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가리고 있는 '진짜 공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깐 정리를 하자. 앞서 다룬 세 가지 위기는 학습자의 생활과 학습 환경을 중심으로, AI와 스마트 기기의 대폭 확장과 그로 인한 관계와 정서, 교육 경험의 문제를 다룬다. 이 과정은 파도에 모래성이 휩쓸리듯 일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소유격차를 극복하기 위해 가정에서는 허리 띠를 졸라매며 아이들의 기기를 사주고 할부 지출을 지속한다. 아이들은 스스로 스마트폰을 멀리하고, 자기 손으로 무언가 해보고자 시도하기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I 혁명이 가한 충격에서 학습자의 인지적 위기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부모의 노력, 교사의 노력, 아이 스스로의 노력이 이어져도 코로나 감염병이 만들어놓은 구조와 AI의 편의성이라는 충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어려운 형편에 스마트폰과 무제한 요금제를 가입해주면, 그 다음은? 각종 GPT와 학습지원 서비스의 비싼 요금제를 감당할 수 있는 집과 감당하지 못하는 집으로 또 나뉘게 된다. AI를 적극 활용하는 종합관리를 지원하는 사교육 기관에 아이를 보내는 가정과, 단순히 수업만 듣는데에도 힘에 부치는 가정이 존재한다. 국어, 영어, 수학 세과목만 들어도 부모가 쓰는 한달 용돈의 서너배를 넘어간다.
혁명적 변화는, 그것을 벗어나거나 거부하기기 어렵기 때문에 혁명적이라 불리는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표준이 된 스마트 학습 체계, 그것을 파고든 AI의 놀라운 영향력에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저항하고 있지만 실제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충격은 모래성을 쓸어가는 파도를 넘어서 거대한 쓰나미처럼 우리를 덮치고 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교육의 가장 핵심 경로인 학교교육이 자리한다. 교사와 학교는 저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만 이중의 충격이 교사의 실천을, 학교의 영향력을 넘어서서 아이들의 학습을 완전히 변화시키고 있다. 최선을 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닥치고 있는 위기. 우리는 어떻게 이에 적응해야 할까?
"기출이라 교재 너무 어려운데. 패러다임이 뭔지 어떻게 설명하지?"
"아...패러다임. 그 바카라을 쓴 사람도 패러다임에 대해서 개념 설명을 제대로 못해서 까였어요. 우리가 설명하려면 어렵죠."
고등학교 2학년 교실. 영어 수업을 준비하며 다른 선생님과 대화를 나눴다. 수능을 1년 앞으로 남긴 시점이니, 수업은 EBS 기출모의고사 교재를 활용한다. 그런데 이 교재가 당연히 매우 어렵다. 특히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고, 문맥추론을 해야 하는 문제들이 몇개 챕터를 이어가는데 이에 대해서 교사는 상당한 설명의 부담을 느끼게 된다.
빼곡하게 교재에 메모를 하고, 포스트잇을 붙이던 선생님의 푸념에 나는 허허 웃고 말았지만, 나 역시 학생들의 학력저하(인식적 위기!) 속에서 이런 개념을 이해시키는 것에 시간 투자를 많이 하고 있던 판이라 수업 조건이 아쉬운 것은 매 한가지다. 패러다임이란 용어를 제창한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바카라을 읽도록 권하다보면, 진도를 나갈 시간이 부족하니까.
이 대화가 있고 며칠 뒤, 우리반 아이들이 점심시간에 모여서 수다를 떠는 것에 가서 공부 좀 하라고 핀잔을 주다가, 한 아이의 학원 교재를 보았다. 그리고, 상당히 놀랐다. AI를 통해 이 추상적 개념들을 4컷 만화로 소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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