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기 싫어

by잎새 그리고

언제부터 그랬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히 어린 시절 나는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가면, 미리 짐을 챙기고 며칠 전부터 마음은 그곳에 가 있었다. 그곳에 가면 어떤 것을 볼 수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며 밤을 지새웠던 것 같다.


삼십 대 중반까지만 해도 여행 가는 게 싫지 않았다. 특히 휴식을 위한 여행보다는 여행지를 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가보지 못한 곳을 보며, 많은 견문을 넓히는 시간이 좋았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여행은 거추장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가져갈 것을 하나하나 챙기며, 짐을 넣었다가 빼는 과정, 그리고 돌아와서 정리하는 일들이 싫어졌다.

연애할 때는 몰랐는데, 다행히 MBTI 파워 J형인 아내를 만나고 나서 그녀가 시키는 대로, 그녀 계획 대로 따라 움직이면 되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이곳저곳을 여행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싱가포르 여행은 이상할 만큼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지난 2월 비행기 표만 미리 예약해 두었을 뿐, 여행 일정과 숙소, 필요한 준비물은 대부분 아내가 도맡아 왔던 것 같다.

도서관에서 여행 바카라 두 권을 빌려오고 공항 주차를 예약한 것이 내가 준비한 전부였다.

예전 같았으면 적어도 여행 바카라을 몇 권씩 읽고 동선을 짜며 다가올 여행에 대한 준비를 하며, 조금이라도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보태었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사실 나는 무엇 하나에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성향이 있다. 과거에는 그림이 그랬고, 지금은 글이 그렇다. 최근 싱가포르 여행 일정과 맞물려서 새로 시작한 블로그(지금은 개인 서랍장이 된)와 온라인카지노에 내 관심이 더 가 있었다. 마음 한편에서는 나를 두고 아내와 아이만 다녀오면 안 될까 하는 얄팍한 생각까지 들었다.

여행이 싫어서가 아니라,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밀려오는 피곤함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긴 시간을 기다리는 일.

출국 심사대 앞에서 괜히 긴장하는 마음.

검색대를 통과할 때면 괜히 범죄자가 된 것 같은 기분.

몇 시간 동안 비행기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는 답답함.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은 몸과 더부룩한 속.

화장실에 가려고 빨간색 표시등이 꺼지기만을 기다리다가, 겨우 기회가 생기면 옆 사람에게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일.

낯선 나라에 도착하면 또 새로운 규칙을 익혀야 한다.

언어는 서툴고, 작은 부탁 하나 하는 것도 괜히 미안하다.


‘적지 않은 비용을 들이면서도 굳이 이 불편한 여행을 가야 할까?’

문득 이런 생각마저 스쳤다.


하지만, 그 불편한 생각들을 뒤로하며, 어쨌든 나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늦은 밤, 창이공항을 나와 제일 먼저 대화를 나눈 사람은 택시 기사였다.

중국계였는지 광둥식 억양이 강해 영어는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한마디만은 또렷하게 들렸다.

"Welcome to Singapore."

그 짧은 인사 한마디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낯선 도시에 도착했다는 긴장감보다 누군가 나를 반겨 준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 가족은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치고 싱가포르 박물관에 가기 위해 호텔 밖으로 나와 신호등 앞에 섰다.

길모퉁이에 하얀 조각 하나가 보였다.

가까이 보니 작은 종이 조각이었다.

'싱가포르에도 쓰레기가 있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아내에게 슬쩍 가리켰다. 아내도 ‘그러게.’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청년 한 명이 빨간불인데도 성큼 횡단보도를 건넜다.

잠시 뒤따르던 다른 사람도 그 뒤를 따라 건넜다. 바로 뒤에는 싱가포르 여행을 온 듯한 서양인 가족이 보행신호로 바뀌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들이 말했다.

"아빠, 저 사람들 봐요. 빨간불인데 그냥 건너가요."


괜스레 웃음이 났다.

세계에서 가장 깨끗하고 질서를 잘 지키는 나라 가운데 하나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호를 기다렸지만, 누군가는 그냥 길을 건넜다.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도 있고,

조금 서두르는 사람도 있다.

깨끗한 거리도 있고,

길모퉁이에 떨어진 작은 쓰레기도 있다.

그 평범한 모습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문득 여행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여행은 완벽한 세상을 찾아가는 일이 아니었다.


다른 세상을 만나는 일이면서,
그 속에서 결국 우리와 닮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사는 모습은 달라도, 그 안에서 웃고, 서두르고, 실수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생각보다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삶도 그렇다.


피곤할 것을 알면서도 새로운 길을 걷고,

불편할 것을 알면서도 낯선 사람을 만나고,

익숙하지 않은, 완벽하지 않은 하루를 살아간다.

세상에 태어났으니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여행도 마찬가지다.

좋아서만 떠나는 것이 아니다.

조금 불편하고, 조금 피곤하더라도,

다른 세상 속에서 결국 나와 닮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누가 여행을 가자고 하면 먼저 이렇게 말한다.

"싫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행을 다녀오면 다시 떠나고 싶어진다.

그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풍경 때문인지,


음식 때문인지,


아니면 그곳에서 스쳐 지나간 사람들 때문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