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2
내가 칠판 위에 적어 내려간 문장들이
그대의 영혼을 옥죄는 밧줄이었음을 이제야 압니다
빛을 보여주겠다는 명목으로 그대 앞에 서서
실상은 그대가 스스로 걸어야 할 그림자마저
나의 권위로 지워버린 것은 아니었는지요
강단에 서서 삶과 성숙을 가르치던 나의 혀는
그대의 상처를 도려내어 나의 유능함을 증명하는 칼날이었습니다
지혜라는 이름의 허울 좋은 외투를 입혀두고
그 안에서 그대의 숨이 막혀가는 소리를
나는 그저 배움의 과정이라며 기만했습니다
이제 그대가 보낸 마지막 적막은
내가 끝내 채점하지 못한 가장 시린 시험지입니다
여느때가 그렇듯
배움이 끝나는 때는 배움을 거절하는 순간임을 압니다
더는 나를 해석하려 하지 마라는 그 명확한 마침표 앞에서
내가 쌓아 올린 지식의 성벽은 무너져 내리고
나는 비로소
내가 가장 가르칠 자격 없는
비겁한 낙제생이었음을 고백합니다
나의 오만이 그대의 긴 계절을 얼룩지게 했음을
나의 가르침이 그대의 세상을 폐허로 만들었음을
이 비통한 확인을 나의 마지막 교재로 삼아
나는 이제 낡은 교실의 불을 끄고 강단을 떠납니다
오랜 교과서에는 먼지가 쌓일 것이니
나의 오만이 그대의 벌판을 태웠음을 인정하며 나는 기꺼이 그대의 생에서 지워진 이름이 되려합니다
더는 당신의 삶에 주석을 달지 않겠습니다
더는 당신의 슬픔을 나의 언어로 재단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당신이 없는 세상에서 당신이 온전히 당신으로 숨 쉬길
멀리서 침묵으로 빌어줄 뿐입니다
그래도 살면서 딱 한 번
누군가가 간절히 필요한데 세상천지 아무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때 딱 한 번만 나를 찾아오십시오
살다가 딱 한 번
세상천지 발붙일 곳 없어 온몸에 서리가 내리는 밤
누구의 이름도 떠오르지 않아 스스로가 유령처럼 느껴질 때
그때 딱 한 번만
이곳을 기억하십시오
내 여전히 당신을 가르칠 권위는 남아있지 않으나
당신이 무너뜨린 성벽의 폐허에 깔려
말 없이 곁을 지킬 한 줌의 의자는
남겨두고 기다리겠습니다
무너진 성벽에 증인이 될 단 한 명의 죄인으로
나는 이곳에서 화석처럼 늙어가고 있겠습니다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당신이 가장 추운 날
돌아올 곳이 있다는 안도감 하나만
내게서 훔쳐 가십시오
당신의 다정에 인사드립니다
안녕히
내가 끝내 올바르게 이끌지 못한 나의 가장 아픈 사랑
그리고 실패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