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근무

채우러 온 자리

by미제


회사는 인간을 일정 비율 고용해야 한다.

법이 그렇게 정해두었다.

전체 근무 인원의 몇 퍼센트는 반드시 사람이어야 한다고.


오래전 로봇이 일을 다 가져가던 무렵에 생긴 법이었다.

사람이 설 자리가 아주 없어지면 안 된다는 취지였다고 하는데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다.


단지 비율이라는 숫자만 남았다. 덕분에 그가 출근한다.




칠 층 사무실에는 자리가 예순몇 개 있고, 그중 사람이 앉는 자리는 넷이다.

나머지는 로봇이 앉는다. 사실 앉는다기보다 놓여있다.


매끈한 몸체가 바카라상마다 하나씩 붙어 있고, 어딘가 먼 데서 AI가 그것들을 원격으로 움직인다.

손이 필요한 일은 로봇이 하고 나머지는 화면 안에서 처리된다.


사람 넷은 저마다 자리가 있었다.

다들 규정이 사람을 요구하는 자리였다.


한 사람은 로그를 봤다.

로봇들이 남긴 기록을 사람이 한 번 더 확인하는 자리였다.

규정상 최종 점검은 사람이 해야 했으니까.

매일 로그를 넘겼고 에러를 발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 사람은 민원 창구에 앉았다.

사람 상대하는 일은 사람이 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창구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하루 종일 빈 창구를 지켰다.


한 사람은 서류를 승인했다.

AI가 다 처리한 결재의 최종란에 사람 서명이 있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도장을 찍었다.

내용을 읽지는 않았다. 읽어도 바꿀 수 있는 게 없었다.

완벽하기도 했지만.


그리고 그가 있었다.


그는 매일 방문객 명단에 서명했다.

출입은 이미 센서와 로봇이 다 인식하고 기록해 두었지만, 사람의 확인 서명이 하나 있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로봇들이 원격으로 다 처리하는 사무실에 외부인이 올 일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날은 "방문 없음" 칸에 서명했다.

방문이 없다는 걸 그가 서명으로 증명했다.


회의는 넷이 돌아가며 들어갔다. 이번 분기는 그의 차례.


이름은 있지만 여기서 불릴 일은 거의 없었다.

로봇들은 서로를 부르지 않고 사람 넷도 말이 없었다.




오전 열 시에 주간 회의가 있다.

회의실에 사람은 그만 들어간다. 다른 자리는 화면이다.

벽면 가득한 화면 속에서 AI들이 회의를 한다.


안건이 뜨고, 의견이 오가고, 결정이 난다. 사람의 말보다 몇 배는 더 빠르게.

그가 한 문장을 이해할 동안 세 개의 결정이 지나간다.


회의 내내 앉아만 있는다. 발언하지 않는다.

발언하라고 요구받지도 않는다.

회의록에 이름이 참석자로 올라가면 그걸로 그의 몫은 끝난다.


인간 참석 비율.

그 칸을 채우는 게 인간이 회의실에 있는 이유다.


가끔 화면 속 AI가 그를 향해 짧게 묻는다.

이견 있으십니까.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미제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무력 앞의 인간이 무엇으로 남는지 묻습니다. 증명되지 않은 인간이 무엇으로 남는지 묻습니다. 답은 매듭짓지 않습니다. 미제(未濟), 풀리지 않은 채로 ─

61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5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10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12화렌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