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정지용, 조향의 시
상상의 언어와 구조를 만드는 시 쓰기의 실제로서 아이러니와 패러독스, 그리고 데페이즈망과 자동기술법에 대해 알아보자.
우선 아이러니는 겉으로 드러난 의미와 그 이면의 의미가 서로 어긋나는 표현 방법이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아이러니를 자주 사용한다.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고 다니니) 그것 참 잘했다. 아주 장해요!”
이 말은 표면적으로는 칭찬이지만, 내용은 정반대이다. 일상어에서는 화자의 표정과 어조로 이 말의 숨겨진 의미를 금세 알 수 있다.
문학적 아이러니도 이와 비슷하다. 다만 문학에서의 아이러니는 글로 쓰인 것이므로 전후 문맥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말이나 행동의 표면적 의미와 그 이면에 담긴 의미가 일치하지 않을 때, 독자는 그 사이에서 긴장감과 의미의 깊이를 느끼게 된다.
아이러니는 고대 그리스 희극에 등장하는 인물인 에이런(Eiron)에서 비롯되었다. 에이런은 약자지만 겸손하고 현명하다. 반면 알라존(Alazon)은 강자이지만 자만하고 우둔하다. 두 인물이 대결할 때, 겉으로는 약해 보이는 에이런이 오히려 알라존의 허위를 드러내고 승리한다. 이처럼 아이러니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캐나다 출신의 문학비평가 노드롭 프라이(Northrop Frye)는 겨울을 아이러니의 계절로 설명했다. 겨울의 풍경은 얼어붙고 메마른 모습이어서 죽음의 계절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봄을 준비하는 생명이 보존되고 자란다. 겉으로는 죽음처럼 보이는 겨울 속에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이 감추어져 있다.
수박도 겉과 속이 다른 사물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수박의 겉은 단단하고, 초록색이지만 속에는 붉고 부드러운 과육이 들어 있다. 겉모습만 보고는 그 안의 맛과 색깔을 알 수 없다.
문학작품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천사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잔혹한 인물이 있고, 반대로 거칠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인물도 있다. 우리는 그런 인물에 매혹된다. 겉과 속이 모두 착한 사람, 겉과 속이 모두 나쁜 사람은 그 자체로는 특별한 긴장감을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실제 모습이 다를 때, 우리는 그 인물을 궁금해하고 더 깊이 이해하려고 한다. 원래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다면적이고 복합적이다. 아이러니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복잡한 본성을 드러낸다.
아이러니에는 여러 유형이 있지만, 문학작품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상황적 아이러니’와 ‘극적 아이러니’를 들 수 있다.
상황적 아이러니는 인물의 의도와 실제로 일어난 결과가 서로 어긋나는 경우를 말한다. 어떤 인물이 이루고자 했던 목적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때, 독자는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이 일어나는 경우도 상황적 아이러니의 한 예다.
앞에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설명하면서 상황적 아이러니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었다. 주인공 미자는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그 여자는 일상에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시로 표현하려고 한다. 그러나 시를 쓰기 위해 주변을 자세히 바라볼수록 감추어진 추악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더욱이 시를 쓰고자 하는 미자는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해 점차 언어를 잃어간다. 언어를 통해 세계를 표현하려는 사람이 오히려 언어를 잃어가는 것이다. 시를 쓰고 싶다는 미자의 바람과 언어를 잃어가는 현실 사이의 간극이 이 영화의 중요한 아이러니를 이룬다.
극적 아이러니는 작중 인물은 모르지만, 관객이나 독자는 알고 있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관객은 어떤 인물에게 위험이 닥칠 것을 알고 있지만, 정작 그 인물은 아무것도 모른 채 행동할 때 긴장감이 생긴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오이디푸스」가 대표적인 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범인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관객은 오이디푸스가 찾고 있는 범인이 바로 오이디푸스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물의 무지와 관객의 앎 사이에서 극적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K-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출생의 비밀이나 남매 사이의 사랑도 극적 아이러니를 활용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시청자는 두 인물이 실제로는 남매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정작 인물들은 그것을 모른 채 서로 사랑한다. 이때 시청자는 인물들이 진실을 알게 될 순간을 기다리며 긴장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김명수의 시 「하급반 교과서」를 읽어보자.
‘하급반’은 요즘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다. ‘하급’이라는 말에는 초등학교 저학년이라는 뜻과 함께, 낮은 급이나 낮은 수준이라는 우열의 의미도 담겨 있다. 따라서 ‘하급반’은 저학년 교실을 가리키면서, 교육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비판적인 시선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큰소리로 바카라을 읽는다
나는 물끄러미 그 소리를 듣고 있다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아니다 아니다”라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 따라서 읽는다
“그렇다 그렇다!”라고 읽으니
“그렇다 그렇다” 따라서 읽는다
외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목소리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한 아이가 읽는 대로 따라 읽는다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바카라읽기여
우리나라 아이들의 목청들이여.
-김명수, 「하급반 교과서」 전문
시의 앞부분에는 아이들이 바카라을 읽는 모습이 나타난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해맑고, 바카라 읽기는 질서 정연하게 진행된다. 겉으로만 보면 평화롭고 바람직한 교실의 모습이다. 아이들은 정해진 문장을 정확하게 읽고, 교과서에 제시된 내용을 충실하게 따라간다.
그런데 시인은 이 장면을 바라보며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바카라읽기여”라고 말한다. 이 한 구절이 앞에서 읽은 모든 내용을 뒤집는다. 봄날의 바카라 읽기는 원래 밝고 생명력 있는 장면이어야 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모습을 ‘쓸쓸하다’라고 말한다. 아이들의 해맑은 목소리와 질서 정연한 모습이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진다.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거나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목소리를 따라서 그대로 읽고 있다. 바카라 읽기는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안에 아이들 각자의 생각과 개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아이들은 교과서에 적힌 답을 따라 읽을 뿐, 그 답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자기 생각을 덧붙이지 않는다. 이때 아이들의 바카라 읽기는 초등학교 교실의 풍경을 넘어,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가 정해 놓은 질서와 답을 따라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하게 된다.
이 시가 수록된 시집 『하급반 교과서』는 1983년에 출간되었다. 따라서 이 시를 이해할 때는 1980년대 초의 슬롯현실을 함께 떠올릴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누군가의 말을 비판 없이 따라가거나, 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목소리를 그대로 따라 읽고 있는가.
이처럼 「하급반 교과서」는 겉으로는 아이들의 바카라 읽기를 바라보는 시이지만, 그 이면에는 획일화된 교육과 슬롯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맑고 청아한 목소리와 쓸쓸함이라는 감정 사이의 긴장이 이 시의 아이러니를 만든다.
앞에서 살펴본 문정희의 「나의 아내」 역시 아이러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 시에서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화자의 목소리와 그 이면에 감추어진 의미가 서로 어긋난다. 따라서 시를 읽을 때에는 화자가 말하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말이 어떤 상황에서 나왔으며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아이러니를 활용하면 시의 의미는 한층 깊어진다. 겉으로는 칭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비판하거나, 긍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부정의 의미를 담을 수 있다. 또한 평범하고 일상적인 장면을 제시한 뒤 마지막에 그것을 뒤집는 한 구절을 덧붙임으로써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수도 있다.
여러분도 자신의 습작시에서 아이러니를 활용해 보자. 겉으로 드러난 목소리와는 다른 그 이면의 목소리를 발견하면서, 독자는 시를 더 깊이 읽게 될 것이다.
그다음에는 패러독스다. 시의 언어는 패러독스의 언어라고도 한다. 시 쓰기에 패러독스를 적용하면 시가 한층 시다워진다.
패러독스는 논리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모순의 언어’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단순한 모순을 넘어서는 진실이 담겨 있다. 널리 알려진 패러독스의 예로 다음과 같은 표현을 들 수 있다.
“찬란한 슬픔의 봄.”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소리 없는 아우성” ― 유치환, 「깃발」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 정지용, 「유리창」
‘찬란한 슬픔의 봄’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봄은 찬란하고 아름다운 계절인데, 어떻게 슬플 수 있을까? ‘소리 없는 아우성’도 마찬가지다. 아우성은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는 것인데, 어떻게 소리가 없을 수 있을까? ‘외로운 황홀한 심사’ 역시 외로움과 황홀함이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 함께 제시된다.
이 표현들은 처음 보면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모순 속에는 더 큰 시적 진실이 담겨 있다. 봄이 너무나 찬란하고 아름다워서 오히려 더 서글프게 느껴질 수 있다. 이것이 ‘찬란한 슬픔의 봄’이다.
‘소리 없는 아우성’은 깃발의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깃발은 원래 소리를 내지 않지만,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바람에 세차게 나부끼는 모습이 한층 절박해 보인다. 영화에서도 때로는 처절한 장면에서 소리를 지우고 인물의 모습만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도입부인 노르망디 상륙 장면이 그렇다. 처참한 전투 장면에서 소리가 사라지자 오히려 그 비극성이 더욱 강하게 전달된다. ‘소리 없는 아우성’도 이와 같은 역설을 보여준다.
‘외로운 황홀한 심사’도 마찬가지다. 외롭지만 그 순간이 너무나 황홀할 수 있다. 이성선의 시 「아름다운 사람」에서 아름다움이 외로움과 유사한 의미를 내포했듯이 정지용의 「유리창」에는 외로움과 황홀함이 서로 유사한 정서로 만난다.
이처럼 패러독스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나 의미를 하나의 표현 안에 겹쳐 놓음으로써, 논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삶의 진실을 드러낸다. 그러면 정지용의 「유리창」을 좀 더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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