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철들 무렵'(2025) 리뷰
9월 16일 극장 개봉한 정승오 감독의 영화 <철들 무렵>(2025)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때 좋은 반응을 얻었던 작품 중 하나다. 정승오 감독은 일찍이 <이장>(2019)으로도 가족 영화의 한 방향을 보여준 바 있다. 하윤경, 기주봉, 양말복 등의 배우들이 열연한 <철들 무렵>을 개봉 전 VIP 시슬롯에서 만난 뒤 개봉 후 씨네토크(GV) 행사로 한 번 더 관람하면서 이 영화가 조금 더 좋아졌다. 좋았던 점들을 중심으로 기록을 남겨두려고 한다. 기록의 흐름은 <철들 무렵>이 일종의 막처럼 제시하는 다섯 개로 된 소제목을 따른다.
그러고 보면 사람도 가능성의 동물인 듯하다. 어제까지는 할 수 없었던 말을 오늘 가까스로 꺼내거나, 그동안 탈락했던 오디션에 오늘은 합격하게 되거나. 해묵은 감정을 오랜 기간 응축해 왔던 가족과의 재회나 화해 같은 일들. 그것을 '극복'이라고 칭해도 될까.
<철들 무렵>에서 이 가능성을 보여주는 인물은 물론 정미(하윤경)와 철택(기주봉)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네가 하는 게 다 그렇지 뭐"라고 툭 튀어나온 말에 심란해지는 정미. 암 4기 선고를 받고 자기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자괴감에 빠지는 철택. 가족인 서로가 서로에게 모진 말을 하는 건 둘 다 악하고 못 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단지 마음처럼 잘 되지 않을 뿐이다.
각 챕터의 제목 중 바로 이 두 번째 '닮은 얼굴의 낯선 사람들'이 텍스트 자체로 영화를 잘 대변하는 인상적인 문구라고 생각했다. 같은 핏줄을 가지고 있으니 닮아 있는 외모적인 면이나 물려받은 성격이나 버릇들. 하지만 태어나서부터 삼십 년이 넘도록 부대끼며 살아온 부모 자식 간이라 해도 어떤 상황에서 직면하는 서로의 모습은 낯설다.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어? 도 있고 당신에게도 그런 면이 있었구나? 도 있겠다. 겉으로는 씩씩하게,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괜찮아질 거라고 위로와 응원을 건네주지만 돌아서면 통장 잔고와 당장 해치워야 할 일들 앞에서 복잡해진다. 정미와 철택은 지금 겪어본 적 없는 질병과 생계의 위협 앞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분투하는 중이다.
<철들 무렵>의 중심 사건 내지 소재는 물론 암 진단을 받고 진료를 위해 입원하게 된 철택과 그를 간병하게 된 딸 정미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 그 외 정미의 배역 오디션이나 정미의 엄마이자 철택의 별거 중인 아내 현숙(양말복)이 준비하는 어머니 옥남(원미원)의 구순 잔치 정도가 있겠다.
그렇지만 이 고유한 인물들의 개별적 이야기를 여느 가족의 초상이 될 수 있도록 묶어주고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작중 옥남의 내레이션을 통해 제시되는 소설가 박완서의 세 작품(「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겨울 나들이」)이다. 마치 옥남의 자식들에 관한 개인사처럼 아마도 철택과 비슷한 세대일 옥남의 자식들이 80년대 학생운동을 하던 시기의 여러 기록 영상들이 삽입되는 가운데 세대를 이어 제시되는 가족의 초상을 과거와 미래 시점 모두를 포용하는 방식으로 그려가는 장치인 것이다.
평소 박완서의 작품을 좋아해 왔다는 정승오 감독은 시대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개인의 욕망이나 유머를 솔직한 방식으로 드러내면서도 예리한 통찰을 담아내는 박완서 소설 특유의 분위기를 영화에도 담아보고자 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옥남의 목소리로 제시되는 박완서의 문장들이 <철들 무렵>의 시간에 깊이를 더해준다. '상처 속에 박힌 말뚝'이라는 세 번째 챕터의 제목은 아마도 당연히 「엄마의 말뚝」을 연상케 한다.
관계에서 생겨나는 앙금을 해소하는 건 단기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병원에서 철택은 수술 뒤 간호사로부터 속에 있는 가래를 주기적으로 잘 뱉어내야 한다는 안내를 받는다. 그런데 쉽사리 뱉어낼 수 있을 리 없다. 간호사의 말대로 아무리 정미가 등을 세게 두드려도, 시간이 필요하다. 가래가 속에서 바깥으로 나올 수 있을 만큼의 일정량이 축적되어야 끓어오르듯 튀어나올 수 있는 것처럼. 아마도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서로에게 가장 정확한 방식으로 깊은 상처를 줄 수도 있는 가족의 언어가 조금 더 화해에 가까운 쪽으로 발화되기 위해서는 각자의 사정과 입장을 이해하려는 시도와 노력이 끊임없이 필요하다.
한편으로 저 '차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은 영화의 작점에 도달하기 위해 관객들 역시 영화와 함께 시간을 쌓으며 곁에 오래 머물러야 한다는 이야기 같기도 하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하는 탄식은 작중 인물들을 지켜보다 보면 이내 나도 당신도 우리 곁의 누군가도 저럴 수 있지 하는 자조적인 끄덕임으로 향한다. 저게 가족이구나. 이게 가족이구나. 우리도 저런 모습이 있었지.
갑자기 엄청난 변화의 전기가 마련되어서 <철들 무렵> 속 가족들에게 다른 내일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체념한 듯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어주는 순간도 있고 불쑥 모진 말을 내뱉고 난 뒤 차마 돌아서지 못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도 있다. 다정하게 안아주고 진한 화해의 순간을 나누지 않더라도, 이들은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난 뒤 다음을 향해 나아간다.
지금껏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작중 정미가 연기하는 단역 출연자는 귀신이다. 스쳐가는 배역에도 전사를 생각하고 진심으로 임해야 한다며 이런저런 이야길 늘어놓던 정미에게 마치 응답이라도 하듯, 영화 어떤 장면에서 정미는 마치 환영처럼 자신이 연기한, 귀신 분장을 한 어떤 이를 본다. 그리고 손을 흔든다. 손을 먼저 흔드는 건 귀신이다. 거기에 화답하는 정미. 이제는 철이 좀 든 것 같다. 내일 갑자기 로또에 당첨되거나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거나 하는 일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철들 무렵>의 가족들은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다. 영화 특유의 쾌활하고 유머러스한 연출 뒤에는 숨길 수 없는 가족의 뒷모습이 있다. 그들도 우리 가족도 잘 살았으면 좋겠다. 오래 행복했으면 좋겠다.
영화 <철들 무렵>(2025)
2026년 9월 16일 개봉, 105분, 15세 이상 관람가.
감독, 각본: 정승오
출연: 하윤경, 기주봉, 양말복, 원미원 등
제작: 주마등필름, (주)인디스토리
배급: (주)인디스토리
2026.09.17. <철들 무렵> 씨네토크에서(씨네큐브 광화문)
2026.09.01. <철들 무렵> VIP시슬롯에서(CGV용산아이파크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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