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아 플라스의 시와 크리스틴 제프스 감독의 〈실비아〉
‘영화로 읽는 시와 시인의 삶’의 첫 번째 작업으로 미국의 고백파 시인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932-1963)의 시와 생애를 크리스틴 제프스 감독의 영화 〈실비아〉(2003)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실비아 플라스는 이른바 ‘고백파’ 시인을 대표한다. ‘고백의 시학’에서 살펴보았듯이 고백파 시인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여성적 체험을 비롯하여 고통스럽고 내면적인 생각을 시로 표현하는 시인을 이른다. 불편하고 부끄러울 수 있는 기억과 감정까지도 시의 언어로 드러낸다. 한마디로 말하면, 고백파 시인은 상처와 기억을 시로 고백하는 시인이다.
고백파 시인의 시에서는 시인의 실제 경험과 시적 화자의 목소리가 밀접하게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작품 속 ‘나’를 시인 자신의 목소리와 관련지어 읽을 수 있으며, 시인이 살아온 삶과 작품이 만들어진 배경 역시 중요한 해석의 맥락이 된다. 그러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고백파 시인이라고 해서 시적 화자인 ‘나’와 실제 시인을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다.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선택하고 변형하며, 그것을 시적 언어로 다시 구성하기 때문이다.
문학치료에서 고백파 시인의 시를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들의 시에는 대체로 고통스럽고 불편한 경험이 담겨 있지만, 시인은 그 경험을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다시 바라보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간다. 상처와 기억을 시로 드러내는 일은 고통을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구성하는 행위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시 쓰기는 고백파 시인에게 치유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과정이 될 수 있다. 물론 시를 쓴다고 해서 상처가 반드시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시를 쓰는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을 언어로 표현하고, 그것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고백파 시인의 시는 그것을 읽는 독자에게도 특별한 경험을 제공한다. 내면을 깊이 드러낸 시인의 고백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서적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독자는 그 과정에서 오히려 위안을 얻기도 한다. 어쩌면 고백파 시인들은 우리가 쉽게 꺼내지 못하는 기억과 감정을 먼저 자신의 언어로 들려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글에서는 실비아 플라스의 시와 삶을 크리스틴 제프스 감독의 영화 〈실비아〉를 따라가며 살펴보고자 한다. 영화 속에 재현된 시인의 삶을 가늠하면서 그가 어떤 경험 속에서 시를 썼는지, 그리고 그 경험이 어떻게 시의 언어로 형상화되었는지를 함께 알아볼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고백 시가 지닌 치유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실비아 플라스(1932-1963)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스미스대학을 장학생으로 다닌 후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외형적으로는 매우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듯했다. 케임브리지에서 훗날 영국의 계관시인이 된 테드 휴즈를 만났고, 그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은 뒤 영국 데번의 한 마을에 정착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적인 삶의 이면에는 개인적인 상처와 당시 슬롯가 여성에게 요구했던 역할로 인한 갈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스스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실비아의 삶과 시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1950년대의 미국과 영국 슬롯에서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삶의 방식도 실비아를 억압했다. 여성은 분노를 드러내지 않아야 했고, 자신의 경력을 적극적으로 추구하지 않아야 하며, 그 대신 남편과 아이들을 돌보는 데서 삶의 의미와 성취를 찾아야 한다는 성 역할의 규범이 강하게 작용하던 시기였다.
실비아 플라스처럼 뛰어난 학업 성취를 이루고 시인으로서 자신의 길을 추구하려는 여성에게 이러한 규범은 커다란 모순을 안겨주었다. 시인이자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욕망과 아내이자 어머니에게 기대되는 역할 사이에서 그는 끊임없이 갈등했다. 그의 시에는 이러한 갈등과 함께 여성으로서 경험한 분노와 좌절, 고독이 강렬한 언어로 나타난다.
실비아와 테드 휴즈의 위태롭던 결혼 생활은 결국 별거로 이어졌다. 우울과 고립감, 절망 속에서 지내던 실비아는 1963년 런던의 한 아파트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들은 사후인 1965년에 시집 『에어리얼(Ariel)』로 출간되었으며, 이 시집은 실비아 플라스를 대표하는 작품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시인의 생애는 크리스틴 제프스 감독의 영화 〈실비아〉(2003)에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주인공 실비아 플라스 역에는 기네스 펠트로가, 남편 테드 휴즈 역에는 다니엘 크레이그가 출연했는데, 기네스 펠트로는 실비아 플라스의 실제 모습과 많이 닮아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영화는 두 사람의 만남과 결혼, 창작과 생활을 둘러싼 갈등, 그리고 결혼 생활의 파국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제 영화 속에 재현된 실비아의 삶을 따라가면서, 시인으로서의 삶과 한 여성으로서의 삶이 어떻게 충돌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시 쓰는 남편, 빵 굽는 아내
영화는 실비아의 죽음을 암시하는 도입부를 지나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유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중충한 영국 날씨와 고색창연한 건물들 사이로 핑크빛 스웨터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실비아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생기와 자신감으로 가득한 젊은 시인의 모습이다. 이렇게 생기 있던 실비아가 이후 어떻게 변모하는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하며 영화를 따라가 보자.
실비아는 테드 휴즈와 운명적으로 만나 결혼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모교인 스미스대학에서 시를 강의하고 바닷가 마을에서 여름을 보내며 한동안 평온한 생활을 이어가는 듯했다. 그런데 시가 써지지 않는다.
하고 싶은 무언가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여러분은 대신 무엇을 하나요? 실비아는 빵을 굽는다. 처음에는 한 판만 굽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온 집안에 빵이 널린다. 시가 써지지 않는다고 호소하는 실비아에게 남편 테드는 한마디를 던진다.
“빵은 잘 굽잖아.”
글을 쓰고 싶지만 쓸 수 없는 아내와 낚시를 하러 갔다가도 잡은 물고기만큼 시를 써 오는 남편 사이에는 서서히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아니 죽을힘을 다해도 될까 말까 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사람을 가까이에서 바라본다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그것도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매번 그렇게 한다면 그때마다 어떤 기분이 될까. 우리는 멀리 있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보다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더 깊은 상처를 받곤 한다.
여성에게 인기가 많은 테드를 바라보며 실비아는 점점 예민해지지만, 시간은 흐르고 결혼 생활도 겉으로는 별일 없는 것처럼 지속된다. 그러던 어느 날 실비아의 몸에 변화가 생긴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임신과 출산
시인은 ‘아홉 자모로 된 수수께끼’를 내고 있다. 이 단어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읽어 보자. 한글로는 두 음절이다.
나는 아홉 자모로 된 수수께끼,
코끼리, 육중한 집,
두 덩굴손으로 어슬렁어슬렁 거니는 수박.
아, 붉은 과일, 상아, 좋은 목재!
발효되어 크게 부풀어 오른 빵 덩어리.
여기 두툼한 지갑에 담긴 새로 주조된 돈.
나는 수단이고, 무대이고, 송아지 속 암소.
나는 한 자루의 초록 사과 먹고는
내릴 수 없는 기차에 올라탔네.
― 실비아 플라스, 「은유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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