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류

내가 오래 머문 도시는 ─

by미제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특별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 일도 없어서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천장이 있었고, 출근을 하면 모니터가 있었고, 돌아오면 다시 천장이 있었다.


나쁜 일은 없었다. 좋은 일도 없었다.

매일이 매일 같았고, 나는 어제의 복사본 같았다.

언젠가부터 사람들과 있는 게 피곤했다. 그렇다고 혼자가 편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광고를 봤는지, 누가 권했는지, 아니면 그냥 내가 찾았는지 ─ 그 앞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며칠간 도시들을 돌아보려고 한다.


그냥 홀가분하게 가려고 최대한 짐을 꾸리지 않고 떠났다. 너무 무거운 것은 이제 들기 싫었다.




휘리에 도착했다.


공항이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좋은 여행은 늘 도착의 순간부터 시작되니까 그 앞은 중요하지 않았다.


거리는 환했다. 무슨 축제인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있었고 골목마다 음악이 달랐다. 색종이가 발에 밟혔다. 누군가 내 손에 작은 깃발을 쥐여주고 웃으며 지나갔다.

나도 웃었다. 웃는 게 어렵지 않았다. 여기선 다들 웃고 있었으니까.


좌판에서 뜨거운 걸 한 잔 샀다. 무슨 음료인지 이름은 못 읽었지만 김이 올라오는 게 좋았다.

한 모금 마시고 광장 쪽으로 걸었다. 축제의 한가운데 서 있는데 발이 자꾸 앞으로 갔다. 더 보고 싶은데, 더 있고 싶은데, 몸이 다음 골목으로 다음 골목으로 나를 밀었다.


좋은 걸 오래 들고 있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악단이 지나갔다.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 춤추듯 흘러갔고 나도 잠깐 섞였다. 어깨가 부딪고 웃음이 터지고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 것도 같았다. 돌아보니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다들 자기 옆 사람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 틈에서 한 박자 늦게 웃었다.


좌판 주인이 등 뒤에서 뭐라고 했다. 그새 멀어져 잘 들리지 않았다. 입 모양만 천천히 남았다.


"여긴 오래 있는 데가 아니야."


손에 든 잔을 봤다. 아직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식기는커녕 아직 뜨거웠다.

그런데 나는 이미 휘리의 끝에 서 있었다. 반나절도 되지 않았다. 신나는 곳이었는데, 분명 더 있고 싶었는데, 어느새 다음으로 떠밀려 있었다.


휘리 ─ 하고 도시 이름을 입에 올렸다. 휘리. 발음하는 사이에 벌써 지나가 버리는 소리였다.

누가 준 건지 기억에도 없는 깃발이 손에 쥐여 있었다.




느레는 비가 막 갠 참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알았다. 여긴 휘리처럼 나를 떠밀지 않는다는 걸. 오히려 발밑이 약간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젖은 흙처럼, 한 발 디디면 그만큼 빠져드는.


낮은 집들이 골목을 따라 이어졌고 처마마다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느리게 걸었다. 누구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고 누구도 비키라 하지 않았다.


그게 편했다. 편해서, 조금 쓸쓸했다.


무언가 잘못돼서가 아니었다. 그냥 가라앉는 데 익숙해지면, 떠오르는 법을 잊는다.

여기선 아무도 나를 끌어올리려 하지 않았고, 나도 그걸 바라지 않게 됐다.


작은 가게에 들어가 또 뜨거운 걸 한 잔 시켰다. 창가 자리에 앉아 골목을 봤다. 우산을 접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그중 하나가 가게 안을 들여다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가볍게 웃었다. 들어올까 말까 하는 얼굴로.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문을 밀고 들어왔고 난 바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옆 테이블에 앉은 그가 뭐라도 물어봐 주기를 기다렸다.

어디서 왔냐고, 혼자냐고, 그 정도라도.

그런데 막상 그가 "여기 사람은 아니죠?" 하고 말을 걸자, 나는 짧게 웃고는 고개만 끄덕였다.

더 말하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한 번 더 물었다. 며칠 머무느냐고.

나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기 잔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가 더 묻지 않는 게 서운했다. 그는 나가는 길에 가볍게 목례를 했고 나도 했다.

문이 닫혔다. 골목으로 사라지는 그의 등을 나는 오래 봤다. 붙잡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게 참 멋쩍었다.


다시 혼자가 되자 비로소 편안해졌다. 그 편안함이 싫었다.


창밖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떠나야 할 시간 같아 일어서려고 잔을 들었다.


다 식어 있었다. 언제 이렇게 식었지.

나는 도로 앉았다. 한 잔을 더 시켰다.

그 잔도 식었다. 또 시켰다.


창 너머 같은 골목은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가 또 어두워졌다.

며칠인지 모를 시간이 그렇게 갔다. 떠나려고 일어설 때마다 발이 바닥에 한 박자 늦게 떨어졌다.

가게 주인이 빈 잔을 치우며 지나가듯 말했다.


"여기 분위기가 참 못 일어나겠죠?"


난 대답하지 않았다. 식은 잔을 또 하나 앞에 두고 있었다.


느레 ─ 참 이 카페와 어울리는 도시 이름인 듯했다.

결국 내가 느레를 떠난 건 마음을 정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다음 도시였다.

느레는 나를 보내준 것도, 내가 빠져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느 순간 거기 없었다.


가장 오래 있었는데, 가장 기억이 흐렸다.




에리는 눈부셨다.


도착하자마자 빛이 쏟아졌다.

흰 벽, 푸른 지붕, 꽃이 늘어진 발코니.

광장 분수에서 물이 튀고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느라 멈춰 섰다. 누군가는 탄성을 질렀다. 정말 그림 같다고.

나는 그 그림을 등지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왜인지는 모른다.

그냥 그 환한 광장에 서 있는 게 견디기 어려웠다. 다들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골목은 좁고 그늘졌다. 마음에 들었다.


담배를 하나 폈다. 그러자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작은 구멍가게에서 또 뜨거운 걸 한 잔 샀다. 그늘에 서서 마셨다. 골목 끝으로 환한 광장이 액자처럼 보였다. 저기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액자를 멀찍이 두고, 한 모금씩 식기를 기다렸다.


관광객 한 무리가 길을 잘못 들어 골목으로 들어왔다.

두리번거리다 나를 보고 물었다. 광장이 어디냐고.

나는 손가락으로 왔던 길을 가리켰다. 그들은 고맙다며 종종걸음으로 빛 쪽으로 돌아갔다. 좋아 보이네.


그들이 떠난 골목에 다시 그늘만 남았다. 난 그게 좋았다.

그런데 그늘 속에 혼자 서서 식은 잔을 들고 있으니, 광장의 웃음소리가 멀리서 자꾸 들려왔다.

안 듣고 싶은데 들렸다.


골목 끝에서 새어드는 빛에 눈을 찌푸리며 담배를 하나 더 무는 나를 보고, 가게 노인이 빈 병을 정리하다 흘려가듯 말했다.


"눈부신 빛이 싫은 건지, 그걸 보는 내 눈이 싫은 건지…"


나는 못 들은 척 잔을 비웠다. 식어 있었다.

에리에선 잔이 빨리 식었다. 그늘이 차가웠으니까.


에리 ─ 어쩐지 광장의 빛과는 다르게 등이 서늘하게 되는 이름이었다.

오래 있지 않았다. 떠날 때 광장을 한 번 더 보지 않으려 일부러 반대편 골목으로 빠져나왔다.




운여는 해 질 녘이었다.


도착했을 때 하늘이 천천히 물들고 있었다. 붉지도 보랏빛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

도시는 조용했다. 어디로도 나를 떠밀거나 잡아끌지 않고, 그냥 가만히 저물고 있었다.


낮은 언덕에 집들이 기대 있었고 창마다 하나둘 불이 켜졌다. 누군가는 저녁을 짓는지 골목에 냄새가 흘렀다.

나는 언덕길을 천천히 올랐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지만 그냥 발이 위로 움직였다.


언덕 끝에 작은 의자가 하나 있었다.

누가 거기 둔 건지, 도시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였다.

나는 앉았다. 또 뜨거운 걸 한 잔 들고 있었는데, 이번엔 마시지 않고 그냥 손을 데우는 데 썼다.


해가 지는 걸 봤다.

지나온 도시들이 그 빛 어딘가에 다 섞여 있는 것 같았다.

휘리의 색종이, 느레의 젖은 골목, 에리의 그늘. 이상하게 다 한참 전 일 같았다. 분명 며칠 사이인데 아주 오래 산 사람처럼 모든 게 멀었다.


옆 의자에 누가 앉는 기척이 났다.

노인이었다. 그도 나처럼 해 지는 쪽을 보고 있었다.

둘이 말없이 한참 같은 노을을 봤다. 그가 그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해의 마지막 색이 뒤를 한 번쯤 돌아보게 해요."


나는 돌아봤다. 정말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거기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올라온 언덕길도, 지나온 도시들도. 다만, 어둑하게 가라앉은 풍경 위로 멀리 어딘가가 아직 환한 것 같았다. 처음 떠나온 자리쯤.


해가 거의 다 졌다. 손 안의 잔이 식어 있었다.

이번엔 식은 게 서운하지 않았다. 식을 만큼 있었으니까. 처음으로, 떠나고 싶지도 머물고 싶지도 않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운여 ─ 입에 올리니 끝이 길게 남는 이름이었다.

노인은 더 말이 없었다. 내가 다시 노을로 고개를 돌렸을 때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눈을 떴다.


처음엔 또 새 도시인 줄 알았다. 그런데 빛이 달랐다.

어느 도시의 빛도 아닌 차가운 형광등이었다.


낮은 천장. 흰 벽. 리클라이너.

팔걸이에는 손이 얹혀 있었고 등받이는 서서히 올라왔다.

손끝이 조금 저렸다. 오래 같은 자세로 있었던 사람처럼.


옆에 누가 앉아 있었다. 단정한 차림의 사람이 작은 의자에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어디서 본 얼굴 같았다. 노점에서였나, 창가 옆자리였나, 그늘진 구멍가게였나, 노을 진 언덕이었나.


"다녀오셨어요."


그 한마디는 어디에서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노점이었나, 창가였나, 그늘이었나, 언덕이었나.

답을 내리려다 그만뒀다.


입 안에 아직 휘리의 김이, 느레의 식은 잔이, 에리의 그늘이, 운여의 노을이 다 남아 있었다.

그게 어디였는지는, 이제 와 묻지 않기로 했다.


화면에 도시들이 있었다. 다녀온 순서 그대로.

그 옆에 머문 시간이 적혀 있었다.


휘리, 4분.
느레, 1시간 22분.
에리, 11분.
운여, 31분.


느레. 다른 도시를 다 합친 것보다 길었다.

비 갠 골목, 들어왔으면 했다가 시선을 돌린 사람, 식는 줄도 모르고 시킨 잔들. 거기 내가 그렇게 오래 있었다.


일어섰다.


로비로 가니 데스크에서 결제를 도와줬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카드를 찍 ─ 그뿐이었다.


문 밖은 그저 평범한 저녁의 아무 도시도 아닌 거리였다.

결제 문자와 함께 재방문 일정을 물어봤다. 나는 회신하지 않은 채 환한 큰길로 걸었다.

사람들은 그 큰길로 흘러갔지만. 나는 잠깐 서버렸다.


잠시,


결국 옆으로 난 좁고 어둑한 길로 접어들었다.


더 조용할 것 같아서. 어쩐지 그늘 진 거기가 편할 것 같아서.



운여 ─ 입에 올리니 끝이 길게 남는 이름이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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