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낭만으로 돌아오다
“쌤. 요새 종이바카라 읽는 애들 거의 없어요.” …
그래도 나는 안다. 그들이 언젠가 그 바카라을 펼치리라는 것을. 만난 적 없는 다른 사람이 그리워서,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그리워서, 어느 날 바카라으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갈등하는 눈동자> / 이슬아 에세이
6개월의 휴직을 마치고 복직을 하며 체감하는 슬픔 중 하나는 바로 바카라 읽는 시간이 현저히 줄었다는 것이다. 복직 첫 주에는 피곤하고 정신없이 바빠서 바카라을 펼치지 못한 날들이 수두룩했다. 바카라에 대한 목마름이 커져가던 중 방법을 생각하다가 출퇴근길에 오디오북을 듣기로 했다. 목록을 살펴보다 즉흥적으로 택한 바카라은 바로 이것, <프로젝트 헤일메리>이다. 영화가 흥행했고, 영화보다 원작인 소설이 더 재미있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왔지만 나는 둘 다 건너뛰고 듣는 독서로 이 바카라을 만나게 되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SF 영화라는 점, 우정을 다룬 감동적인 영화라는 것. 아, 한 가지 더. 바카라의 앞부분에 과학적인 내용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라이언 고슬링이 나오지만 극 중 그의 역할과 직업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 바카라을 듣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잊고 살던 무언가로 돌아감을 느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과학이었다.
바카라 속 주인공은 과학 선생님이다. 지구를 구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맡아 우주선에 탑승해 있고, 스스로 중력 가속도 따위를 계산하고 있다. 현미경으로 우주 생명체를 관찰한다. 질량분석기, 원심 분리기, 진자 운동, 세포소기관… 이 단어들을 만날 때마다 잠자고 있던 내 감각의 어딘가가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과학을 좋아하던 10대, 대학 3학년부터 여태껏 계속되어 온 실험실 생활. 나는 과학을 전공하고 업으로 삼고 있다.
나의 고향 대전은 과학의 도시로 불리기도 한다. 그 덕에 국립중앙과학관을 유치원 때부터 여러 차례 견학 가기도 했다. 진자 운동을 들으면 그곳에서 본 기다란 줄 끝에 매달린 추가 그리던 포물선이 떠오른다. 로봇 팔이 그려주는 그림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때가 떠오른다. 어두운 전시실에서 빛나던 태양의 모형이 떠오른다.
중학교 때의 일이다. 시험기간 독서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자리를 몰랐지만 왠지 별자리처럼 보이는 하늘의 그림을 발견했다. 매일같이 그 별들을 올려다보았고, 머지않아 과학시간에 그것이 오리온자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새 내 꿈은 천문우주과학자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한참 수업시간에 우주 이야기를 해주시던 선생님의 말씀 때문에. 돈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하셨다. 나는 단번에 그 꿈을 버렸다. 이제와 문득 드는 생각, 혹시 선생님도 한때 그 꿈을 꾸셨던 건 아닐까? 포기했던 그 마음이 떠올라 아련히 하신 말씀이 아닐까?
생명공학을 전공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고등학교 생물 선생님 덕분이었다. 칠판 가득 그려주시는 식물의 기관, 우리 몸속 순환들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림을 좋아하던 나는 그림으로 보여주는 그 과학에 매료되었다. 무엇보다 살아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앞으로 한 버스가 지나갔다. 버스에는 '생명공학연구원'이라고 적혀있었다. 대전에 있는 연구소 통근버스였다. 마음이 두근거렸다. 이런 곳이 있구나! 저기를 가야겠다!
중간에 잠시 다른 꿈을 꾸었지만 나는 결국 생명공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생명공학연구원에 지원하지는 않았다. 빠르게 산업적으로 쓸 수 있는 과학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기업 연구소에 취직을 했다. 그리고 좋아하던 과학은 다른 무언가로 대체되었다. 고객 솔루션, 제품화, 성과. 사업적 목표를 향한 배에 올라타 앞만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답을 정해놓은 목표를 바라보며 과학을 수단으로 삼았다.
그래서 자주 잊곤 했다. 내가 과학에서 무엇을 좋아했는지, 왜 좋아했는지를 말이다. 때때로 느꼈던 과학적 감각과 희열을 잊었다. 실험실은 생계를 위한 일터가 되었고, 나는 달콤한 휴직 뒤 돌아가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워킹맘이 되었다. 순수하게 좋아하던 마음에 온갖 이유를 휘두른 의무감만이 존재했다.
그랬던 내가 출근길 차 속에서 어떤 감각들이 깨어남을 느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들으면서. 그 속에 나오는 과학자가 우주선에서 물체를 떨어뜨리며 중력 가속도를 계산하고,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밝혀가는 대목에서. 그리고 실험실에서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각종 실험 기기로 먼지처럼 작은 우주 생명체의 정체를 탐구해 가는 장면에서. 아는 용어, 익숙한 장면들이 반가웠다. 잘 알지 못하는 우주, 물리 분야의 장면들도 반가웠다. 몰라도 감각적으로 감이 오고 그림이 그려졌다. 그러고 보니 나는 생물을 전공했지만 지구과학을 사랑하기도 했고, 물리를 제법 잘했다. 화학만이 정 붙이지 못한 과학이었다. 10대 시절 좋아하던 무언가를 퇴적층 깊숙한 곳에서 다시 발견한듯한 그런 기분! 이 바카라을 통해 잊었던 과학 소녀를 만났다.
몇 년 전부터 바카라을 좋아하게 되기 시작하면서 문학을 집중적으로 탐독했다. 지금까지 내 삶과는 거리가 먼 분야였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채우지 못한 부분을 채우는 기분이었고, 가지 못한 길을 걷는 설렘을 느꼈다. 바카라으로 만나는 세상은 내 경험, 현실 바깥의 새로운 세상이길 바랐다. 그래서 실용서, 과학도서를 모른 체 했다.
그런데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통해 살짝 외면했던 무언가를 다시 찾게 된 것이다. 어쩌면 그리웠던 것일까? 그리운 줄 모르며 그리워했던 것일까? 현상을 탐구하고 새로운 것을 밝히며 느끼던 감각을. 어릴 적 한때 품었던 우주 과학의 꿈을. 이 바카라을 들으며 나는 다시 과학의 매력, 과학을 통해 세상을 알아가는 기쁨을 느꼈다.
어쩌면 이 바카라은 한동안 잊고 있었던, 때로는 외면하고 싶었던 오래전 무언가로 나를 불러들였는지도 모르겠다. 낭만의 시간은 뒤로 한채 다시 현실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 시기에, 문학에 빠져 살던 시간은 줄고 다시 실험실로 돌아가는 이 시기에 잊었던 내 마음을 다시 떠올려주었다. 사실 낭만은 여기에도 있었다고. 이 또한 나의 오랜 낭만이라고 말이다.
바카라은 역시 그런 것일까! 나를 만나는 일, 그리워한 줄도 몰랐던 나를 다시 만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