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빛이 주는 근본적 경이
-영화가 시간을 복제하는 걸 넘어 어떤 경이에 가까운 영역에서 삶을 실어 나를 수 있다고, 픽션에 공감하고 겪지도 않은 일을 알고 아파보지 않은 일에 눈물 흘릴 수 있다는 건 결국 인간이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바탕이라고 오직 영상 서사가 구현할 수 있는 최상의 방식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다름 아닌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가 맞다고 한 컷도 빼놓지 않은 모든 순간이 보여주고 있다. 기술적으로 매끈하고 유려한 프로덕션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가장 뜨거운 방식으로 내내 수렴한다. 관객은 어느 순간 이해를 넘어 목격하게 된다. 영화 속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인류가 어떤 거대한 비밀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입장과 진실을 눈앞에서 직면하는 것이 권리를 넘어 한 세계가 나아갈 길과 맞닿아 있다는 입장이 첨예하게 충돌한다. 막으려는 자와 폭로하려는 자의 싸움은 그렇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 따르면, 멈출 수 없다(unstoppable). 인간은 결국 믿기 위해 봐야만 하니까. 그래야만 보지 않은 것도 느끼고 상상할 수 있게 되니까. 이 영화 또한, 초월적 공감은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아예 보이지 않는다)
-작중 또 다른 '프로덕션'이 있다. 누군가의 집을 짓고 소품을 그대로 구현하는 일은 어떤 인물의 삶 속 한 장면을 재현하기 위해서인데 그건 인간이 어떤 정보가 오가는 통로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주체성을 가지고 미지로부터 경이를 발견할 수 있는 존재임을 지켜내고자 하는 뜻에서 비롯한다. '헨젤과 그레텔'을 연상케 하는 그 집의 모든 세부를 떠올리는 과정이, 그 자체로 고전과 미래가 만나는 아름다운 방식이었다. 홍관조 모빌이 벽에 비친 그림자, 큰 사슴의 검은 눈, 그리고 사람의 눈에 내리는 눈부신 빛.
-어쩌면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을 수 있을 클라이맥스의 어떤 대목에서 당연하게도 <디스클로저 데이>는 바로 '그 말'만큼은 관객에게 들려주지 않는다. 이미 당신은 충분히 보았으니 이제는 무엇을 보고 들을지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을 거라고, 영화가 여전히 사람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정보의 통제가 아니라 판단의 주체를 관객에게 이전해 주는 일이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이 문명을 이룬 건 추상적인 걸 실재인 것처럼 믿을 수 있기 때문이란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눈앞에 있는 게 진짜인지 합성되거나 생성된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시대에, 영화가 처음 '상영'됐을 때 새로운 문물을 본 사람들이 혼비백산했다더라는 (약간은 신화화된) 구전을 떠올린다. 영화는 그 경이의 산물인 동시에 태생적으로 어둠 속에서 스크린에 쏘아 비추고 거기 빠져들게 하는 것. 세계를 창조하고 발명하는 영화의 처음부터 바로 그 빛이 있었다.
-만약 이 세계에 인간만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건 창조나 절대성에 대한 어떤 믿음을 깨뜨리는 일일까? ("'이 땅'의 피조물") 영화가 어떤 경험을 생성하는 장치라면, 그것을 관람한 사람들은 생성된 경험을 체득한 사람이 된다. 알고 믿고 살아온 세계에 균열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건 세계를 깨뜨리는 일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일이다. 픽션이 얼마든지 계속해왔던 일.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잃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일. 바로 그 능력이 위협받는 시대에 <디스클로저 데이>는 진짜를 발견하고 넓은 세계를 꿈꾸는 본능을 다시 일깨우려 한다. 가능한 혼돈을 봉합하고 오류를 개선해나가는 쪽으로.
-물론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판단할지는 관객의 몫이다. 적어도 스티븐 스필버그는 어릴 때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그 미지와의 조우가 주는 떨림과 경이를 여전히 믿고 있다는 걸 오직 한 편의 영화이지만 자기 생과 작품 세계 전체를 집대성한 이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블록버스터의 역사 그 자체인 사람이, 수 십 년의 세월을 건너 여전히 순수한 어른으로 남아 있다는 걸 상기하게 되는 영화였다. 내게는 그 일이 뭉클한 것을 넘어 제법 울컥하기까지 했다.
-영화는 산업적으로 발전과 위협을 동시에 직면하고 건너왔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스필버그의 근작들은 모두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들었고 <디스클로저 데이> 역시 정확히 마찬가지다. 영화가 끝난 뒤 다시 극장에서 그 영화가 시작되길 바라면서 상영관을 나서는 발걸음 내내 "예술이 세계를, 예술가가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동료 인간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좋은 방법을 아는 영화를 방금 봤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싶었다. 잃었거나 놓쳤거나 이루지 못한 시간을 영화는 다시 살아보게 한다. 모든 의미에서 내게는 이 작품이 올해 가장 압도적인 걸작으로 남을 것 같다. (2026.06.16.)
*김혜리, 『묘사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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