의 페르소나만으로는 완성되기 어렵다. 사령관과 총독의 자리가 겹쳐서 법이 작동하지 않았듯, 지금은 한 가지 벌이와 한 가지 역할이 삶 전체를 감당하지 못한다. 조로에게는 감시망을 피할 두 번째 얼굴이 필요했고, 우리에게는 하나의 월급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삶을 메울 두 번째 얼굴이 필요하다. 저마다 이유는 다르지만, 하나로는 부족해서 다른 자아를 만들어내야 했다는 구조는 같다.


부캐도 노동이다. 팔로워를 모으고, 콘텐츠를 만든다. 취미가 일이 되고, 일이 다시 정체성이 된다. 조로에게 검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키보드가 있고, 조로에게 Z가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게시물과 '좋아요'가 있다.


그 밤의 오래된 선배


조로의 진짜 능력은 칼솜씨가 아니다. 하나의 삶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두 개로 나누어 버티는 능력. 낮에는 자신을 숨기고 밤에는 자신을 소진하면서도 다음날 다시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는 능력이다.


우리는 조로보다 덜 영웅적일 뿐,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를 산다. 본캐가 퇴근하면, 부캐의 출근이 기다린다. 가면을 벗으면 자유로워져야 하는데, 다시 가면을 바꿔 쓴다. 가면을 벗는 시간은 거의 없다. 조로는 영웅의 원형이 아니라, 퇴근 후 또 다른 나를 호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현대인의 원형에 더 가깝다.


퇴근한 줄 알았는데 다시 출근하는 밤. 조로는 그 밤의 오래된 선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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