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 소스 고기덮밥

색다른 대파 소스

by은정

오래전 읽었던 바카라 한 권 때문에, 지금도 익숙한 거리를 지날 때면 가끔 상상을 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요시다 슈이치의 『7월 24일 거리』였던 것 같다. 바카라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고, 내용도 대부분 잊어버렸다. 하지만 내 머릿속 한 장면엔 그 소설 속 주인공의 거리가 사진처럼 찍혀있다. 글보다는 이미지로 기억하는 나의 특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 주인공은 매일 같은 거리를 같은 버스를 타고 지나간다. 매일 보던 건물과 익숙한 길을 바라보면서, 그곳이 지겨워지지 않게 하는 그녀만의 방법을 이야기했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매일 같은 풍경이 지겨워질 때면, 지금 내가 있는 곳을 여행지라고 생각해 보는 것.


단순하지만 평소에 생각해 본 적 없던 새로운 시선, 그 한 문장을 읽은 뒤부터 나도 가끔 그렇게 상상하기 시작했다. 강변북로를 오가는 출근길, 차창 밖으로 늘 지나가던 한강을 바라보다 문득 ‘여기는 내가 매일 지나가는 익숙한 곳이 아니라 캘리포니아의 한 바닷가이다’라고 상상하면 바깥의 풍경이 갑자기 달리 보인다.


익숙한 장면에서 여행의 기억을 끌어오는 것이다. 한강에 반짝반짝 비치는 윤슬을 캘리포니아 외곽 한적한 바닷가에서 보았던 윤슬과 겹쳐서 생각하면 신기하게도 이곳이 서울이 아닌 새로운 여행지처럼 느껴진다. 서울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여유로움, 서핑보드를 들고 다니던 사람들, 윤슬이 가득한 바다에서 여유롭게 서핑을 즐기시던 어르신, 저마다의 색으로 바다를 즐기던 이들. 실제 한강에는 당연히 있을 리 없는 그날의 햇살과 풍경이 내 머릿속에서 한강 물결과 겹쳐져 선명하게 펼쳐진다. 분명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매일 지나치던 서울의 한강인데, 머릿속 상상이 겹쳐지는 순간 신기하게도 이곳은 더 이상 익숙한 출근길이 아닌 낯선 여행지가 된다.


이런 상상만으로 도시의 같은 건물이 낯설어 보이고,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골목은 새삼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어느 날은 교토의 강가라고 생각해 보고, 또 자주 가던 동해 바다는 발리의 한적한 해변이라고 생각해 보라. 물론 실제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내가 타던 버스도 그대로고, 건물도 그대로고, 내일이면 또 지나게 될 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생각하고 풍경을 바라보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트이는 걸 느낄 수 있다.


이런 시선의 마법은 비단 길 위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매일 차려내는 식탁 위에서도 비슷한 상상을 하곤 한다. 늘 먹던 고기라도 무엇을 어떻게 곁들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음식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얼마 전에는 냉장고에 대파가 잔뜩 남아 있었다. 대파를 좋아하긴 하지만 한 단을 사놓고 나면 꼭 마지막쯤에 사용하지 못해 처치 곤란한 재료가 된다.


오늘은 남은 대파를 꺼내 잔뜩 썰었다. 다진 마늘을 넣고, 소금을 넣고, 간장을 조금 넣었다. 별것 없는 재료들이었다. 평소처럼 요리했으면 그냥 대파를 큼지막하게 썰어 굽고 고기를 구웠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식재료라도 오늘은 한때 유행했던 드라마 "심야식당"처럼 먹어보고 싶었다. 내가 가보지 못했고 갈 수도 없는 곳이지만 드라마에서 본 가게의 상상만으로도 충분하다.



1. 대파를 반으로 가른 뒤 잘게 썬다.

2. 다진 마늘, 레몬, 맛술, 참기름, 소금, 유즈퐁 소스를 준비한다.

(유즈퐁 소스는 집에 있어서 사용한 것, 없으면 간장, 치킨스톡 혹은 맛소금으로 충분할 듯)

3. 볼에 준비한 재료들을 한데 모아 섞는다. 이때, 세게 휘휘 저어 대파에 소스맛이 충분히 배어들도록 한다.

4. 고기를 굽는다.(목살이 있어서 사용했는데 삼겹살이 더 맛있다.)

5. 구운 고기 위에 준비한 대파소스를 넣고 한데 빠르게 볶는다.

6. 따끈한 밥 위에 구운 고기와 대파소스를 올린다.



오하요,

한 그릇 내오는 순간 드라마 속 마스터의 목소리가 귓가게 들리는 듯 하다.


늘 먹던 평범한 고기구이에 대파 소스를 한가득 끼얹었다. 알싸한 대파와 마늘 향이 달콤 짭조름하게 고기에 스며드는 순간, 늘 마주하던 우리 집 주방은 드라마 속 자그마한 식당으로 탈바꿈했다. 매일 마주하는 익숙한 식재료에 소스 하나만 더했을 뿐인데, 입안 가득 낯선 도시에 와 있는 듯한 감각이 퍼진다.


달라진 건 소스 하나, 그리고 내 마음가짐뿐이다. 하지만 그 작은 상상 덕분에 오늘 저녁의 식탁은 조금 더 특별한 여행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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