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까르푸에 가자고 하셨다

어떤 후회

by클로드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기억이 정체성이고 정체성이 기억이지만, 어떤 절대적인 맥락에서 어떤 정체성은 아무리 경첩이 떨어져 나가고, 아무리 닻을 제대로 내리지 못한 상태라 해도 살아남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많은 부분이 "공간에, 텅 빈 공간에" 살고 있어도, 아무리 알아볼 수 없어도, 그것은 여전히 있다, 심지어 기억이 사라진 뒤라도."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이 문장을 읽으며 노쇠하여 자신을 잃어가시던 나의 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외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뵌 건 작년 어버이날 즈음이었다. 증손주를 바라보며 활짝 웃으셨지만 잘 듣지 못하셨고, 말씀 또한 알아듣기 어려웠다. 오랜 세월 집안을 이끌어오시던 그였지만 뵐 때마다 외할아버지의 눈빛은 점점 초점을 오래 붙들 기 어려운 듯 보였다.


그럴수록 나는 그 너머의 함께 채운 시간이 떠올랐다. 수건 공장을 운영하시던 외할아버지, 작업실에서 수건에 인쇄할 글자의 본을 정교하게 떠내고 마당에서 삼촌들과 힘차게 일하시던 모습. 내 눈앞의 외할아버지는 식사를 하시는 것 외에 많은 것들이 비어 가는 것처럼 보였고, 과거 당신의 전성기를 기억하지 못하시는 듯 보였지만, 내 마음에서 만큼은 여전히 그때의 그로 계셨다.


외할아버지는 작년 가을에 돌아가셨다. 이로써 나의 모든 조부모님들이 하늘나라에 계신다.




친할머니를 떠나보낸 건 그보다 더 오래전, 내가 스무 살이 되자마자였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하다. 내내 함께 살았고, 그만큼 내내 엄마가 고생하시는 걸 보며 컸다. 어린 마음에도 그게 보였는지 일곱 살 때 할머니 앞에서 대놓고 할머니와 살기 싫다고 말해버렸다. 할머니 없이 우리 네 식구만 살면 더 행복할 것 같았다. 그날 나는 아빠에게 기억에 남을 정도로 호되게 혼이 났다.


그래도 할머니는 늘 나와 동생에게 만큼은 사랑만 주셨다. 서울 고모네 다녀오실 때마다 예쁜 원피스를 나란히 두 벌 사 오셨다. 도넛을 튀겨주시고 생강 쿠키를 구워주셨다. 잠이 쏟아지셔도 우리들의 성화에 옛날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함께 재우셨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꿈나라를 오가는데, "할머니, 그거 아니야." 하고는 콩쥐팥쥐 이야기를 정정하며 마저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나였다.


할머니의 화장대에는 언제나 신기한 물건이 많았다. 손톱을 다듬는 도구는 정말 왕자님의 장난감 칼처럼 생겨서 종종 몰래 가져다가 인형놀이에 쓰곤 했다. 펼치면 붓으로 그린듯한 새 그림이 나오는 접이식 부채도 너무 좋아해서 닳도록 펼치며 놀았다. 그래도 한 번도 할머니에게 잔소리나 싫은 내색을 들은 기억이 없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 할머니는 급속도로 거동이 불편해지셨다. 지팡이나 부축 없이는 걸을 수 없게 되셨다. 서울을 자주 오가시고, 친구분들과 외국 여행도 다녀오셨던 할머니는 나와 동생방 의자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곤 하셨다. 한참을 가만히. 어쩌면 내가 말 붙이기를 기다리셨을지도.


"요 앞에 생긴 까르푸, 거기 같이 가볼래?"

할머니가 물으셨다. 얼마 전 집에서 15분 거리에 처음 보는 모습의 커다란 마트 건물이 생겼다. 건물에 큼지막하게 붙은 마크도 이름도 이상했다. 까르푸. 프랑스 마트라고 했다. 기존에 알던 마트와는 다른 창고식 마트고 외국 과자며 물건이 엄청 많다고 했다.


할머니에게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방에는 창문 앞에 할머니, 그리고 바카라상 앞에 앉은 내가 있었고, 나는... 나는 가고 싶지가 않았다. 이국적인 느낌이 풍겨오는 그곳을 선뜻 가는 게 망설여졌다. 더 솔직히는 그런 낯설고도 멋진 곳에 할머니를 부축하며 가고 싶지 않았다.


그 후 할머니가 까르푸에 가 보셨는지 잘 모르겠다. 기억에 없다. 내가 기억하는 거라곤 그날 방에서 할머니가 내게 건넨 그 질문과 지금껏 내내 죄송한 내 마음이다.




지난주에 오랜만에 친정에 다녀왔다. 차를 타고 가다가 까르푸가 있던 자리가 공사 중인 모습을 보았다. 어릴 적 그 까르푸는 이후 홈플러스가 되었고, 지금은 주상복합으로 변모 중이다. 이제 더 이상 그 마트 건물은 없다. 빨강 파랑의 강렬한 그 마크와 함께 할머니가 떠올랐다.


한 번 갈걸, 할머니 질문에 그러자고 시원스레 대답할걸. 어느 겨울 할머니를 부축하며 느릿느릿 걷던 날 추운 티를 내지 말 걸. 일곱 살 때 같이 살기 싫다고 말하지 말 걸. 한번 더 웃어드리고, 한마디라도 더 붙임성 있게 말할걸. 힘을 잃어가는 할머니의 눈을 피할게 아니라 내가 더 힘주어 봐 드릴걸. 점점 작아지는 할머니지만 여전히 할머니임을 잊지 말걸.


후회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쏟아져나왔다. 할머니가 잊어가고 잃어가는 게 많더라도 내가 다 기억하며 바라봐드릴걸 그랬다. 마주한 나마저 할머니를 잃어가지 말 걸 그랬다. 돌아가신 지 한참이 지나서야 철이 든 나는 뒤늦게 할머니를 선명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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