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고 꽃이 질 때 다시 산바카라하는 시간

영화 '언어의 정원'(2013) 리뷰

by김동진

고등학교 1학년인 타카오는 비 오는 날이면 몰래 1교시를 빠지고 신주쿠 공원에 간다. 그가 도쿄 도심에 있는 그 큰 공원 정자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이유는 비가 올 때에만 만날 수 있는 도시와 정원의 색다른 풍경들이 있기 때문. 어느 날은 그 정자에 타카오 혼자가 아니었다. 단정한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은 채 초콜릿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는 유키노가 있다. 모르는 두 사람이 대화를 하게 된 건 타카오가 구두를 만드는 일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러닝타임 46분으로 중편 정도에 해당되는 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2013)은 지금은 <너의 이름은.>(2016)과 <날씨의 아이>(2019), <스즈메의 문단속>(2022)으로 국내외에서 많은 팬덤을 확보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비교적 초중기 작품이다. 본인의 작품을 직접 소설화할 정도로 섬세한 스토리텔링에 일가견이 있는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들 중 <언어의 정원>은 특히나 실제 풍경을 사진으로 그대로 옮긴 듯한 세부적인 작화의 미감이 돋보인다. 일상 소품들에 대한 정밀한 묘사는 이야기에 생활감을 또렷하게 하고, 빛의 세기와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과 풍경의 명암, 그리고 풍경을 거의 360도로 묘사하는 패닝 숏은 관객 또한 마치 그 장소에 있는 것 같은 실감을 안겨준다.


영화 '언어의 정원' 스틸컷


90분 이상의 장편 애니메이션에 비하면 인물이 겪는 사건이나 상황 묘사보단 내면의 독백 중심인 이야기가 주는 서사적 감흥은 어떤 관객에겐 부족하게 다가올 수도 있지만 <언어의 정원>은 일본에서 개봉 시기를 5월로 택한 이유가 고스란히 납득될 만큼 지금 감상하기 적역인 작품이다. 영화가 어떤 날씨와 계절을 정확히 포착할 때, 더 엄밀하게는 타카오가 어느 순간부터 아침에 비가 와 있거나 내리는 중이기를, 그리하여 유키노를 만날 수 있기를 바라게 되는 마음을 이해하게 될 때 관객은 여러 영화에서 자주 보던 늦봄과 초여름 사이의 날씨를 새롭게 경험하게 된다. 작중 비가 내리고 인물들이 정자 밑에서 비를 피하거나 혹은 빗속에 마음을 가만히 흘려두는 사색의 시간을 보낼 때, '언어의 정원'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돌아보게 된다.


이상하고 때로는 제멋대로이면서 너무나 보통의 그것인 듯싶지만 이런 마음은 다 설명하려 하면 어느 순간 실패한다. 생의 어느 순간 한 사람이 주저앉은 한 사람을 다시 걷게, 또는 더 멀리 걷게 해 줄 수 있었다면, 그 모습으로 말미암아 나 역시 몇 걸음은 더 내디딜 수 있었을 것이다. <언어의 정원>이 5월 말부터를 계절적 시간적 배경 삼는 건 변화무쌍한 환절기가 사람의 마음과 닮아서일 것이다. 비가 오래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날 야속하게 쨍한 햇살이 내리고, 오히려 맑았으면 하고 바랐던 날 소나기가 내린다. 타카오도 유키오도, 비 오는 날 공원에서 한두 시간 함께하는 인연으로 다음 날에도 비 오는 날씨이길 바라는 날들이 쌓인다. 여기에서 물론 두 사람 각자의 나이나 직업, 상황과 같은 환경적 요소가 개입하거나 관계를 가로막지만 아무래도 그것 자체가 이 영화에서 전적으로 중요한 건 아닌 듯하다.


영화 '언어의 정원' 스틸컷


타카오가 누군가를 위해 구두를 직접 만들어주고 싶다는 바람과 목표를 갖는 일은 마치 우산을 만들어주고 씌워주고 싶다는 마음과 닮아 있다. 우산이 단지 비를 피하게 하는 정도의 역할이라면 구두는 한 사람을 걷게 한다. 교사인 유키오는 학교에서 어떤 일로 겪은 정신적 상처를 살아내며 주저앉은 채 초콜릿과 맥주에 의존하다 타카오와의 대화로 점차 일상을 회복해 나가기 시작한다. 신카이 마코토가 직접 쓴 소설판에 따르면, 타카오 역시 수제화를 만드는 일을 실제로 꿈꾸며 장차 성인이 된 뒤 유럽으로의 유학 계획을 세운다. 그렇다면 이 관계는 한 사람만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를 어떤 의미에서 구하거나 좋은 쪽으로 영향을 주는 셈이다. 그래서 이미 한 시인이 근사하게 표현해 놓았다. "멀리서 구하지 않아도 이미 도착한 것일지 모른다고 (...)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한 사람 안에 포개진 두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는 거"(안희연, 「긍휼의 뜻」) <언어의 정원>을 보면 날씨가 사람의 마음을 대신 말해주거나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바꿔놓는 정경으로 가득하다. 한철 장마가 지고 나면 따라서 지는 것들도 있지만 새롭게 시작되는 것들도 있다. 그것들을 맞이하러 다시 산바카라을 나선다.



영화 '언어의 정원' 국내 포스터


*본 리뷰는 기상청 소식지 <하늘사랑> 2026년 5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https://www.kma.go.kr/kma/archive/pub.jsp?field1=grp&text1=sky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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