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hera2

by마른틈

나는 스트레스를 꽤 잘 관리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주어진 환경이 극심한 스트레스뿐이었으니, 그것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살아온 세월이 아주 길었다. 그래서 한참 뒤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을 때는 단언컨대 내 불행의 역치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한참이나 높아져 있었다.

이제 와서 의미 없는 불행 배틀 같은 것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만큼이나 쓸데없고 소모적인 논쟁도, 하찮은 이야기도 없을 테니. 비록 문득문득 치미는 설움은 그저 혼자 갈무리하면 그만이다.


하여튼, 사정이 그렇다 보니 나는 사소한 일에는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는 편이다. 물론 나도 사람이다 보니 개인적인 취약점이 건드려질 때면 곧잘 넘어지기도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스트레스받는 지점들에 크게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온라인 게임, 우정, 당장 먹고사는 문제 같은 것들.

물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그 문제들을 고민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뜻은 아니다. 타인이 보기에 어쩌면 내 상황들은 답도 없겠다는 생각을 왕왕 하지만, 나는 적어도 내 몫의 삶은 오롯이 바카라임지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니 누구에게도 의탁하거나 피해를 주며 살아갈 생각은 없다. 그저 소담하게 이 정도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삶이면 충분하다. 적어도 원한 적 없는 생까지 불쌍히 만들지 않는 삶이면 된다고 여긴다.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는다고 했지, 스트레스를 모른다고 하지는 않았다.


거듭 말하지만, 나도 사람이다. 회복할 시간도 없이 급박하게 닥치는 상황 앞에서는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또 욱하는 기질이 있다. 그러니까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는 편이지만, 한 번 스팀이 오를 때는 확, 빡, 꽥. 오른다는 뜻이다. 오죽하면 지병 때문에 늘 저혈압이던 혈압마저 눈이 한 번 돌 때면 뒷골이 얼얼해질 정도니, 어쩌면 그 지병은 상호보완적일지도 모르겠다.


살아가면서 스트레스 상황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그건 인정하는 게 속 편하다. 100억 부자쯤 되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싶겠지만, 아닐 거다. 오히려 자극이 부족한 탓에 아주 지루해서 스트레스를 받을 거다. 본디 인간이란 그토록 무지몽매한 존재다.

나는 스트레스 상황에 오래 버티지 못하는 허깨비 같은 몸뚱이를 가졌으니 무조건 그 스트레스를 해소해줘야 한다. 때문에 문제 상황이 발생하면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은 티도 내지 않고 조용히 처리하지만, 나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적어도 그 관계자는 내 노력에 함께해주어야 한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은 채 문제를 오래 끄는 걸 아주 싫어한다. 그 상황에 나를 혼자 방치하는 일이 반복되면 결국 상대에 대한 신뢰를 잃고 만다.


이처럼 대개 스트레스의 가장 큰 발원지는 ‘사람’이다.


가족, 사랑, 우정, 온라인 게임동료…. 그들은 내게 그 관계 속에서 주어진 친밀도만큼을 인질로 잡아 무례를 저지른다.


‘우리 사이에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네가 이해해 줘.’


아마 그 무례는 나도 저질렀을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누구나 그런 종류의 무례를 저지르며 살아간다. 다만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상대가 내게 그런 무례를 저질렀을 때 나는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것을 수용한다. 그를 열 번 만큼 사랑하면 열 번만큼의 무례를, 한 번만큼 사랑하면 한 번만큼의 무례를. 그러다 그를 사랑하는 만큼의 무례를 모두 소진하고 나면 더는 뒤돌지 않는다.


어렸을 때는 미련이 많아 떠나보내야 할 사람을 붙들고 스스로를 갉아먹는 관계를 유지했다. 사실 여전히도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쉽지 않지만, 적어도 이제는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해서 그 무례를 수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 때문에 손해 본다고 여기지 말 것. 그건 순수한 나의 애정으로만 이루어져야 할 것. 내가 참아 ‘주는’ 것이라 상대방이 느끼게 하지 말 것. 이 모든 것 중 하나라도 실패할 경우 뒤도 돌아보지 말고 관계를 끝낼 것. 그것이 곧 나를 소중히 여기는 법이다.

조금 더 빨리 배웠다면 좋았을, 확고한 나만의 기준이다. 하지만 서른두 해나 먹고 이만치 깨달았으면 꽤 고무적인 일이다.


사실 스트레스라는 건 대부분 일시적인 감정 반응이다. 그 감정을 유발한 상황도 지나고 보면 금세 잊히는 경우가 대다수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 또한 순간적인 호르몬 반응이거나 몸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을 참지 못하고 주변에 터뜨린 날 선 감정과 말들, 그리고 그로 인해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자기혐오는 결코 금세 잊히는 종류의 것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방법을 몇 가지 가지고 있는데, 상황과 강도에 따라 다르게 사용하곤 한다.

예컨대, 일주일간 누적된 업무 스트레스는 주의 마지막 날, 맛있는 안주에 술 한잔을 곁들이며 날려버린다거나. 머리가 유독 무거운 날에는 그저 셧다운을 시킨 채, 여덟 시쯤부터 이르게 잠자리에 들어버린다. 어차피 깊은 잠에는 들지 못해 새벽 내내 몽롱하게 몇 번이고 깨겠지만, 기분 탓이나마 며칠 밤을 자고 일어난 것 같은 착각이 들면, 문득 머리를 짓누르던 고민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글을 쓰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두 가지의 방법으로 나누는데, ‘작품’을 쓰는 일과 그냥 ‘배설’하는 일로 구분한다.

우습겠지만, ‘오늘 이 감정을 털어내지 않으면 정말 죽어버릴 것 같은 날’이 가끔 있다. 물론 말했듯이 불행 배틀 같은 것은 하등 의미 없고 미래지향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못 이기게 치미는 설움을 갈무리하기 어려운 날이 분명 있다. 그것을 쏟아내지 않고는 길가나 버스에 갑자기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릴지 모를 일이니까. 나는 여전히 조금쯤 보통의 인간인 척하며 살아가야 해서, 바깥에서는 멀쩡하고 재기 발랄한 서른두 살로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체득한 나만의 방법이다.

똑같이 글을 써도 ‘작품’을 쓰는 건 확실히 더 건설적이다. ‘배설’은 대개 댓글 창도 닫아버리고, 소통 자체를 거부하곤 하지만(그래도 그들의 라이킷을 보며 찌질하게 위로받아 가고 있음을 고백한다), 작품은 독자들과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도 행복하고, 먼 훗날 그 바카라이 나올 미래를 상상하는 일도 즐겁다.

물론 『혼자 먹는 라면은 맛이 없다』의 출간 과정을 겪어보니, 그것들이 이루어지기까지 아주아주 오래 걸릴 것 같지만 말이다.


하지만 근래는 글을 쓰는 일이 쉽지 않아 멘탈이 굉장히 자주 붕괴했다. 그러니까 스트레스도 안 받고, 그것을 잘 관리할 줄도 안다더니 아주 멘헤라가 따로 없는 거다. 유일무이한 스트레스 관리법을 잃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몇 개월간 그 글을 뜯어고치기만 했다. 아픈 글을 읽고 또 읽고. 더 아프게 쓰고, 더 날카롭게 쓰기 위해 연구하고.

나는 멀티를 못 하니까, 계절 북 작업을 끝내기 위해 칼을 빼 들어 수면시간도 줄인다. 그렇게 내 무지함에 매일 후회와 다짐을 반복한다. 설상가상 업무량은 턱 끝까지 차오른다. 물론 나는 내 일을 아주 사랑하지만, 바쁘고, 또 바쁘고, 아주 바쁘다. 집에 돌아오면 진이 빠져 잠들었다가, 파드득 놀라 깨서 작업물을 켜고, 졸고. 아주 가관이 따로 없다

작품을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주변에서는 기획이 어렵다고들 하던데, 사실 나는 그간 쓰고 싶은 이야기만 세 권이 생겼다. 내게 부족한 건 시간이다. 절대적인 시간. 꾸준히 연재할 루틴. 고작 ‘배설’따위 할 시간도 없어서 일시적인 스트레스 해소도 못 하는 와중에 작품연재는 아무래도 사치겠지.


내게는 애정하는 Y가 있다.


Y와 나는 온 세상이 서로를 비난해도 우리만큼은 서로의 편이 되어주기로 약속했다. 예컨대 Y가 살인을 해도 나는 Y의 편이다. 그리고 내가 살인을 해도 Y는 나의 편이 되어줄 거다.

우리는 비교적 짧은 주기마다 멘헤라를 주고받는다. 그 깊이는 일반인들이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반도덕성을 띤다. 하지만 Y와 나는 그것에 대해 어떤 것도 곡해하지 않으며, 서로의 도덕성에 잣대를 기울이지도 않는다. 그저 그 상황에 대해 함께 쌍욕을 퍼부어줄 뿐이다.

왜냐. Y도 나도 잘못이 없으니까. 모든 건 우리가 심해를 허우적거리게 한 그 상황이 개같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욕하기만 하며 패배자 마인드에 찌들어 살아갈 뿐이냐고?


아니다. 틀렸다.


Y와 나의 공통점은 회복탄력성이 미쳐 돌아버렸다는 거다.


[이 병신 같은 상황을 타개하려면 역시 내가 잘 먹고 잘살아야겠어. 오늘부터 수면시간 줄이고 더 노력한다.]

[회복 완료.]

[역시 나야. 나는 진짜 개 멋있는 인간이야.]

[어제는 정말 고마웠어.]


아침부터 주르륵 와 있는 Y의 연락을 보며 나는 헤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역시 당신은 멋진 인간이야.

자, 그럼 나도 본받아서 제대로 된 하루를 시작해 볼까.


그런 Y에게 요즘은 내가 너무 자주 귀찮게 구는 듯해서, 오늘은 하필이면 머리도 지끈거리는 데다 스트레스 받을 때면 늘 먹던 마라탕집도 ‘가는 날이 장날’이길래, 왜 이리도 되는 게 없는지, 쓸데없이 서랍에 찍힌 손가락까지 서럽도록 아프기만 해서, 그래서 이렇게 써보는 배설인 거지.


실은, 도망치고 싶을 때면 제주로 오라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나 홀린 듯 항공권 예매나 해버린 참이다.


봐, 그래도 내 말이 맞지. 지나고 보면 스트레스라는 건 대부분 일시적인 감정 반응이랬잖아. 이렇게 쓰는 동안 벌써 기분이 꽤 괜찮아졌거든.


아, 자고 일어나면 내일의 하늘은 또 예쁘겠고, 내일의 업무는 또 얼마나 다이내믹할지 벌써 재밌어.

역시 나는 좀 괜찮은 인간이 맞는 듯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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