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하던 날
여든이 넘으신 아버지는 시골에서 여전히 농사를 짓고 계신다. 아버지는 광복 무렵 집안의 맏이로 태어나셨다. 그 시절에는 누구나 그랬듯 어릴 때부터 꼴을 베고 나무를 하며 힘든 삶을 사셨다. 배움도 길지 못했고, 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가다 군대에 가게 되었고, 제대 무렵 스스로 지원해 베트남전에 파병을 다녀오셨다.
그곳에서 목숨을 걸고 벌어온 돈이 훗날 가족의 삶을 지탱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렇게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동생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나 결혼을 할 때에도 적잖은 도움을 주셨다. 집을 마련해 주기도 하고, 농사지을 땅을 구해주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할머니가,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당시에는 누구 하나 아버지 재산을 의심하지 않았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아니라 평생 아버지 스스로 일구어 온 것이라는 사실을 형제들 모두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예순이 넘도록 부모님을 모시며 살았다. 환갑을 맞아 처음으로 어머니와 먼 이국 땅으로 여행을 떠났다가도, 건강하시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공항에서 곧바로 귀국하셨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오신 이틀 뒤, 할아버지는 눈을 감으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막내 삼촌이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생활이 어렵다며 아버지를 찾아왔다. 처음에는 조금만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부탁은 내용증명이 되었고, 결국 소송으로 번졌다. 주장은 뜻밖이었다. 아버지 재산은 대부분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며, 생전에 부모에게 패륜까지 저질렀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평생을 지켜본 나에게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었다. 두 분이 특별히 살가운 부자는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 살며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모셨다. 성정이 강하신 할아버지가 집안을 몇 번씩 뒤집어 놓으셔도 큰소리 한 번 내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나보다 훨씬 인내심이 많은 분이었다.
나는 당시 외국에 있었다. 소송이 시작되면서 급히 귀국했고,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를 위해 변호사를 선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년여의 법적 공방 끝에 원고 패소로 마무리되었다. 말도 안 되는 소송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상대방에게 변호사 비용까지 부담시키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소송을 주도했던 막내 삼촌을 제외한 다른 형제들과는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고 애쓰셨다. 우리 형제들은 그런 아버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군 제대를 하고 오래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에게는 남동생이 여럿 있었다. 어느 날 바로 아래 남동생의 자전거를 잠시 타고 나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동생은 아버지에게 쌍욕을 하며 대들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동생이 아니라 아버지를 심하게 꾸짖으셨다고 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그 자전거를 사는 데 가장 많은 돈을 보태준 사람이 바로 아버지였다는 것이다.
"그게 아직도 한으로 남는다."
아버지는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그런 이야기를 하시면서도,
"동생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냐."며 자식인 우리에게 동생들을 미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소송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동생들 가운데 한 분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연락해 조문을 가자고 하셨다. 솔직히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 뜻을 따랐다.
빈소의 공기는 차가웠다. 어릴 적 "큰아버지" 하며 따르던 사촌은 우리가 왜 이곳에 왔느냐는 듯 차가운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늦게까지 빈소를 지키며 동생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셨다.
그 뒤에도 아버지는 변하지 않으셨다. 조카들의 청첩장이 오면 함께 가자고 하셨고, 형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면 돈이라도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도 소송을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함께했던, 형편이 어려운 동생 이야기가 나오면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다."라고 하셨다. 동생들은 자신들이 해놓은 일이 있어서인지 쉽게 아버지를 찾아오지 못한다. 하지만 법으로 끝난 그 일이 아버지 마음속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법보다 더 큰 무엇인가가 아직도 형제들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올해도 아버지와 형, 그리고 나. 셋이서 할아버지 산소 벌초를 했다. 예전에는 우리가 조금 늦게 가면 아버지의 다른 형제들이 먼저 다녀간 흔적이 있었다. 벌초는 안 해 놓더라도 소주 한 병이 놓여 있거나, 담배꽁초 하나쯤은 남아 있었다. 그런 흔적만으로도 '누군가는 다녀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몇 해 째, 아무도 다녀간 흔적이 없었다. 자식을 그렇게 많이 두셨는데, 벌초를 하고 절을 하는 사람은 이제 아버지와 형, 그리고 나뿐이었다.
스무 살 무렵에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싫었다.
"너희가 주도해서 벌초를 해야지."
그 말이 왜 그렇게 부담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살아 계실 때도 하기 어려운 효도인데, 돌아가신 뒤에는 누가 찾아오겠는가.
할아버지 하관 하던 날 자녀들이 흘렸던 눈물은 분명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은 그 눈물마저 조금씩 잊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