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비야와 도쿄 미드타운 히비야
메이지생명관에서 해자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오른편으로는 황거의 돌담과 물이, 왼편으로는 무게감 있는 석조 건물들이 이어진다. 그 건물들 가운데 화강암으로 마감한 육중한 건물 하나가 있다. 1938년에 지어진 다이이치생명관(第一生命館)이다. 전쟁이 끝난 1945년 9월, 연합국군 총사령부(GHQ)가 이 건물을 접수했고 1952년 7월까지 본부로 썼다. 앞 편에서 메이지생명관의 회의실을 찾아오던 맥아더의 집무실이 있던 곳이 바로 여기다. 그 집무실은 지금도 건물 안에 남아 있지만, 평소에는 들어가 볼 수 없다. 1995년 이 건물은 옛 모습을 남긴 채 뒤편으로 초고층 타워를 올렸는데, 메이지생명관보다 한발 앞서 보존과 개발을 한 필지에 담은 사례였다.
히비야 교차로에 서서 해자 쪽을 돌아보면, 해자 변 건물들의 낮은 부분이 나카도리에서 보았던 그 익숙한 높이에서 가지런히 줄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그 줄이 끝나는 곳에서 갑자기 숲이 시작된다. 업무지구는 여기서 끝난다.
교차로 한편에 선 안내 지도 앞에 멈춰 섰다. 지도의 북쪽 끝은 오테마치, 그 아래가 마루노우치, 남쪽 끝에 유라쿠초와 히비야가 나란히 붙어 있다. 오테마치와 마루노우치가 일하는 동네라면, 유라쿠초는 먹고 마시며 노는 동네다. 유라쿠초를 지나 이 길을 곧장 따라가면 긴자 4초메 교차로에 닿는다. 지도 위에서 도시는 일하는 곳에서 노는 곳으로 한 동네씩 넘어간다. 그렇다면 그 경계에 선 히비야에는 무엇이 있을까.
교차로 건너편의 숲은 히비야 공원(日比谷公園)이다. 1903년 6월에 문을 연 이 공원은 일본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다. 군의 훈련장으로 쓰이던 땅이 시민의 공원으로 바뀐 것이다. 마루노우치가 아직 벽돌 사무소 몇 채뿐이던 시절, 이 도시는 업무지구보다 먼저 공원을 가졌다. 교차로를 건너 곧장 건물로 들어가느라 그날 공원에는 한 발도 들이지 못했다. 숲은 길 건너에서 바라본 풍경으로 남았다.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공원 주변의 풍경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숲은 같은 자리를 지켰다. 빌딩 숲 사이에서 진짜 숲을 마주하는 풍경은 이 도시가 오래전에 남겨 둔 여백 덕분이다.
공원 건너편으로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극장의 거리다. 메이지 말, 재계 인사들이 돈을 모아 세운 서양식 극장 제국극장(帝国劇場)이 문을 열었고, 1930년대에는 다카라즈카 극장(宝塚劇場)과 영화관들이 잇달아 들어서면서 히비야는 영화와 연극의 거리로 불리기 시작했다.
해자 변의 차분한 공기는 이쪽으로 넘어오는 순간 끝난다. 주말의 히비야와 유라쿠초 일대는 정신이 없을 만큼 사람이 많았다. 히비야 교차로의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길 끝 고가 다리 위로 기차가 지나갔고, 그 아래로 인파가 쏟아지듯 길을 건넜다. 그 소란 속에서 다시 한번 도쿄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서울로 치면 홍대 앞 동교동 언저리의 공기와 닮았다. 그런데 결이 다르다. 홍대가 업무지구와 멀찍이 떨어진 채 따로 자란 동네라면, 이곳은 오피스 빌딩가와 공원 사이에 바로 붙어 있다.
극장의 거리는 지금도 변하는 중이다. 오랫동안 이 거리의 얼굴이던 제국극장은 2025년 2월 문을 닫고, 세 번째 건물로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극장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지킨 채 모습을 바꾼다. 일하는 사람들의 거리 바로 옆에서, 저녁이면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이 길을 채운다.
숲과 빌딩가 사이의 이 간극은 도쿄도도 고민해 온 문제다. 2021년 세운 히비야 공원 재생 계획은 넓은 도로와 펜스 때문에 공원에 다가가기 어렵고, 공원 안팎이 서로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먼저 짚었다. 개원 130주년이 되는 2033년까지 공원을 단계적으로 고치고, 주변 거리와 공원을 데크로 잇는다는 계획이다. 공원 남쪽에서는 민간 기업들이 도로 위로 공원과 거리를 잇는 대규모 개발을 구상하고 있다. 지금 도쿄는 업무지구의 가장자리를 도시 안쪽으로 조금 더 끌어당기려 하고 있다. 교차로 한쪽에는 그 구상들보다 앞선 2018년, 공원의 풍경과 극장가의 성격을 건물 안에 들여놓은 곳이 있다.
교차로 한쪽의 그 건물은 공원을 향해 몸을 비튼 듯한 유리 타워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 파크뷰 가든에 나서자 황거의 숲과 오테마치의 고층 빌딩들이 한 화면에 펼쳐졌다. 낮게 누운 초록과 그 너머로 솟은 업무지구의 스카이라인. 도심의 스케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 서너 시, 테라스의 카페에는 그 풍경을 보며 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궁궐과 업무지구가 마주 보는 풍경은 서울에도 있다. 다만 이곳에서는 황거의 녹지가 끝나는 선을 따라 빌딩들이 나란히 서 있어 초록과 빌딩의 경계가 한결 또렷하게 정돈되어 보였다.
길 건너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히비야 공원의 숲도 이 테라스에서는 발아래 한눈에 들어온다. 거리에서 닿지 못한 공원을 이 건물은 위에서 끌어안는다. 그렇다면 사무실과 상점과 극장을 한데 쌓은 이 복합건물은 공원과 도시 사이에서 무엇을 하려는 걸까.
2018년 3월 문을 연 도쿄 미드타운 히비야(Tokyo Midtown Hibiya)는 지상 35층, 높이 191미터의 복합건물이다. 롯폰기에 이은 두 번째 도쿄 미드타운으로, 개발은 미쓰이부동산(三井不動産)이 맡았다. 지금까지 대부분 미쓰비시가 가꿔 온 마루노우치를 걸어왔다. 도쿄 미드타운 히비야는 그와 오랫동안 어깨를 겨뤄 온 미쓰이가 세운 건물이다.
앞서 본 교차로의 안내 지도 위에 놓고 보면 흥미로운 배치가 보인다. 미쓰비시가 한 세기 넘게 가꿔 온 마루노우치의 북쪽 끝 오테마치에는 2020년 미쓰이 계열이 세운 오테마치 원(Otemachi One)이, 남쪽 가장자리 히비야에는 이 건물이 서 있다. 한 회사가 가꿔 온 업무지구의 양쪽 가장자리에 다른 회사의 건물이 하나씩 들어섰다. 타워를 올려다보면 모서리가 부드럽게 휘어 있다. 설계를 이끈 영국의 홉킨스 아키텍츠(Hopkins Architects)는 이 건물을 "춤추는 타워(dancing tower)"라고 불렀다. 이 일대에 한때 있었던 로쿠메이칸(鹿鳴館)의 무도회, 그 안에서 춤추던 한 쌍의 모습에서 곡선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로쿠메이칸을 설계한 사람은 미쓰비시 1호관의 원본을 설계한 조사이아 콘더(Josiah Conder)다. 미쓰이의 이 타워와 미쓰비시의 1호관이, 한 세기도 더 전의 같은 건축가를 기억하고 있다. 실제로 올려다본 타워의 곡선은 층을 따라 이어지며 위로 풀려 올라간다. 멈춰 선 건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 건물의 층을 따라 올라가면 히비야라는 동네가 수직으로 쌓여 있다. 지하 1층부터 7층까지는 60여 개의 상점과 영화관이 차지하고, 9층부터 34층까지는 사무실이 들어섰다. 낮에는 일하는 사람들이, 저녁에는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이 같은 건물을 드나든다.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며 지나친 저층부는 주말이라 사람들로 붐볐다.
극장의 거리라는 이 동네의 성격은 건물 곳곳에 새겨져 있다. 3층 높이로 뚫린 아트리움은 극장에서 착안한 곡선으로 둘러싸였고, 1층의 히비야 스텝 광장은 계단이 그대로 객석이 되도록 만들었다. 약 3,600제곱미터의 이 광장에서는 계단에 앉은 사람들이 관객이 되고, 광장이 무대가 된다. 6층의 파크뷰 가든과 9층의 스카이 가든까지, 이 건물은 층층이 누구나 머물 수 있는 바깥 자리를 끼워 넣었다.
이 건물이 들어서기 전, 이 자리에는 1929년에 지어진 산신빌딩(三信ビルディング)이 있었다. 아치형 천장이 아름다웠던 이 건물을 헐기로 했을 때 보존을 바라는 목소리가 컸지만, 결국 2007년 해체되었다. 앞 편의 메이지생명관은 남기는 쪽을, 이곳은 새로 짓는 쪽을 택했다. 대신 새 건물은 지하 통로에 산신빌딩의 아치 천장을 닮은 디자인을 이어 넣었다. 건물은 사라져도 그 기억의 일부는 새 건물 안에 남았다.
같은 도쿄 안에서도 도시를 만드는 방식은 하나가 아니다. 마루노우치가 옛 건물을 남기고, 다시 짓고, 옛 높이를 따르며 거리를 이어 왔다면, 도쿄 미드타운 히비야는 한 건물 안에 업무와 쇼핑과 극장과 정원을 겹쳐 넣어 동네의 성격을 수직으로 옮겨 담았다. 이 건물이 업무지구의 끝에서 해낸 일은 분명하다. 일하는 도시와 노는 도시를 한 동선으로 잇고, 빌딩가와 공원을 한 시선 안에 들였다.
교차로의 안내 지도 위에서 한 동네씩 넘어가던 도시가 이 건물 안에서는 한 층씩 넘어간다. 업무지구는 혼자서 살 수 없다. 하루 종일 일한 도시에는 숨을 돌릴 자리가 필요하고, 히비야는 마루노우치에게 그런 자리다.
복합건물은 여러 용도를 한곳에 쌓아 올린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파크뷰 가든에 서서는 도심 한가운데 이런 정원을 품은 건물이 부러워졌다. 좋은 복합건물은 용도를 쌓는 건물이 아니다. 그 동네의 성격을 쌓고, 그 위에 누구나 머물 자리를 내어 주는 건물이다.
테라스에서 내려와 유라쿠초역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거대한 유리 선체가 선로를 따라 누워 있다. 그 앞으로는 넓은 광장이 펼쳐진다.
글, 사진 | citevoix
내용 참고 | 메이지야스다생명, 도쿄도공원협회, 도쿄도 건설국, 치요다구, 다이이치생명, 도호, 스미토모미쓰이트러스트부동산, 미쓰이부동산, Hopkins Architec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