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스: 50년의 역사, 50년간의 공포

byJoanne

* 영화 “죠스(Jaws)”의 50주년을 기념하는 아래의 글은 작년 여름 저희가 써 두었던 내용임을 밝힙니다.



엄마 C의 시선



전 세계의 어느 누구라도 그 제목을 생소하게 느낄 사람은 없을 듯한 영화 “죠스”는 작가 피터 벤츨리(Peter Benchley)가 1년 전(1974년 초) 출간한 동명의 소설을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가 연출하여 다음 해인 1975년 발표했던 스릴러 영화입니다. 소설 출간 전부터 영화화가 진행되며 1973년 1월 1차 원고 완성 직후 영화화 판권이 팔림으로써 바카라의 최종 수정 과정에 스필버그가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이 44주간 그 자리를 지킨 것과 더불어 영화 역시 개봉과 함께 대흥행을 시작하며 4억 7000만 달러라는 수익(미국: 2억 6000만, 해외: 2억 1000만)을 올림으로써 역대 최고의 흥행 실적을 거둔 영화로 기록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1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불가능한 일로 여겼다던 당시의 선입관을 깨뜨린 이 영화는 “블록버스터(Blockbuster)”라는 개념을 탄생시킨 작품으로서 최초의 “호러 블록버스터”라는 이름도 얻게 되었습니다.


올해로 개봉 50년을 맞아 세계 각국에서 50주년 기념 재개봉이 이루어지며 그 의미와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이 영화 덕분에 원작자 피터 벤츨리가 엄청난 수익을 올렸던 것만큼이나 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 역시 세계적 영화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인정 받게 되었으며, 제 4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그중 작품상을 제외한 3개 부문(편집상, 음향상, 오리지널 스코어상)에서 수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기존 영화의 악당 역을 주로 인간들이 ‘차지’했던 반면 사람보다 훨씬 포악하고 집요한 악당으로 동물을 등장시켰다는 점에서도 독특하고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진 이 작품을, 1964년 뉴욕 롱아일랜드(Long Island)에서 한 어부가 2,064kg짜리 백상아리를 잡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상력을 발휘해 집필했다는 벤츨리는, 자신의 바카라이 미국 내 950만 부, 전 세계적으로 2000만 부의 판매 부수를 기록할 만큼 대성공을 거두자 이후 바다를 무대로 한 소설들을 연이어 집필하게 됩니다.



개봉 후 50년이 흐른 올해까지도 그 영향력이 여전한 이 작품은 2001년 미국 의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에 의해 “미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중요한 영화로 선정되며 미국 국립영화등기부(National Film Registry)에 보존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디프(Deep),” “아일랜드(The Island),” “비스트(Beast),” “화이트 샤크(The White Shark)” 등 주로 바다와 바다 생물을 소재로 한 소설들을 발표했던 피터 벤츨리가 “죠스” 이후 그만큼 성공한 후속작을 내지 못한 것에 비한다면, “인디애나 존스(Indiana Jones)” 시리즈와 “백 투 더 퓨쳐(Back to the Future)” 시리즈를 포함해 “E.T.,” “컬러 퍼플(The Color Purple),” “쉰들러 리스트(Shindler’s List),”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 “터미널(The Terminal)” 등등 이름을 모두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뛰어난 영화들을 연출해 온 스필버그는 “쥬라기 공원(Jurassic Park)”이나 “쥬라기 월드(Jurassic World)” 시리즈 등 자신이 연출 혹은 제작을 맡은 작품들에서 ‘식인’ 동물을 소재로 다루는 능력의 업그레이드 실력까지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당시에는 CG가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기에(또한 CG가 갖지 못한 여러 장점도 있기에) “애니매트로닉스(Animatronics)”를 – 애니메이션(Animation)과 일렉트로닉스(Electronics)의 혼성어이며 촬영과 관람 등의 목적으로 제작된 정교한 로봇인 – 3개나 만들어 촬영에 임했음에도 그것들이 계속 고장 나는 바람에 “상어 없는 상어 영화”까지 생각했다는 제작진의 아이디어로, 영화 시작 30분 만에 지느러미를 보여 주는 상어는 81분이 지난 시점에야 전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를 두고 후에 스필버그는 “쓸모없는 상어 모형이 도리어 신의 축복이었다”고 말했다는데, 그처럼 기발한 연출 방식 못지않게 “죠스”하면 누구나 떠올릴 “빠~밤, 빠~밤”하는 주제 음악 역시 이 영화의 흥행에 큰 몫을 했습니다. 지금도 한국에서 판매 중이라는 “죠스바”의 광고 음악으로까지 한때 사용되었던 이 곡은 음악감독을 맡은 작곡가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가 드보르작(Antonín Dvořák)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From the New World)”의 4악장 도입부를 메인 테마곡에 사용한 것으로, 상어가 나타날 듯한 장면마다 등장하며 관객들에게 짜릿한 스릴과 공포감을 ‘충분히’ 안겨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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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잉글랜드의 작은 섬마을인 “애미티(Amity)”를 배경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곧 새벽 바다에서 혼자 수영하던 젊은 여성이 물에서 허덕이다 사망하는 의문스러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여럿이 함께 모여 즐기던 젊은이들 사이에서 맞은 편 남성과 미묘한 눈빛을 주고 받던 그녀가 느닷없이 바다로 달려가 뛰어들자 남성도 뒤따라 물에 들어가려다가 과음으로 몸을 가누지 못해 해변에 쓰러져 잠이 드는데, 혼자 수영을 하던 그녀가 갑자기 발버둥을 치면서 “죽고 싶지 않아(I don’t want to die)”라는 외마디를 남기고 물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지요. 영화 화면상으론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은 이 장면이 무척이나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는 원작 소설의 도입부는, “처음에 그녀는 물 속의 바위나 떠다나는 나무 토막에 다리를 부딪힌 줄 알았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고 오른쪽 다리가 세게 잡아당겨지는 느낌뿐이었다. 그녀는 왼쪽 다리로 계속 물을 차면서 손으로 오른쪽 발을 만져 보려 했다. 하지만 발이 만져지지 않았다… 손가락 끝에 만져지는 것은 잘려나가고 남은 뼈와… (At first, the woman thought she had snagged her leg on a rock or a piece of floating wood. There was no initial pain, only one violent tug on her right leg. She reached down to touch her foot, treading water with her left leg to keep her head up… She could not find her foot… Her groping fingers had found a nub of bone…)”라는 생생한 표현을 담고 있습니다(더 끔찍한 부분들은 생략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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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 신고를 받은 경찰의 수색 과정에서 사망한 여성 “크리시(Chrissie)”의 끔찍한 ‘잔해’가 발견된 후 상어의 습격에 의한 사망이라는 검시관의 소견을 접한 경찰서장 “마틴 브로디(Martin Brody)”가 해안 폐쇄를 지시하려 하지만, 그 지역 주민들(여름 한 철 수입으로 남은 1년을 살아가는)을 대표하는 시장 “래리 본(Larry Vaughn)”과 시의회 의원들은 보트와 부딪혀 일어난 사고일 수 있다며 해안 폐쇄를 반대하고, 그러는 사이 바다에서 놀던 개와 어린 소년 등이 상어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또 다시 발생합니다. 상어 포획에 $3,000의 현상금이 걸리면서 갑자기 상어 사냥 열풍이 부는 가운데 그 지역 어부들이 뱀상어(Tiger Shark) 한 마리를 잡아 오자 브로디 서장과 본 시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만, 브로디의 연락으로 그곳에 왔다가 뱀상어의 입과 몸 크기를 보며 의문을 품던 해양 연구소 연구원 “매트 후퍼(Matt Hooper)”는 해부 결과 사람의 사체가 발견되지 않았음을 근거로 문제의 식인 상어가 아니라고 결론 내립니다.



부서진 어선에서 상어의 큰 이빨을 찾아냈던 후퍼가 끔찍한 시체를 보고 놀라 떨어뜨리며 결정적 증거물을 가지고 오지 못하자 시장은 그것을 해안 폐쇄 반대의 구실로 다시 이용하고, 식인 상어의 소문을 듣곤 독립 기념일 연휴 동안 구경하기 위해 오히려 섬으로 몰려드는 관광객들까지 뒤엉키면서 인근은 거의 통제불능 상태에 이릅니다. 불안과 우려를 떨치지 못하던 브로디는 자신의 아들 “마이클(Michael)”에게 바다 아닌 호수 쪽에서 보트 놀이를 하라고 당부하지만 하필 상어가 그 석호에 나타나 사람들을 살육하면서 그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마이클도 심한 충격을 받습니다. 더는 버틸 수 없게 된 시장이 브로디의 설득에 동의한 이후 $10,000의 현상금을 요구했던 상어 사냥꾼 “퀸트(Quint)”의 고용과 함께 본격적인 상어 사냥이 시작되고, 브로디와 후퍼도 퀸트의 배에 함께 승선해 비장한 각오로 바다로 나섭니다.


식인 백상어를 죽이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함에 있어, 소설에서는 폭발물로 상어를 잡기 위해 강철 케이지에 들어가 잠수 상태로 상어에게 접근하던 후퍼가 상어의 공격으로 케이지가 부서지며 제일 먼저 목숨을 잃은 데다 상어 배에 작살을 찔러 넣었던 퀸트 역시 작살에 달린 로프가 엉켜 발목에 묶이는 바람에 바닷속으로 끌려들어가 숨지면서 브로디 혼자 겨우 살아남는 것으로 내용이 전개되는 것에 반해, 영화상으로는 배가 기울어지며 상어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퀸트 한 사람만 희생될 뿐 상어의 몸 안에 넣어 둔 압축 공기통을 총으로 쏴 폭파시키는 브로디는 물론 부서진 케이지에서 탈출한 후퍼도 무사히 살아 돌아오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지요.



사람을 무참히 도륙하는 상어와의 혈투로만 기억하던 영화를 50주년을 맞은 올해 다시 보면서 두 가지 사실(조금 가벼운 측면과 좀 더 깊이 있는 측면의)을 새삼 깨닫게 되는데, 가벼운 쪽에 속하는 첫 번째 사실은 ‘물’에 대해 갖고 있는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에 관한 것입니다. 멀리에서 물을 바라보는 일은 – 강가나 바닷가의 카페, 식당 등에 앉아 –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워낙 많기 때문인지 엄마의 자궁에서 양수에 둘러싸여 있던 기억이 빚어내는 자연스런 성향으로 이해하는 의견들이 많은 반면, 깊은 물속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거나 그 물에 들어가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역시 적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바닥이 어디인지, 그 물속에 어떤 생물이 살고 있는지 보이지 않고 알 수 없음에 대한 공포감에 기인하는 현상으로 보는 분석이 다수인 듯합니다. 이 같은 바다의 ‘미지(未知)’에 대한 두려움을 “심해 공포증(深海恐怖症)”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런 심리가 “케토(Κητώ: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바다 괴물)”나 “크라켄(Kraken: 북유럽 신화 속의 바다 괴물)” 같은 존재를 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구약성경에서도 “리워야단(Leviathan)”이라는 생물에의 언급이 이곳저곳(욥 3:8; 시 74:14; 104:26; 사 27:1)에서 발견되다가 욥기 41장에서는 그 장 전체를 차지할 만큼 심층적으로 다루어지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무지(無知)라는 연약한 부분을 부각시키시는 과정에도 활용되었던 것이리라 짐작하게 합니다.


좀 더 깊이 있는 측면에서의 사실은 이 작품의 내용 가운데 가장 본질적 문제로 자리하며 수많은 희생자들을 만들어 낸 진짜 적은 같은 ‘인간’이라는 것으로, 영화에서 ‘상어’라는 공격자와 맞서 싸우는 인간의 혈투가 보다 부각되는 것과 달리 원작 소설은 ‘인간’ 사이의 다툼과 갈등에 더욱 방점을 두고 있고 이것이 양쪽 매체의 스토리가 전혀 다르게 - 영화에서는 브로디, 후퍼, 퀸트 세 사람이 서로 힘을 합쳐 싸우다 퀸트만 상어에게 잡아먹히지만 소설에서는 이들 간에 얽히고설킨 갈등이 이어지다 브로디 혼자만 살아남는다는 - 진행되는 부분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영화에서 이상적인 ‘현모양처’로 등장하는 브로디의 아내 “엘렌(Ellen)”이 소설 속에서는 후퍼와 불륜을 저질러 두 남성 간에 큰 갈등을 야기하는 존재로 그려져 있으며, 상어 사냥꾼 퀸트가 연구자인 후퍼를 실전 경험 없는 애송이로, 그리고 수영도 못하는 브로디를 샌님 정도로 취급하며 무시한다는 설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시간 안에 재미와 감동을 담아내야 하는 영상 매체와 보다 긴 호흡과 여백이 허락되는 활자 매체의 각기 다른 특성이 만든 결과겠지만, 작가인 피터 벤츨리가 소설을 쓰며 진심으로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힘을 합쳐 외부의 악(상어로 상징된)에 대항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순간에도 자기들끼리 물고 뜯으며 갈등하는 인간의 연약함과 사악함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됩니다.



사자나 호랑이처럼 땅 위에 살며 우리 눈으로 직접 관찰할 수 있는 맹수와 달리 언제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출몰할지 모르는 물속 생물에 대해 갖게 되는 두려움은 어쩌면 우리가 직접 볼 수도 미리 알 수도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일맥상통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그렇지 않은 비신앙인들에 비해 그 같은 ‘미지’에의 두려움에서 좀 더 자유로운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삶의 터널 속을 더듬더듬 나아가는 존재라는 점에서는 별 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겠지요. 애미티의 시장과 주민들이 당장 먹고사는 문제에만 골몰하느라 타인의 위험을 나 몰라라 하지 않았다면 귀한 생명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듯, 각자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에 바쁜 우리들도 그런 자기중심성에서 조금만 고개를 돌려 주위의 고통과 하소연에 눈과 귀를 열어 둔다면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몰라 더욱 공포스러운(상어와 같은) 미지의 미래도 모두가 합쳐 낸 힘으로 조금은 쉽게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는 ‘낭만적인’ 꿈을 품어 봅니다.




딸 J의 시선



사실 나는 바다나 호수 같은, 거대한 크기의 ‘물’을 상당히 두려워한다(그런데 또 물가는 좋아한다. 나도 알 수 없는 내 마음이란…). 그런데 이 감정은 물에 빠질 경우 수영해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다는 식의 실제적인, 다시 말해 ‘실체가 있는’ 공포라기보다는 깊은 물 속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무언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더 가깝다. 심지어는 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수영장에서도 수심이 깊은 쪽으로 가면 오싹해질 때가 있는데, 수면 아래에서 어떤 이상한 존재가 나를 낚아챌 것만 같은 느낌이 -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아는데도 - 들기 때문이다. 결국은 뭐, 어렸을 때부터 물속에서 ‘괴물’이 나오는 영화 속의 장면들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지나친 상상력의 6할 정도는 [죠스(Jaws)]의 바카라임이리라 본다.


올해로 개봉 50주년을 맞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죠스]는 현대식 "블록버스터"의 시초라는 점에서 영화 역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 성공에 힘입어 속편이 줄줄이 나왔을 뿐 아니라(고백하자면 하나도 보지 않았다) 대놓고 유치한 B급 감성의 [샤크 스톰(Sharknado)] 시리즈에서부터 제이슨 스타뎀이 하다하다 이젠 고대 상어와도 맞짱 뜨는 모습까지 볼 수 있는 [메가로돈(The Meg)] 시리즈, 넷플릭스에서 꽤나 히트했던 2024년 작 [언더 파리(Sous la Seine)] 등등 ‘상어’를 주제로 한 여러 작품들이 파생되기도 했다. 다들 나름의 재미를 가진 작품들이지만 ‘오리지널’을 따라잡기는 어려운데, 사실 [죠스]라는 영화의 가장 큰 매력과 장점은 ‘상어’라는 주제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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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내용을 짧게 짚고 넘어가자면 이 영화의 배경은 뉴잉글랜드에 위치한 작은 섬 “애미티”(Amity)로, 이곳은 도시 사람들(더 정확하게는 ‘뭍’ 사람들)이 관광 오는 여름 휴가철에 생계를 의지하는 평화롭고 고요한 휴양지다. 뉴욕의 잔인한 범죄들에 질려 애미티로 오게 된 경찰서장 브로디(로이 샤이더)는 아내와 두 어린 아들과 더불어 평온한 일상에 적응해 가던 중 외지 출신의 젊은 여성이 애미티에 놀러왔다가 해변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는다. 끔찍하게 훼손된 시신의 상태와 검시관의 의학적 소견을 바탕으로 피해자가 상어에게 공격 당했다고 판단한 브로디가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해변을 폐쇄하려 하지만 여름 휴가철을 앞두고 애미티의 관광업을 걱정하는 시장과 시의회 의원들은 그의 건의를 거부하며 은근한 압력을 행사하고,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브로디는 시장의 결정에 수긍하고 만다. 하지만 그의 우려대로 바다에서 수영하던 사람들을 상어가 공격하는 사태가 다시 벌어지고, 이번에는 섬의 주민인 키트너라는 소년이 죽임을 당하면서 더 이상 덮어 둘 수 없는 수준으로 상황이 심각해진다.


브로디는 해양학자 후퍼(리처드 드레이퍼스)를 애미티로 불러 자문을 구하고, 그와 함께 지금까지의 사건들을 조사하며 문제의 상어가 아주 거대한 종, 즉 "백상아리"(Great White Shark)일 것이라 추정한다. 백상아리의 엄청난 힘과 공격성에 기겁한 브로디는 다시 한 번 시장에게 해안의 폐쇄를 요구하지만, 여름 장사에 생계가 달린 지역 주민들의 분노를 피하기 원하는 시장은 일을 어떻게든 조용히, 자체적으로 해결하려 들기만 든다. 이 때문에 상어를 잡아 오는 사람에게 포상금을 주겠다는 공고가 나붙고 별 경험도 없이 현상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떼로 몰려들면서 애미티는 더욱 혼란에 빠진다. 그러다 어부들 한 팀이 뱀상어를 잡아 오는 것에 성공하자 시장은 별다른 확인도 않은 채 문제의 상어를 잡았으며 이제 애미티는 안전하다고 발표해 버린다. 브로디와 후퍼는 비교적 크기가 작은 뱀상어가 지금까지의 사건을 일으킨 식인 상어일 리 없다고 주장하지만, 시장은 그들의 반대를 묵살하며 여름철 관광객을 평소처럼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번에도 원래의 식인 상어가 관광객들로 가득한 해안가에 다시 나타나고, 한 명의 희생자가 추가되고 나서야 비로소 시장은 해변 폐쇄를 허가한다. 사건 당시 자신의 아들도 위험에 직면했었다는 사실에 분노한 브로디는 시장을 윽박질러 상어 전문 사냥꾼 퀸트(로버트 쇼)를 고용하게 하고, 후퍼와 함께 퀸트의 배 "오르카"(Orca) 호에 탑승해 바다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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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듯 [죠스]가 비슷한 류의 영화들 중에도 독보적으로 뛰어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특히 중요한 요소는 이 작품이 다양한 장르의 특성을 조화롭게 차용한다는 것이다. 특정 괴물을 다루는 ‘괴수물’ 혹은 액션물로 종종 여겨지곤 하는 이 영화는 사실 정확히 보면 스릴러, 그것도 "호러 스릴러"에 더 가까운 작품이다. 주인공들이 모습도 잘 드러내지 않는 상어를 쫓는 과정에서 사건의 증거들을 통해 상어의 정체를 유추해 나가는 방식은 경찰이 연쇄 살인마를 잡기 위해 수사하는 추리물과 유사하고, 실제로도 감독은 히치콕의 영화들(특히 [사이코(Psycho)]와 [현기증(Vertigo)])을 연상시키는 촬영법과 연출 기법을 자주 사용한다. 어떤 면에서는 영화가 오컬트 스릴러의 문법을 따르기도 하는데, 주인공들이 ‘보이지 않는’ 상어를 잡으려 애쓰는 동안 그 위협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믿어 주지 않는 주변인들 때문에 실패를 겪는 설정들이 특히 그렇다. 후퍼가 바다에 잠수해 백상아리의 거대한 톱니를 찾아내지만 상어에게 공격 당한 시체를 보고 놀라 떨어트리는 장면 또한 악령(혹은 악마)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잃어 버리며 주변을 설득할 기회를 놓쳐 피해를 입게 되는 오컬트물의 유구한 전개 방식을 닮아 있다. 괴팍한 상어 “전문 사냥꾼” 퀸트의 존재 또한 스릴러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냉소적인 선배 형사, 혹은 오컬트물에서 볼 수 있는 의뭉스런 조력자([곡성]에서 황정민 배우가 연기한 “일광” 같은)와 결을 같이하고 말이다.


대부분의 스릴러가 ‘범인’을 - 오컬트 스릴러에서는 ‘악령’을 포함하는 - 잡는 과정을 비출 뿐 범인을 주인공으로 삼지는 않는 것처럼 이 영화의 주체, 즉 주인공과 관객들이 집중하고 있는 대상은 사실 ‘상어’ 그 자체가 아니다(이 영화를 논할 때 자주 비교되는 [모비 딕]이나 [노인과 바다]에서 고래와 물고기가 은유적 의미를 가진 것과도 비슷하다). [죠스] 이후 등장한 작품들 대부분이 상어라는 존재를 본질적 기반으로 두고 있는 반면 - 한 예로 [메가로돈]에서 고대 상어 "메가로돈"을 빼면 영화 자체가 성립하지 않듯 – 이 영화에서 상어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악’, 혹은 ‘미지의 공포’를 상징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영화들이 주인공을 위협하는 ‘상어’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규명하거나 나름대로의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달리 [죠스]에서의 상어는 그 성향과 파괴력이 나열될 뿐 왜 이때 갑자기 애미티의 해안가에 나타났는지 전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 상어는 어디에든 있을 수 있고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는, ‘그저 존재할 뿐인’ 악 또는 위험으로 보이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문제의 상어는 영화 후반부까지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으며, 자신의 본체보다는 그가 일궈 낸 파괴의 ‘결과’를 통해 그 존재감을 과시한다. 상어에 의해 생업과 안전을 위협 받는 애미티 주민들이 ‘상어’를 증오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들의 실질적 분노와 두려움, 이기심은 사실상 서로를 향한다. 상어에게 아들을 잃은 키트너 부인이 왜 진작 해수욕장을 폐쇄하지 않았냐며 브로디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 특히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을 겪거나 직접 맞닿기 어려운 까마득한 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게 되었을 때 문제의 원흉과 대면하는 대신 연약하고 만만한 서로를 할퀴며 상처 입히곤 하는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예전에 이 영화를 보면서 작품 속 백상아리를 ‘인재’(man-made disaster)의 상징으로 이해했던 기억이 있다. 애미티의 시장과 관계자들이 이기심과 안전불감증에 눈이 멀어 상황을 방관하는 모습이나 주민들이 상어에게 공격 당해 죽은 사람들보다 자신들의 여름철 매출을 더 걱정하는 묘사 등을 보고 있자면 바카라임감 없는 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눈덩이 불어나듯 거대해진 위험과 부패가 자연스레 떠오르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조금 새로운 해석을 덧붙이게 되었는데, 작품 속 식인 상어를 극단으로 치닫는,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도 어려운 정도의 혐오와 편견, 분노를 대변하는 존재로 볼 수도 있으리라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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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죄와 결함으로 가득한 곳임은 새삼스러울 것 없는 사실이지만, 특히 지난 몇 년간은 숨이 막힐 정도의 답답한 상황으로 변해 오고 있지 않나 싶다. 인종 차별이나 성차별, 장애인 비하와 극단적 ‘힘’의 논리 등등의 잘못된 우월 의식이 언제나 존재했던 문제이기는 했으나 요즘 들어 심각한 수준으로 세계 각국에서 ‘정상화’되며 분노와 증오, 폭력의 굴레를 만들어 낸 듯하다. 영화 속 상어가 수면 아래의 공격을 되풀이하며 점점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갔듯, 대다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혹은 불편하고 어두운 슬롯의 단면을 외면하는 동안) 극단적, 비논리적 혐오와 분노 또한 더욱 더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하며 힘을 모아 온 것으로 보인다. 애미티의 시장이 백상아리를 찾아야 한다는 브로디와 후퍼의 주장을 묵살한 것 역시 결국은 하나의 외면이라고 볼 수 있다. 시장이 정말로 누군가가 더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이기적 사이코패스라 철저한 확인 없이 관광객들을 받아들였다기보다, 자신의 관할 아래에서 백상아리라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해결하기 위한 불편과 희생, 원망 등을 감내하는 일이 두려워 현실을 부정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많은 경우의 많은 사람들이 혐오와 분노, 잘못된 의식과 신념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바로잡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들일 자신이 없어 슬롯의 곪아 가는 구석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던 것일지 모른다. 불안해하면서도 결국은 윗선의 명령에 따랐던 브로디처럼 우리 모두 이 상황에 바카라임을 공유하는 것일 테고 말이다.


그럼에도 결국 영화에서 상어를 해치운 인물이 브로디라는 사실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해변을 개방하라는 시장의 지시를 따르는 동시에 자신의 아이들은 물에 들어가지 않도록 따로 조치하던, 적당히 이기적이고 다분히 소극적이던 브로디는, ‘물’을 두려워하면서도 퀸트의 배에 올라 상어를 잡는 일에 합류한다. 이후에도 상어 사냥 전문가인 뱃사람 퀸트와 상어를 연구하는 엘리트 후퍼 사이에서 꿔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어정쩡한 시간을 보내지만, 자신들의 경험과 전문 지식을 모두 끌어다 쓴 퀸트와 후퍼가 처절히 실패하는 반면 브로디는 물에 거의 잠긴 배의 돛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상어에게 총을 쏘고, 지금까지 배 위에서 별 쓸모없던 ‘경찰’이라는 정체성을 이용해 영화의 내용 중 가장 속 시원한 장면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우리 슬롯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눈먼 분노와 혐오, 증오의 흐름을 멈추는 것에 전문적 지식이나 경험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약자를 향해 돌진하는 증오와 혐오의 힘을 막아내는 일에 각자의 꾸준한 선택과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사하는 결말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애미티 같은 곳에서는 “단 한 명의 사람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되뇌이던 브로디가 결과적으로 그 목표를 이루었듯. 물에 대한 두려움에도 떨치고 일어나 기어코 상어를 잡으러 나서기만 한다면, 배가 침몰하고 작전들이 모두 실패하는 한이 있어도 그 여정은 분명 축복된 길일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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