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부터 흐리더니 비가 조금 내렸다. 삼 일째 되던 날 우리는 함께 제주 바다에 들어가 보기로 했는데, 실로 아주 변덕스러운 일이었다.
“E, 버킷리스트가 ‘제주 바다에 들어가 보기’네요?”
“맞아요… 그런데 이런저런 핑계로 제주에 온 지 일 년 반이 지나도록 아직도 못 들어가고 있어요. 혹시 관심 있어요?”
마지막으로 바다에 입수해 본 게 언제더라. 손가락으로 햇수를 세어보다 까마득한 기억처럼 침침해 이내 포기한다. 아마 성인이 된 이후로는 없을 테다. 그러니까, 순수하게 ‘놀이를 위한 입수’라면 말이다.
“아니요, 솔직히 관심 없어요.”
나는 어느 겨울날, 그녀가 써 내려갔던 문장을 기억한다.
‘가로등 불빛 아래 낭만이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우리는 아이들처럼 뛰놀았다. 우리는 꽤 오래 함께 눈을 맞았다.’
이후로 그녀는 제주에 함박눈이 내릴 때마다 “눈이 오니까 틈씨가 생각나요~ 큰일이네”라며 능청스럽게 웃곤 했다.
“저도 상어가 무섭다고, 해파리에 쏘일 거라고, 발에 유리 조각이 박히면 패혈증에 걸릴지도 모른다며 온갖 핑계를 대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E의 버킷리스트라니까 관심이 생겨요. 내가 그 일을 함께하면, E는 앞으로 여름 바다를 기억할 때마다 나를 생각해 주겠죠? 그러면 E의 여름과 겨울에 모두 내가 함께하게 되겠네요. 나는 그게 탐나요.”
그녀는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와, 역시 욕심쟁이.”
막상 “바람이 꽤 부는데 어쩌죠?”, “틈씨 비가 와요…”라며 주저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이러다가는 영 글렀다 싶은 나는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한여름이니까 바람은 괜찮고, 비는 잘됐네요. 안 그래도 비 올 때 바다 들어가는 게 제 버킷리스트였는데, 우리 동시에 버킷리스트를 이룰 수 있겠어요.
자, 짐은 최대한 가볍게. 번거로워지면 다시는 하기 싫어질 테니까 최소한으로 챙겨서 가요. 필요한 건 가서 사고요.”
그렇게 그녀의 손을 쥐고 곽지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물론 운전은 그녀가 했다. 연신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불안해하는 그녀에게 “아직 제 버킷리스트를 채우려면 이 정도로는 턱없이 모자라요, 폭우 정도는 돼야 할 텐데 그 정도는 아니네요”라 다독이면서.
해수욕장에 도착한 우리는 마치 서먹서먹한 동창처럼 한참을 물과 내외했다. 짐을 어디에 두지…. 신발은 벗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앗, 여긴 돌이 있어서 위험할 것 같아요.
발끝으로 물만 슬쩍 건드리다 물러서고, 서로 눈치만 보며 머뭇거리기를 몇 번, 우리는 곧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꺄악!” 소리를 지르며 냅다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영락없이 천진한 아이들처럼.
“미쳤나 봐, 와… 대박… 어떡해. E, 나 이상해요!”
“왜 그래요? 바다 처음 들어와 보는 건 아니죠?”
“아니… 꺅! 아니에요. 그건 아닌데, 와… 진짜 얼마 만이지? 기억이 안 나요, 정말로!”
“하하하! 실은 저도 거의 십 년만인 것 같아요!”
“어디 풀장이나 가봤지… 우와… 나는 사람들이 왜 해수욕장을 다니나 했어요. 머리에 총 맞았나 싶었지… 총 맞은 건 나였나 봐! 으하하!”
“저도 너무너무 신나요! 꺅! 어떡해, 나 버킷리스트 했어! 제주 와서 일 년 반 만에 드디어 이뤘어요! 정말 고마워요, 틈씨!”
이쯤에서 밝히건대, 내 나이는 서른둘, 그녀는 나보다 몇 살 더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곽지해수욕장 한가운데서 체면이고 나발이고 죄다 잊은 채, 개구쟁이 아이들처럼 팔짝팔짝 뛰며 환호했다. 밀려오는 파도에 맞서다가 자빠지고, 그런 서로를 보며 배꼽을 잡았다.
장난스럽게 물을 끼얹다가도, 나는 돌연 몸에 힘을 풀고 그대로 바다 위에 누워버렸다. 귓속에 물이 차오르자 먹먹하게 갇힌 노이즈가 조금 전까지의 웃음소리와 주변의 소음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그대로 둥둥 뜬 나는 한동안 흐린 구름 뒤편의 햇빛을 째려보았다. 그런다고 구름 뒤에 숨은 햇님이 머리를 내밀 것도 아닌데.
“무슨 생각해요?”
“E, 연애 재미있어요?”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았다는 듯, 그녀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요?”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상처를 가졌다.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사람과의 이별은 돌아갈 곳을 잃고 망망대해의 외딴섬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남보다 못한 이가 되고,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던 감정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스스로를 찌른다. 그렇게 한없이 추락하고, 쓸모에 허덕이는 밤이나 지새우는 거다.
“잘 맞는 사람은 아니라면서요. 그게 타협이 돼요?”
“음… 맞아요. 성향적으로 그렇게 잘 맞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는 꽤 어른스러워요. 내가 불안해하면 괜찮을 거라며 무던하게 다독여주는 편이에요. 그러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아요. 모든 부분이 다 맞을 수 없다는 건, 이제 배웠으니까요.”
“… 엄청 어른스럽네요.”
“틈씨,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요?”
되돌아온 공격에 나는 잠시 심호흡했다.
“잘… 모르겠어요. E, 나는 여기까지 오는 게 정말, 너무나도 힘들었어요. 나는 나를 사랑하는 일이 죽을 만큼 힘들었어요.
그런데 나는 이제 내가 꽤 마음에 들어요. 내가 좋아요. 꾸미는 걸 즐기는 내가 예쁘고, 일을 사랑하는 내가 아주 멋있어요. 뒤늦게 찾은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것도, 다정을 배워가는 나도 너무 대견해요. 나는 이제야 나를 좀 예뻐해 주고 있어요.”
“그거 정말 잘된 일이네요.”
“그런데 누군가를 만나는 순간부터 나는 다시 작아질 거예요. 그에게 내 상황을 납득시키고, 이해를 바라고, 미안해하고, 사과해야 할 거예요. 그러면 나는 또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되겠죠. 그러고 싶지 않아요.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되는 일이 이제 너무 무서워요.”
나는 잠시 어떤 얼굴을 떠올렸다. 천년의 사랑처럼 다가와, 첫사랑에 빠진 소년의 얼굴을 했던. 그러나 끝내 “네가 떳떳하지 못한 탓”이라는 말을 남겼던 이의 얼굴을.
그럴까. 정말 내가 떳떳하지 못한 탓일까. 나는 단지 더는 작아지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더 작아졌다가는 소멸해 버릴 것 같았을 뿐인데.
“언젠가, 그 마음조차 감싸주는 사람을 꼭 만날 거예요.”
꼭 맞잡아 오는 그녀의 손에 의지해 수면에 몸을 맡겼다. 조금 전까지 요란했던 세상이 다시 물아래로 멀어졌다. 마치 이 바다가 전부 내 거라도 된 모양이지… 맞잡은 손 사이로 물살만 무심히 차올랐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응… 언젠가 다시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어….
스스로를 충분히 아끼고 사랑하고도 넘쳐흐르는 마음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 심지가 단단해 함께 있으면 어떤 두려운 일도 헤쳐 나갈 용기가 생기는 사람.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아낌이 없는 사람. 관계 속에서 사람은 얼마든 다른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 충분히 마음 아파해 본 사람. 그럼에도 그 삶을 증오하지 않고 사랑해 보기로 결심해 본 사람 말이야.
그렇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기꺼이 가장 찬란하고 사랑스러운 연인이 되어줄 테니.
삼십 분이나 즐기면 많이 놀았다 싶을 줄 알았던 물놀이는 예상보다 오래 이어졌다. 문득 낮아진 수온에 놀라 “이만 나갈까요?” 묻다가도, 못내 아쉬워 “5분만요.”를 반복하며 밍기적거렸다. 그렇게 흐린 하늘에 옅은 황혼이 여물 즈음에야 겨우 물 밖으로 나와 모래사장을 밟았다.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는데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던 머리카락이 중간에서 몽땅하게 끊겼다. 작년가을 스트레스성 탈모로 듬성듬성 빠졌던 머리카락이 어느덧 애교머리만큼 자라 있었다. 손끝으로 짧게 돋은 가닥을 몇 번 쓸어본다. 그래, 모든 건 이토록 아득하고 무정한 시간이 해결해 주는 일이지.
곧장 주린 배를 채우고, 우리는 그녀의 남자친구와 동업자 P가 함께 운영하는 바로 향했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바는 만석이었는데, 나중에 듣자 하니 근래 들어 가장 손님이 많았던 날이라며 P가 우리더러 행운의 여신이라 했다고 한다.
이번에도 역시 취향 난민인 나를 두고 E와 그녀의 남자친구, P까지 머리를 맞댔다. 그렇게 코스모폴리탄, 진피즈, 썬플라워를 차례로 건네받다가, 마지막은 P의 전 여자친구를 기리며 만들었다는 ‘리하’를 맛보았다. 하나같이 입맛에 꼭 들어맞았다.
그날따라 특별히 만석이었다던 바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커리어우먼의 일상을 꾸려가다 이혼의 상처를 겪고 돌연 제주로 정착한 E. 중국어를 현지인만큼이나 잘해 돈을 벌러 제주에 내려왔다는 그녀의 남자친구. 안 그렇게 생겨서는 작가라는 내게 자꾸만 본인이 쓴 글을 읽히고, 은근히 평가를 기다리다가 대뜸 ‘하현’ 작가의 에세이집을 꺼내와서는 “이런 글을 쓰는 거예요?”라고 묻던 모습이 영락없이 리트리버 같던 P.
한국에 무역을 하러 왔다는 중국의 젊은 사업가도 있었다. 국제 물류회사에 다니는 나는 은근슬쩍 명함을 건네볼까 싶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지만, 그의 거래처가 무려 포스코라는 이야기를 듣고 얌전히 포기했다. 다만 그냥 포기하긴 조금 아쉬운 탓에 “당신에게 영업하려고 했는데 아쉽게 됐네요. 우리 회사는 조금 영세해서요.”라고 실토했다.
재벌 3세 비스무리한 인사로 추측되는, "제힘으로 무언가를 일구고 싶어 제주에 내려왔다"는 잘생긴 청년도 있었다. 이 친구의 MBTI는 나와 '외-내향'만 다른 ESTP였는데, 우리는 단 몇 마디 대화만으로 서로에게서 진한 동족 혐오의 냄새를 맡았다.
푸근한 인상의 카지노 직원은 자꾸만 본인 집에 있는 비싼 술을 몇 병씩 들고 와 그곳의 모든 이들에게 인심 좋게 한 잔씩 권했다. 그것도 온더락으로. 덕분에 처음 보는 사람들이 그의 술을 한 잔씩 받아 들었다. 여러모로 보기 쉬운 광경은 아니었다.
숙취해소제를 사러 잠시 들렀던 편의점에서부터 졸졸 따라온 요리사 아저씨까지 어느새 그 무리에 끼어 있었다. 그는 구석에서 조용히 한잔하던 청년 하나를 붙잡더니,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새벽 내내 이야기꽃을 피웠다.
대만에서 관광하러 왔다는 아만다는 왕방울만 한 눈이 몹시 아름다웠다. 파파고로 그녀와 대화하던 나는 금세 인스타 팔로우도 주고받았다. 아만다는 내 바카라이 나오면 꼭 구매하겠다고 했다. 해외 번역본까지 출시 되려면 아무래도 부지런히 팔려야 할 테니 기필코 유명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되면 마침내 '어떤 문장'을 쓸 수 있을까 싶었다. 차마 입밖에 내었기에 평생을 스스로 미워했던 문장. 이토록 가슴에 들이찬 설움을 그때는 타당하게 쓸 수 있을까. 그것으로 설득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려면 이왕이면 노벨상 정도가 좋겠다.
그리고, 이렇게 조금은 이상한 글을 쓰는 나까지. 그 작은 바 안에서 어디서 왔는지, 서로의 나이도 모른 채, 살아온 모양도 전부 다른 사람들이 술잔 하나를 들고 모두 친구가 되어 어울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신기하네요.”
“뭐가요?”
“제 남자친구랑 P요. 원래 저런 친구들이 아니거든요, 낯을 꽤 가리는데… 틈씨가 꽤 편한가 봐요.”
푸스스, 기분 좋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느새 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앉아있는 내가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틈씨, 겨울에도 또 와요. 우리 아직 같이 못 한 버킷리스트 있잖아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리는 약속한 듯, 동시에 외쳤다.
“눈 쌓인 한라산 등반!”
깔깔 웃으며 잔을 부딪치던 나는 필히 직감했다.
내일 돌아가는 비행기에서는 아주 지독한 숙취에 시달리겠구나.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내가 도망친 제주에는 누구보다 젊고 멋지게 사는 일흔다섯의 경숙 씨가 있고, 내 소중한 단짝 친구도 있다. 그리고 어느새 함께 술잔을 부딪칠 새로운 친구들도 생겼다.
그래, 이쯤이면 꽤 성공적인 도망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