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나
"어떤 대화가 되었든 헵타포드는 대화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대화가 행해져야 했던 것이다."
-테드 창, 「네 인생의 이야기」
어두운 상영관 안, 스크린에서 새어 나오는 희붐한 빛에 의지해 노트 위로 손을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종이와 펜이 만나는 마찰음은 들리지 않고, 눈은 노트를 봐서는 안 된다는 듯 시선을 고정한 채 스크린을 노려본다. 눈 대신 손이 분주히 움직이는 건 지금 저 인물이 하고 있는 말들이 중요하다는 본능적인 직감 덕분이거나, 영화 전체를 놓고 보면 그다지 의미 있는 비중을 차지하지도 않을지 몰라도 어떤 장면이 순전히 지금 마음을 울린 탓이다. 일단 적으면 그게 어떻게 남을지는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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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극장은 가장 안전한 공간이자 도피처였다. 아무 말하지 않고 오직 앉아서 보고 듣기만 하면 되는 곳으로, 생면부지의 사람들 틈으로, 사람과 소음을 피해 숨어들었다. 언제나 가장 설레는 순간은 영화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드럼과 관악기들의 팡파르 박자에 맞춰 밤하늘을 향해 탐조등이 하나씩 켜지거나, 칠흑 같은 밤을 지나 일출과 함께 육대주에 불이 켜지며 거대한 글자들이 지구의 허리를 감싸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리더필름은 영화를 안 보는 동안에도 생생히 재생됐다. 장대한 세계로의 항해를 떠나기 직전에 치르는 어떤 의식처럼, 그 십여 초 남짓은 호흡을 가다듬는 시간이었다. 일상의 공간에서 그렇게 비일상의 세계로 잠시 다녀오는 두 시간을 위해 대단한 준비물은 필요하지 않았다. 펜과 노트, 이따금 마실 물이나 커피, 두 눈과 귀와 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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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인터스텔라>(2014)의 첫 시슬롯에서 나는 브랜드 교수 역의 배우 마이클 케인의 음성으로 영화에 세 번에 걸쳐 삽입된 딜런 토마스의 시구를 이끌린 듯 메모하고 있었다.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오. 인류 전체보다는 단지 다시 만날 가족을 생각하면서 블랙홀의 심연에 기꺼이 뛰어든 쿠퍼와 타스를 그렇게 몇 번이나 다시 만났다. 머리로는 생각할 수 없는 5차원의 세계에 다녀온 기분을 몇 번이고 다시 느끼고 싶어졌다. 개척정신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기를 노래하는 듯한 저 시는 귓가에 계속해서 맴돌며 영화관으로 다시 향하도록 나를 부추겼다. 그때 영화는 해치워야 할 숙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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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영화를 극장에서만 여덟 번 정도 보고 나면 이제는 그곳이 더 이상 미지의 세계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예견할 수 있는 세계에서는 다음 장면에 나올 말과 표정을 그 뒤 이어질 반응을 안다. 바벨의 도서관을 연상케 하는 공간에 갇힌 쿠퍼는 어린 머피에게 자신을 붙잡아달라고 바카라장 벽을 두드리며 소리친다. 중력 방정식의 답을 찾은 머피는 풀이 과정을 빼곡하게 쓴 종이들을 허공에 던지며 유레카를 외친다. 다음 장면에선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고, 몇 개의 컷을 더 건너뛰면 한스 짐머의 파이프 오르간을 쓴 비장한 사운드트랙이 경외감을 고조시킨다. 다시 어딘가를 향해 떠나는 쿠퍼의 뒷모습이 보인다. 다른 항성계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을 한 사람을 생각하는 쿠퍼를 보며, 영화를 관람하는 일이 곧 스크린 너머의 인물을 마치 실제인 것처럼 곁에서 지켜보며 함께 호흡하는 일이 아닐까 싶어진다. 영사기가 스크린에 쏘아내는 빛은 곧 하나의 우주나 다름없다. 그 찰나를 더 잘 기록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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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내일 또 내일 무한히 다시 보면 그 여정은 끝나지 않고 지속될 것 같았지만 매주 새로운 영화가 개봉했고 한두 작품씩은 계속해서 떠나보내야 했다. 욕심부려 하루에 영화를 세 편 보면 셋 중 제일 처음 본 것의 잔영은 금세 흐릿해졌다. 같은 시기 여러 작품들에 모두 애정을 쏟을 수는 없었다. 그런 아쉬움 속에 언젠가부터 극장에서 조용히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 '보고' 있는 영화의 기억을 손으로도 옮기면 몸 안에 더 각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마음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어도, 패턴과 단서, 감각을 쌓아 두면 언젠가 다시 만져보고 꺼낼 열쇠 하나 정도는 남아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게 곧 영화를 좋아하는 방식이었다. 메모들이 하나 둘 모여 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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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화가 펼쳐질지 미리 알고 있다 해도, 그것을 처음 만나는 것처럼 머릿속 상상이 마침내 실제로 영사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좋았다. 극장이 나를 안심시킨 것은 그저 눈앞에 펼쳐질 다음 장면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극장 바깥에는 아무리 되풀이해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널려 있었지만 여러 번 되풀이하는 영화는 적어도 다음 장면을, 어떤 단서를 내어 놓았다. 의문이나 질문을 남기는 영화도 그것을 함께 견뎌내는 시간들이 내게는 곧 하나의 대답이었다. 영화에서라면 갈등은 언젠가 매듭지어지고, 단서는 제자리를 찾아가며, 인물은 천신만고의 여정 끝에 변화한다. 그걸 목격하고 체험한 나는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영화 속에서 두 시간을 산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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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깥에선 봉합이나 이해, 발견이란 단어가 아주 오랜 시간을 경유해서만 찾아오거나, 아니면 영영 찾아오지 않았다. 오독과 오판, 때로는 오해들을 지나고 나서야 겨우 알게 되는 것들. 영화라고 해서 항상 정확하거나 명쾌한 이해를 동반한 건 물론 아니었다. 그건 아무리 열심히 메모해도 마찬가지였다. 삐뚤빼뚤하게 남긴 흔적을 알아보지 못하고, 보지 않은 채로 손만 움직여 쓰인 글씨를 읽어내지 못한다. 어떤 단어나 문장은 거기 왜 썼는지 맥락이 기억나지 않는다. 음식을 황급히 먹어 치우듯 실시간으로 가득 채워 넣은 노트의 소화되지 않은 페이지를 보면 감상이 오히려 잘 정리되지 않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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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영화를 보러 다시 극장을 찾는 것뿐이었다. 또 만나기. 반복하기. 대사와 표정에 집중해서 본 다음에는 촬영과 컷의 전환, 편집을 유심히 살피고 그다음에는 미리 숙지해 둔 사운드트랙과 삽입곡이 어떤 대목에 쓰이는지를 귀담아듣는다.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거나 원작 소설을 읽어본다. 어떤 경우에는 그저 생각을 오래 굴리다 보면, 커서가 깜빡이는 흰 화면을 극장 스크린이라 생각하고 응시하다 보면 정리되는 것이 있기도 했다. 때로는 불충분한 감상과 놓쳐버린 장면을 뒤로하고 다음 영화로 나아가야 하는 날도 있었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다시 만나거나 알아보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고, 그것들을 더 잘 간파할 수 있는 성실한 관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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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영화를 보고 난 뒤의 삶이 어떻게든 그 영화로부터 무언가를 느끼고 배운 뒤의 하루들로 채워지길 바랐다. 아니, 영화들과 그 기록들을 모으고 쌓다 보면 그것들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까. 해피엔딩은 영화에만 있지는 않다는 믿음과 예술을 삶에서 처음 마주했던 순간에의 경외를 조금씩은 잊으면서 나이가 들어갔지만, 영화는 나이를 먹지 않았지만, 그 배우나 그 감독의 다음 영화가 나오면 언제든 처음 영화가 시작되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기록을 남겼던 영화의 후속작이 나오면 어쩐지 이걸 보기 위해 잘 살아 있었구나 싶어 위안이 됐다. 한 사람의 필모그래피를 갱신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의 영화를 이렇게 열심히 사랑해 왔으니, 이번 영화가 내 앞에 당도한 건 잘 살아왔든 그냥 살아왔든 그저 무엇인가 보고 쓰기를 멈추지 않고 반복해 온 덕분일지도 모른다고, 인생의 최고작은 아직 만들어지는 중이라고, 어쩌면 당신의 새 영화를 보기 위해 오늘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마음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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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인생의 영화라 일컬을 만큼 특별하고 경이로운 작품이라 해도 거기 조금씩 먼지가 쌓이고 다른 영화들이 자리를 조금씩 대신해나가는 일을 막을 수는 없다. 왓챠피디아에 별점을 기록한 1,800여 편의 영화들이, 그중 특히 앞쪽에 위치할 수십 편이 저마다 같은 의미로 소중하고 비슷한 비중으로 기억되어 있느냐 하면 욕심과는 달리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건 삶의 어떤 순리와 닮았다. 영화 하나를 떠나보내는 일은 영원히 안녕을 고하는 게 아닌 언젠가의 재회를 막연히 기약해두는 일이었으니까. 어떤 영화는 우연한 계기로 눈앞에 다시 나타나기도 했으며 전혀 새로운 낯선 영화에서 오래 전에 스쳐간 영화의 장면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일반적인 상업영화 한 편의 각본에 평균 일 만 개 안팎의 단어가 들어간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껏 극장에서 내 귀를 통과한 단어들은 어림잡아도 일천만 개는 족히 넘어갈 것이다. 나는 그중 얼마나 많은 단어들을 기억하고 잊어버렸을까. 언젠가부터 메모에 너무 골몰하지 않게 된 것도 기록의 여백과 사유의 가능성을 조금씩 더 믿게 된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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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화의 시작을 처음 함께한 순간. 다 보고 난 뒤의 울림. 그리고 지나간 영화를 떠올리는 스스로의 모습. 그 각각의 장면들을, 살면서 만난 모든 영화들을 뇌리와 손끝에 간직하고 잊기를 반복해 온 나는 지금껏 만나지 못한 새 여정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떨림을 안고 처음 앉아보는 좌석에 자리 잡는다. 곧 보게 될 영화에 대해 아무리 많은 사전 정보와 배경을 숙지하고 있어도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영화를 미리 관람한 누구든 내게 자신이 그것을 보는 동안 어떤 시각과 청각을 통과해 이야기를 소화했는지를 그대로 체험시킬 순 없다. 오직 영화와 나 사이에만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선이 실처럼 둘을 연결한다. 하나하나의 컷들이, 필름들이 모여 길고 긴 이야기를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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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미리 알 수 없다는 말은, 지금의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좋은 일 역시 어느 때에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터스텔라>를 만난 그 해는 극장에서 같은 영화를 처음으로 두 번 이상 관람한 해였다. 2014년, 서른 살도 되지 않았던 나는 2020년대에 어떤 앞날을 살고 있을지 가늠이나 할 수 있었을까. 어떤 패턴이 있었을 따름이다. 삶의 일정한 방식을 유지하는 일이 시간선에 의미를 부여해줄 거라는 희미한 바람만이. 최고의 영화는 내가 아직 만나지 못한 언젠가의 영화일 거라고. 그 영화를 만나러 지금 영화관으로 또 걸어가고 있다고. 한 줄이 한 페이지가 되듯, 하루 한 달이 일 년 십 년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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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실제로 손꼽아 보고 싶은 영화인이 딱 둘 있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크리스토퍼 놀란. 근거도 대바카라도 없이 언젠가는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이었다. 거짓말처럼 얼마 전 <오디세이>의 개봉 전 내한 무대인사 시슬롯에 다녀왔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과 엠마 토마스 프로듀서, 그리고 맷 데이먼과 샤를리즈 테론 배우가 앞에 섰다. 짙은 남색 타이를 매고 투버튼 수트를 멋지게 차려입고 나타난 놀란 감독을 스크린으로부터 그리 가깝지도 않은 L열 좌석에서 바라보며 내내 가슴속 무엇인가 채워지고 응답받은 것만 같은 기분에 뭉클해졌다. 손가락으로 닿을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 저 먼 곳을 가리키며 흘러가듯이 달려왔더니 마침내 그 손끝에서 또렷한 선처럼 빛 한 줄기를 목격한 듯했다. 일행에게 티 내지 않았지만 지나온 시간이 한꺼번에 마음으로 밀려들었다. 나 전부터 당신을 꼭 한 번 만나고 싶었어요. 이 순간을 기다려 온 건지도 모르겠어요. 계속 영화를 만들어주어 고마워요. 10분은 짧았고 나는 다시 172분의 여정을 만나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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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예전처럼 상영관 안에서 메모를 치열하게 하지는 않지만, 어떤 바람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우직한 경로를 지나 실현되기도 한다. <인터스텔라>의 언론 시슬롯에서 몸을 비스듬히 구긴 채 노트의 페이지를 넘기던 내가 <오디세이>의 무대인사를 마친 그들이 퇴장하는 동안 겹쳐져 보였다. 그렇게 <인터스텔라>를 관람하고 또 관람하던 2014년 11월의 나는, 2026년 8월의 <오디세이>를 결국에는 만날 예정이었을 것이다. 내일의 내게는 아직 누구도 말해주지 않은 영화가, 수없이 많은 인생 영화가 스크린 뒤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 내일을 상상하며 오늘은 이미 두 번 관람한 <오디세이>를 다시 예매한다. 상영관 내 비상대피로 안내가 나온 뒤 찰나의 완전한 암전을 지나, 예의 그 유니버설픽쳐스의 리더필름이 재생될 순간을 안다. 이윽고 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영화 속 오디세우스의 마지막 내레이션을 나는 이미 떠올리고 있지만 트로이 목마가 타오르는 장면 속에서 그 말이 한 번 더 귓가에 처음처럼 들려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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