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

정산되지 않는 것들

by미제


화면 안 보고 하루를 시작한 지도 오래됐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창부터 열었다. 볕이 방 안에 들어오는 각도로 날씨를 가늠하는 게 알림을 확인하는 것보다 늘 먼저였다. 바카라상 위엔 그리다 만 그림이 있었다. 어젯밤 붓을 놓은 자리 그대로 마르지 않은 채였다. 다음 붓질을 어디 놓을지는 아직 못 정했다. 못 정한 채로 며칠씩 두는 것 그게 나쁘지 않았다.


정오 무렵 오래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뭘 물은 것도 아닌데 그냥 문득 생각나서 보냈다고 했다. 나는 손으로 직접 답장을 눌러 적었다. 한 문장 쓰고 지우고 다시 썼다. 느린데 그게 당연했다.


저녁엔 고양이가 발치에 붙어 앉았다. 사료를 새로 열자 그릇에 코를 박고 정신없이 먹었다.

나는 그 옆에 쪼그려 앉아 등을 쓸었다. 손끝에 닿는 온기가 하루 중 가장 또렷한 감각이었다.


일은 있었다. 흘러들어오는 광고와 문장들을 걸러내는 일.

이상한 걸 잡아내면 값이 매겨졌고 그 값이 통장에 꽂혔다.


다들 요즘은 이렇게 산다고 했다.

굳이 나가서 육체적 노동을 하지 않아도 그냥 살아 있는 만큼 벌 수 있다고.


나는 그 말을 별생각 없이 믿었다.




그림 마감이 다가왔다. 오래 붙들고 있던 개인 작업이었다. 원래는 밑그림부터 채색까지 전부 손으로 했다.


이번엔 마감이 빠듯해서, 구도만 몇 개 뽑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냥 참고용으로.

나온 안들을 훑어봤다. 눈에 들어온 하나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았다. 조금 손봐서 그대로 썼다.


다음 그림에서도 똑같이 했다. 이번엔 구도 말고 색감도 물어봤다. 이유를 대자면 얼마든지 있었다.

시간이 없어서, 마침 손이 느려서, 어차피 방향만 잡아주는 거니까.

좋은 도구를 두고 굳이 돌아가는 것도 미련한 일이었다.

원하는 그림이 나오기만 하면 됐지 ─


붓을 쥐는 시간이 조금씩 줄었다. 대신 화면 앞에 앉아 나온 것들을 고르는 시간이 늘었다.

고르는 것도 만드는 것 아니냐고,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럴듯한 답이 금방 나왔다.

화가들도 옛날부터 제자를 시켜 밑작업을 맡기지 않았나 ─ 이것도 그런 것뿐이라고.


그날 밤 값을 확인했다. 그림 하나가 다른 그림의 액수보다 유난히 컸다.

유독 그 그림, 색을 고르다 몇 번이나 손을 멈췄던 그림이었다.




친구가 답장을 보내왔다. 요즘 힘든 일이 있다고 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길게 적어 보냈다.

문장 중간중간 앞뒤가 안 맞는 데도 있었다. 급하게 쓴 티가 났다.


나는 답장 버튼을 눌렀다. 뭐라고 써야 할지 잠깐 생각했다. 그러기도 전에 화면 위로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지금 상황에 맞는 답변을 추천해 드릴까요.


눌러봤다.


위로의 말이 그럴듯하게 나왔다. 내가 쓰려던 것보다 매끄러웠다. 어디가 힘들었는지, 뭐라고 답해야 할지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커서가 그 자리에서 잠깐, 맥박처럼 깜빡였다.


보낼지 말지, 아주 짧게.

그러다 보냈다.


잠시 후 알림이 떴다.

이번 대화, 예상보다 높은 값이 매겨졌다. 평소보다 배가 넘는 액수였다.


이상했다. 그냥 안부 문자였는데, 내 손을 거치지도 않은 말인데.

화면을 한 번 더 들여다봤지만 이유는 적혀 있지 않았다.




며칠 뒤, 그 알림이 문득 다시 떠올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채로 밖으로 나갔다.

딱히 갈 곳은 없었다. 지하철엔 사람이 가득했다.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손끝만 움직이는 사람들.


문장이나 광고 같은 것들이 화면 위로 스쳐 지나갈 때마다, 표정 하나 안 바뀐 채 손가락만 옆으로 넘어갔다.

나와 똑같은 동작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도, 그 옆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각자의 화면 앞에서 같은 속도로, 같은 무표정으로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옆자리 사람이 뭔가를 눌렀다 지우는게 곁눈에 스쳤다.

나랑 비슷한 리듬이었다.


다들 이렇게 사는구나.

나는 그걸 보고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그 생각이 들자 아까의 이상한 기분은 금세 가라앉았다. 몇 정거장을 더 가는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났다.


걸러야 할 문장들은 매일 비슷한 양으로 쌓였다.

그림은 이제 손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원하는 걸 말로 설명하면 됐다. 조금 더 따뜻하게, 조금 더 쓸쓸하게.

그러면 알아서 나왔다.


한 번은 오래전에 그리다 만 그림을 다시 꺼냈다. 마르지 않은 채로 몇 달을 그대로였던 것.

물감은 이미 굳어 딱딱했다. 무엇을 그리려던 건지 기억나지 않았다.


붓을 쥐어봤다. 손에 익지 않았다.

몇 번 그어봤지만 선이 자꾸 어긋났다. 예전엔 눈 감고도 그을 수 있던 선이었다.


그냥 설명하는 게 빨랐다.

무슨 색을 좋아했더라─그 질문에 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예전엔 늘 정해져 있던 것 같은데.


답이 나오지 않아 그냥 아무거나 골라 입력했다.

값은 꾸준히 들어왔지만 그만큼 예전만 못한 금액이었다. 그림값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했다.




친구가 또 연락을 해왔다. 이번엔 좋은 일이 있다고 했다. 메시지가 길었다. 세어보지 않아도 평소보다 훨씬 길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화면 위로 문장이 떠올랐다. 손가락이 그 위에 잠깐 얹혔다가, 곧바로 눌렀다. 나온 말을 그대로 보냈다.

축하한다는 말이었던 것 같다. 끝에 물음표가 있었는지 느낌표가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전화를 걸었을 일이었다.

목소리로 축하하고, 언제 밥 한번 먹자고 하고. 그런 절차들이 이제는 다 생략됐다.


생략됐다는 것도 딱히 아쉽지 않았다. 무슨 좋은 일이었는지는 다 읽지 않았다. 스크롤을 몇 번 내리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췄는지도 몰랐다.


그날 값은 평소보다 낮았다. 숫자를 한 번 보고 화면을 껐다.


그런가 보다 했다.




고양이가 늙었다는 걸 요즘 들어 알았다.

걸음이 느려졌고, 밥을 먹다가도 자주 멈췄다. 예전엔 그릇이 채워지는 소리만 나도 달려오던 녀석이었다.


그날은 평소보다 오래 곁에 앉아 있었다. 하던 일은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등을 쓸었다.

털 사이로 뼈가 만져질 만큼 야위어 있었다.


손끝에 닿는 온기가, 오랜만에, 또렷했다.


그르릉거리는 소리에 맞춰 숨이 천천히 풀렸다.


화면 쪽은 보지 않았다. 그저 그 리듬에만 몸을 맡기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모른다. 창밖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일어났다.


다음 날 값을 확인했다. 낯선 항목이 하나 떠 있었다.

액수가 적지 않았다. 무엇에 붙은 값인지 적혀 있지 않았다.


고양이가 갑자기 울었다. 평소와 다른 소리였다.

몸을 낮추고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손이 멈췄다. 아주 잠깐, 문장을 넘기던 손가락 하나가.


몸 안 어딘가에서 무언가 솟구쳤다.


오래전엔 이런 순간에 소리를 지르거나, 벌떡 일어나거나, 뭐라도 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 솟구침이 손끝까지 오는 동안 다 잦아들어 있었다.


남은 건 반 박자 늦은 손가락 하나였다.


화면 구석에 짧게 떴다.

감정 반응 감지. 임계값 미달. 정산 제외.


문장을 마저 넘겼다.

고양이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13.값1.png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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