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000원.
한때 손가락에 반지 모양의 띠를 몇 달이나 두르게 했던 그것이 무색할 만큼, 한없이 가벼운 금액이다. 8년의 시간을 담기에도 참으로 하찮았다.
미루고 미루던 일이다.
이번 주는 바빠서…, 금값이 폭락했다니까…,
딱 봐도 결혼반지 모양을 한 그것을 팔겠다고 내밀면 돌아올 표정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H에게 드디어 결혼반지를 팔기로 결심했다고 말하자, 그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거 팔 때 기분 정말 별로라던데…”
나는 늘 그렇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그런가… 뭐, 그냥 그래요. 내가 정말, 정말 좋아했던 디자인이라 그건 좀 아쉽지만.”
한 돈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반지였다. 금 판매소 직원이 불러 준 14K 매입 금액을 들으며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팔지 말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반지 안쪽에 새겨진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2019. 11. 15.
세상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다. 나는 그걸 결혼생활을 마무리하며 깨달았다.
단언컨대 그와 나쁘게 헤어지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내 인생에 다시없을 귀인이었음을, 인정한다. 나는 그 덕분에 사람 구실을 하며 사는 법을 터득했다.
물론 우리에게도 아주 힘든 시간은 존재했다. 나는 한때 죽어서라도 그의 곁을 벗어나고 싶어 했고, 그는 그런 나를 보며 “축하해. 드디어 내 인생을 씹창 내는 데 성공했구나”라고 말했다. 그러면 나는 다시 숨 막히는 죄바카라감 속을 헤매며 말했다.
“그래도 네가 이제는 내가 아니어도 그 인생에 마음 둘 곳 하나쯤은 만들고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언제 죽어도 미련 없는 사람처럼 살지 말고”
우리는 헤어짐을 기정사실화하고,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와 살을 맞대고 산 8년의 세월보다 더 많은 대화를 했다고 생각한다. 8년이란 시간은 누군가에겐 짧은 시간이겠지만, 서른둘의 나에겐 아주 긴 시간이었다.
나는 때때로 사과를 했고, 종종 그의 마음을 물었다.
“있잖아, 다 지난 얘기라… 이제는 의미 없는 얘기지만… 그래도 묻고 싶은 게 있어”
“응”
“너는 항상 내가 우선순위라 말했잖아. 1순위라고… 그런데 왜 내 감정은 우선순위로 두지 못했어?”
사실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네가 더 잘했니, 내가 더 잘했니, 하며 잘잘못만 따지다가 결국 서로를 쓰레기 보듯 대화가 끝날 거라 생각했다.
“… 말은 그렇게 했다만, 널 정말 1순위로 생각하려기보다는 내 스스로 세뇌시키는 데 더 가까웠어. 타고난 내 본성이 변하지는 않는 것 같더라.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해. 말만 번지르르했던 것 같다. 내가 부족했어.”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서럽게 목놓아 울었다. 그와 함께한 결혼생활 동안, 처음 받아 본 진심 어린 사과였기 때문이다.
“팔아주세요.”
계좌로 282,000원을 입금받고 그곳을 나서는 순간, 눈물이 멈출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아, 이 조울증이 또…
장맛비는 이미 그쳤고, 하늘은 이렇게 해사한데 대낮부터 눈물 바람이라니.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요즘 들어서야 알게 됐다. 나는 내 감정을 알아차리는 게 아주 늦는 사람이라는 걸.
아무래도 대로변에서 사연 있는 사람처럼 보이긴 싫으니까… 급히 택시를 잡아탔더니, “왜 우냐”는 기사 아저씨의 다정한 걱정에 나는 또 서럽게 눈물만 뚝뚝이는 거지.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아니, 사실 괜찮지 않다.
그와의 결혼생활 동안, 나는 가지고 있던 금붙이를 모두 팔았다. 그가 프러포즈하며 선물했던 목걸이와 반지, 죄바카라감이 덕지덕지 묻은 엄마의 순금 반지. 살면서 청약도 몇 번이나 해지했더라…
그 모든 건 내가 무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혼생활에 늘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까, 결국 내 탓이었다.
나는 이제 그때만큼 무능하지 않지만,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마음이다.
눈이 퉁퉁 부은 채 단골 미용실로 향해 앞머리를 잘랐다. 언제나 내 머리를 손질해 주던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붉어진 내 얼굴을 알아본 듯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괜히 한 번 더 머리에 볼륨을 넣어주고, 이것저것 말을 붙이며 부산을 떨었다.
“앞머리는 서비스예요”
“아…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는 내 손에 달콤한 사탕 두어 개를 꼭 쥐어 주며 말했다.
“예쁜 머리하고 기분 좋은 하루 돼요.”
미용실을 나온 나는 왼손의 약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는 살이 통통하게 차올라 반지를 끼고 있던 자국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옆에 있을게”라는 말이 얼마나 무거운 약속인지 실감하는 요즘이다.
아, 이제 다시는 약지에 무언가를 끼고 싶지도, 금붙이 따위를 파는 삶을 살고 싶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