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속 마을을 찾아서 ② / 남양주 위스테이별내 이야기>
<도시 속 마을을 찾아서 ② / 남양주 위스테이별내 이야기>
공공공간에서 발견한 마을의 일상
아파트 단지를 걷다 보면 건물은 많지만 사람들이 머물 만한 장소는 의외로 적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집과 주차장, 엘리베이터와 출입구는 잘 연결되어 있지만 이웃들이 자연스럽게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공간은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의 위스테이별내는 조금 다른 공간구조를 갖고 있다. 491세대가 살아가는 이곳은 서쪽으로 불암산과 수락산을 바라보고, 동쪽으로는 덕송천이 흐른다. 주거동은 가능한 한 남향으로 배치하고, 산을 향해 시야와 바람길을 열었다. 단지의 중심에는 광장이 자리하고, 그 광장에서 이어지는 보행로를 따라 다양한 커뮤니티 시설이 들어서 있다.
이곳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아파트 건물의 배치보다 건물 사이에 만들어진 공간이다. 중앙광장과 커뮤니티 가로는 주민들이 집을 나서면서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생활의 중심부다. 아이들이 집 밖으로 나와 활동하고, 주민들이 공유시설을 찾아 이동하며, 이웃들이 오가는 공간이다. 광장은 단순히 비워놓은 공터가 아니라 주민들이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계획된 장소다. 특히 커뮤니티 시설을 단지 중앙의 보행동선과 연결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약 1,200평 규모로 계획된 공유공간에는 도서관과 공유주방, 돌봄과 교육을 위한 시설, 주민들의 문화활동을 지원하는 공간들이 마련되어 있다. 주민들은 바카라을 읽거나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온다. 아이들의 돌봄과 교육을 위해 공유시설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목적으로 집을 나선 사람들이 같은 공간을 이용한다. 그 과정에서 공간은 주민들의 일상적인 만남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동네부엌에서 이루어지는 집들이
위스테이별내에서 가장 흥미롭게 다가오는 공간은 ‘동네부엌’이다. 보통 집들이는 자신의 집으로 이웃을 초대하는 행사다. 음식을 준비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일도 개별 가정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위스테이별내에서는 동네부엌에서 집들이를 하기도 한다. 이러한 생활방식은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개별 가정의 부엌이 아니라 주민들이 함께 이용하는 공간에서 음식을 만들고 이웃을 만난다. 음식을 준비하고 식탁을 함께 사용하는 과정에서 사적인 생활의 일부가 공동체의 활동으로 확장된다.
동네부엌은 단순히 조리시설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곳이 아니다. 주민들이 서로의 생활을 알아가고, 음식을 나누며, 함께한 경험을 축적하는 장소다. 공동체는 반드시 거창한 행사나 특별한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음식을 만들고, 이웃을 초대하고, 일상의 작은 일을 나누는 과정에서도 관계가 만들어진다.
사람들이 머무는 시간이 중요하다
덴마크의 건축가이자 도시설계자인 얀 겔(Jan Gehl)은 사람들이 도시공간에서 수행하는 활동을 필수적 활동과 선택적 활동, 슬롯적 활동으로 구분했다. 출근하거나 등교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일은 생활에 필요한 활동이다. 반면 산바카라하거나 벤치에 앉아 쉬는 일은 공간이 쾌적할 때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이웃과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거나 아이들이 함께 노는 일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슬롯적 활동이다.
얀 겔은 공간의 물리적 환경이 좋아질수록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머무는 활동이 늘어나고, 그 과정에서 슬롯적 교류의 기회도 확대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위스테이별내의 중앙광장과 보행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주민들이 집을 나서고 돌아오는 일상적인 동선에 광장과 공유시설이 놓여 있다. 주민들은 필요한 일을 위해 이동하다가 다른 사람의 활동을 접하고, 공유시설을 이용하면서 이웃과 만날 기회를 얻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공간을 통과하는 사람의 숫자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곳에서 얼마나 머물고, 어떤 활동을 하며, 서로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지가 중요하다. 사람들이 오래 머무는 공간에는 관계가 형성될 기회도 많아진다.
아파트에도 앞마당이 필요하다
1976년 호주 멜버른대학교 연구진은 주택가의 앞마당과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주민들의 야외활동을 조사했다. 연구진은 거리와 연결된 앞마당에서 주민들이 정원을 가꾸고, 휴식을 취하며, 이웃과 인사를 나누는 활동이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했다. 반면 주택과 거리가 단절된 공간에서는 슬롯적 접촉의 기회가 제한되는 경향이 있었다. 앞마당은 사적인 주거공간과 공적인 거리 사이에서 주민들의 만남을 매개하는 장소였다.
위스테이별내의 중앙광장과 커뮤니티 가로를 보면서 이 연구를 떠올리게 된다. 전통적인 주택의 앞마당이 집과 동네를 연결했다면, 위스테이별내의 중앙광장과 공유시설은 개별 아파트와 공동체를 연결하는 도시형 앞마당이라고 할 수 있다. 집 밖으로 나오는 일이 곧 이웃과 만날 가능성을 넓히는 공간구조다.
좋은 장소는 네 가지 조건을 갖는다
미국의 비영리단체 공공공간 프로젝트(Project for Public Spaces, PPS)는 좋은 장소의 핵심 조건으로 접근성과 연결성, 편안함과 이미지, 이용과 활동, 슬롯적 교류를 제시한다. 사람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고 주변 생활공간과 자연스럽게 연결된 장소는 일상적인 이용의 기회를 넓힌다.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은 사람들이 머물고 싶게 만든다. 여기에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면 주민들이 반복적으로 방문할 이유가 생긴다. 이러한 이용이 쌓이면서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관계를 형성한다. 위스테이별내의 공간계획은 이러한 조건을 상당 부분 고려하고 있다.
불암산을 향해 열린 시야와 보행 중심의 동선은 쾌적한 생활환경을 지향한다. 중앙광장과 커뮤니티 가로는 주민들의 이동과 공유시설을 연결한다. 동네부엌과 도서관, 돌봄과 교육을 위한 공간은 주민들에게 집 밖으로 나올 이유를 제공한다. 실제로 위스테이별내에서는 동네부엌을 이용한 집들이뿐 아니라 주민 동아리와 가족영화제, 아빠육아데이, 자원순환과 친환경 활동 등 다양한 공동체 프로그램이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활동은 공유시설이 단순한 건축적 장치에 머물지 않고 주민들의 생활과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공유공간을 많이 만들었다고 공동체가 저절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주민들이 그 공간을 실제로 이용하고, 공동의 활동을 조직하며, 이용규칙을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건축가가 만든 공간, 주민들이 만들어가는 장소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공간을 슬롯적 관계와 실천의 산물로 이해했다. 건축가는 광장과 보행로, 공유시설을 설계한다. 그러나 그 공간에 관계와 기억을 쌓아가는 것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위스테이별내의 중앙광장과 동네부엌은 이러한 공간의 슬롯적 생산을 생각하게 한다.
처음에는 건축가가 계획한 광장이었지만 주민들이 만나고 활동하는 과정에서 공동체의 장소가 될 수 있다. 공유주방도 단순한 조리시설에서 이웃의 관계와 생활의 기억이 축적되는 동네부엌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는 특별한 순간에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사를 나누고, 함께 음식을 만들고, 아이들을 돌보며, 공동의 활동을 반복하는 일상 속에서 조금씩 형성된다. 결국 도시 속 마을을 만드는 데 중요한 것은 건물의 규모나 공유시설의 숫자만이 아니다.
좋은 공간은 사람들에게 만날 기회를 제공하고, 함께 머무는 시간은 관계를 형성하며, 반복되는 일상의 경험은 그 공간을 마을의 장소로 바꾼다. 위스테이별내의 중앙광장과 동네부엌은 아파트라는 익숙한 주거형태 안에서도 이러한 공동체적 삶을 조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건축은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사람들은 그 공간에서 함께 살아갈 마을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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