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8
내 생은 오래전 누군가 읽다 멈춘 문장 속에 갇혀 있다 녹슨 셔터가 내려앉은 거리, 서늘한 서가의 구석에서 나는 곰팡이 핀 기억들을 낱장으로 뱉어내며 기다림보다 먼저 도착한 먼지들을 견디고 있다, 바카라등은 꺾여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각도로 굳었고 표지의 금박은 가난한 햇빛 아래 치욕처럼 벗겨진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필적들이 행간마다 침입하여 나의 고독을 멋대로 재단하고 밑줄을 긋고 지나갔다
누군가 읽다 멈춘 단락은 이제 흉터가 되었다 먼지 낀 조명 아래, 펼쳐진 내처럼 속살을 가리지 못한 채 누워 있는 시간들 나는 너무 오래 열려 있어 비릿한 잉크 냄새를 풍긴다, 기다림은 더 이상 빛나는 약속이 아니다, 바랜 종이 위로 쏟아지는 무관심의 시선들이 행간마다 가느다란 균열을 내며 지나갈 때 나는 꺾인 등뼈를 곧게 펴고 비로소 어둠이 되고 싶다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누군가 지나가던 손길이라도 이 부끄러운 고백을 무심하게 덮어주길 바란다, 펼쳐진 그대로 박제된 나의 치욕과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문장들을 절망의 품으로 거두어주길, 셔터 내려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나는 여태껏 덮이지 못한 채, 마지막 페이지의 서늘한 여백만을 하얗게 응시하고 있다 누군가 나를 닫아주어야 나의 밤도 비로소 시작될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