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그래서, 퇴근은 가능한가

bybeyond juri


우리는 히어로를 사랑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절망적인 위기 앞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세상을 구원하는 그들의 결정적 순간에 환호한다. 그러나 질문은 언제나 그 구원의 신화가 끝난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화려한 스펙터클이 지나가고 승리의 함성이 저문 뒤, 그들은 어디로 가는가.


안타깝게도 히어로는 퇴근한 적이 없다.


영웅이라는 이름의 노동자


이들은 구원자라는 신화적 가면을 쓴 채 현대 자본주의의 정교한 노동 현장으로 끊임없이 호출된다. 그곳에서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야근과 끝없는 투잡, 감정노동과 불안정 노동, 그리고 마침내 자기 자신까지 상품으로 만들어야 하는 노동이다.


배트맨은 어두운 밤하늘을 날지만 정작 자신에게 주어진 밤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스파이더맨은 지구를 구하면서도 당장의 월세와 생활비를 위해 N잡러의 비행을 멈추지 못한다. 조커는 자신의 역할에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하는 인간의 비극을 보여준다. 개조된 몸을 가진 소머즈와 6백만 불의 사나이는 노동을 위해 강화되고 통제되는 신체를 보여주며, 아이언맨은 영웅의 능력마저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버린 시대를 상징한다.


이들은 세상을 구하는 능력을 얻은 대신 자유를 빼앗겼다. 오히려 세상은 이들에게 더 많은 바카라임과 더 긴 노동을 요구한다. 슈퍼라는 이름은 때로 가장 완벽한 노동자의 이름이 된다.


40년 만의 퇴근


천명관의 소설 『퇴근』이 서늘하게 그려냈듯, 평생을 공장에서 바친 아버지가 40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것은 단순한 귀가가 아니라 잔혹하게 미뤄졌던 ‘40년 만의 퇴근’이었다. 시스템의 톱니바퀴로 평생을 소모당한 뒤에야 비로소 허락되는 그 늦은 퇴근길 끝에 기다리는 것은 따뜻한 안식이 아니다. 노동의 가치가 증발한 자리에 남은 것은 서늘한 무력감과 쓰다 버려진 인간의 비참함이다.


정규직이라는 최소한의 보호망 밖에서 언제든 대체 가능한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극은 화려한 망토 뒤에 숨겨진 히어로의 일상과도 묘하게 겹쳐진다.


영웅도 결국 노동자다.


이제 영웅도 기계화


최근 새로운 존재가 등장하고 있다.


AI다.


인간보다 빠르게 계산하고, 지치지 않고 반복하며,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내고, 이제는 인간처럼 움직이는 몸까지 갖기 시작한 존재. 지금까지 히어로의 특별함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 있었다. 그런데 인간이 만들어낸 AI가 그 일을 대신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위험한 곳에 들어가는 일도, 사람을 구조하는 일도, 감정을 받아주는 일도, 판단하고 움직이는 일도 인간이 하지 않아도 된다면.


영웅의 일은 여전히 인간의 일이어야 할까. 어쩌면 앞으로의 히어로는 초능력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인간보다 더 강하고 빠르고 지치지 않는 기계일지도 모른다. 영웅의 몸이 인간의 몸일 필요조차 없어지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온다.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히어로의 몸을 따라가며


그래서 이 연작은 슈퍼히어로의 전투가 아니라 그들의 퇴근길을 따라가 보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 대중은 이들의 화려한 퍼포먼스에 열광하지만, 이들이 우리 자신의 모습과 가장 닮아 있는 것은 싸움이 끝난 뒤 지친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이다.


조로의 가면 뒤에는 퇴근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배트맨의 갑옷 뒤에는 쉬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며, 스파이더맨의 거미줄 뒤에는 생활비를 걱정하는 노동자가 있다. 그리고 AI가 그 모든 일을 대신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영웅의 노동을 넘어 인간의 노동 자체가 무엇이었는지 묻게 된다.


이 연작은 영화와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단순한 리뷰가 아니다. 신화에서 일상으로 내려온 히어로의 뒷모습을 통해, 가면을 벗지 못한 채 매일 출퇴근을 반복하는 현대인의 노동과 삶을 들여다보는 슬롯학적 에세이다.

감정이 노동이 되고, 몸이 노동이 되고, 삶이 노동이 되고, 마침내 노동을 인간이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

영웅의 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읽게 되는 것은 결국 히어로의 역사가 아니라 일하는 인간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퇴근은 가능한가


돌이켜보면 앞서 발행한 토르, 6백만 불의 사나이, 소머즈, 아이언맨에 관한 글들도 모두 같은 질문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다만 그 질문을 한데 모아 적어두지는 못했다. 이제야 뒤늦은 프롤로그를 남긴다.


히어로는 왜 퇴근하지 못하는가. 신화에서 일상으로 내려온 이들이 비틀거리며 걷는 그 길 끝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히어로가 존재하지 않는 도시를 마주한다. 어쩌면 이제는 영웅이 필요 없는 시대를 상상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AI가 인간보다 빠르고, 강하고, 오래 일하는 시대. 누군가의 감정을 대신하고, 누군가의 몸을 대신하고, 누군가의 노동을 대신하는 존재가 넘쳐나는 시대. 그때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세상을 바꿀 초인적인 무기나 영웅의 구원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친 몸을 맡기고 돌아갈 곳이 있는 것. 아무것도 구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누구의 히어로도 아닌 채 돌아갈 수 있는 삶. 그리고 노동하지 않아도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인간.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아직 상상하지 못한 가장 새로운 영웅인지 모른다.


신화는 끝났다.

이제는 가면을 벗고 퇴근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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