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선희이모'(2026)
휴가를 다녀온 사람들이 하나둘 일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하는 8월 말이면 도시의 공기가 아주 조금은 달라진 것도 같다. 이제는 흔히 말하는 '처서 매직' 같은 단어가 옛말이 된 듯도 싶지만. 여전히 햇빛은 뜨겁고 습도는 변함 없지만 저녁 무렵에는 다음 계절을 예고하는 듯한 바람이 이따금 기분 좋게 불어온다. 끝난 듯 끝난 듯 아직 늦여름. 갑자기 가을 문턱을 넘는 게 아니라 사라질 듯 말 듯 서서히 빛깔과 농도를 달리한다. 그 여름의 끝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작별을 다룬 이야기들이 오래 마음에 둥지를 튼다. 최근 미쟝센단편영화제와 넷플릭스 등을 통해 공개된 24분짜리 단편영화 <선희이모>(2026)을 보면서 떠나는 일과 남겨지는 일 모두를 돌아본다.
반려견 미용사로 일하는 '선희'는 손님이 맡겨놓은 뒤 찾아오지 않는 강아지 한 마리를 집에 데려와 임시로 돌본다. 그러던 어느 날, 여러 해 동안 소식이 없었던 조카 '서연'이 대뜸 찾아온다. 곧 뉴질랜드로 떠난다는 서연은 엄마는 이미 죽었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걸려온 휴대전화 화면 속 연락처를 본 선희는 그 말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선희와 서연 두 사람이 함께 밥을 먹거나 대화를 이어가는 매 장면들은 혈연이라고 해서 모든 걸 알고 이해할 수는 없다는 듯, 부딪혔다가 냉랭했다가 다시 서투르게 말을 거는 순간들로 채워져 있다.
<선희이모>는 감정을 내리꽂아 직접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밥은 먹었냐", "알약은 아직도 못 먹냐" 같은 투박한 말들. 떠나는 조카의 캐리어나 가방 안에 말없이 무언가를 챙겨 넣는 순간들이 쌓이면서 관계를 대신 말해준다. 오래 떨어져 있었어도 몸이 먼저 기억하는, 사랑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을 마음이 있다는 것을, 어떤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도 끝내 사랑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영화는 아주 사소한 것들에서 무심히 전한다.
왜 하필 늦여름에 이 영화를 만났을까 궁리하다 영화에서 눈 여겨 볼 장면으로 집을 나간 (남의) 강아지를 되찾기 위해 골목 곳곳을 달리는 대목을 떠올린다. 술에 취한 원래 주인의 품으로 돌아간 강아지를 본 선희는 체념한 듯 "주인 찾아줬으면 됐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서연은 강아지를 품에 안고 "이모, 뛰어!"라고 외친다. 두 사람이 함께 달리는 밤. 한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조카를 엄마에게 돌려보내야 했던 선희와, 이제는 스스로 붙잡고 싶은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서연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같은 방향으로 뛰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볼 시간은 그렇게 뒤늦게 찾아오기도 한다.
살아가는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 그 말은 우리 중 어떤 이들은 떠났던 누군가 돌아올 것을 계속해서 기다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다림은 언제나 응답받지는 못하고 다시 만나더라도 관계의 모양와 결은 예전 그대로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함께 뛰었던 시간과 그날의 가쁜 호흡, 땀. 지나간 약속이나 불가피했던 거짓말들. 잊으려 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
선희가 서연이 떠나는 날 건네는 검은 비닐 봉지 안에는 콘돔이 들어 있다. 선희가 뉴질랜드의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연을 아직도 알약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어린 아이로 걱정하던 이모가 조카에게 건네는, 가장 서툴고 다감한 작별 인사이자 선물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너도 어른이라고, '잘 다녀와'가 아니라 차라리 '잘 살아'라고 말해줄 수 있는 너른 마음이 투박하게 담긴다.
생동하던 여름의 끝자락엔 져버리거나 떠내보낸 것들이 놓여 있다. 긴 휴가도 길었던 한낮도 이제는 끝을 향해 간다. <선희이모>는 사랑이 반드시 "사랑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경유해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마음으로 느끼는 영역이 분명 있다고 일깨운다. 말없이 챙겨준 짐과 끝내 지나간 일은 묻어두고 앞날을 염려하며 배웅해주기로 한 마음. 여름이 지나가는 방식도 어쩌면 그것과 닮아 있다. 뜨거웠다는 말 대신 조금 선선해진 저녁 바람으로, 계절은 우리에게 작별을 직접 말하지 않으면서 다음에 올 계절을 천천히 초대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떠나갈 채비를 한다. 서연이 선희의 머리카락을 염색해주는 모습처럼, 이 오늘도 금세 다음 계절로 말없이 물들어갈 것이다.
*본 리뷰는 기상청 소식지 <하늘사랑> 2026년 9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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