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 “오디세이아” 아닌 “오디세이”를 보고

byJoanne


[왕과 사는 남자]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가 재빨리 꿰어찬 한국에서 또 하나의 천만 관객 돌파 영화가 탄생했다는 따끈따끈한 소식이 들려온다. 한국 뉴스는 물론 내로라하는 바카라과 영화, 역사 관련 채널들마다 적어도 한 번씩은 이 작품을 다루는 추세가 귀엽기도(?) 하고 고무적이기도 한지라 그 열풍에 슬쩍 숟가락을 한 번 얹어 보면 어떨까 싶다. 엄마는 아쉽게도 아직 이 영화를 보시지 못한 터라 이번 글은 ‘의리 없이’ 친구들과 극장에 다녀온 나 혼자 맡게 되었다.


이번 글은 기승전결 순서로 일련의 감상을 서술하던 평소 구조와 조금 다른, 여러 주제의 단락들이 각각 자립(self-contained)하는 방식의 단편적(episodic) 흐름으로 시도해 보려 하는데, 조금 ‘있어 보이게’ 표현하면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 겪는 여러 사건과 모험들을 이어 붙이는 [오디세이아]의 서사 구조와도 궤를 같이 하는 형태이다. 사실 이런 방식을 생각해 낸 솔직한 이유는 이 영화를 본 뒤 떠오른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나의 일관성 있는 흐름으로 묶어 낼 엄두가 나지 않아서인데, 극장을 나오며 이렇게까지 머리 속을 혼돈과 혼란으로 가득 차게 한 작품을 만난 것도 무척 오랜만인 듯하다. 영화를 ‘재미있다’와 ‘재미없다’, 혹은 ‘좋다’와 ‘나쁘다’로 단순히 구분하는 문제를 넘으면 - 미리 말하자면 영화는 재미있었고 굳이 구별하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 무언가가 아쉬운 것은 분명한데 그 ‘무언가’가… 정확히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은 기분이었달까? 친구의 집에서 열린 성대한 파티에 참석해 재미있게 놀고 맛있는 것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막상 파티의 주최자를 만난 기억은 없는 얼떨떨한 상황과 비슷하지 않나 싶고 말이다. 뭐 어찌 되었든 [오디세이]에 대해 머리 속을 떠돌던 여러 생각과 감상들을 기록해 둘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만은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비주얼_끝판왕 #효과음도_캐릭터가_된다 #피가_끓는다


이 작품에 대해 전반적인 평을 먼저 하자면, 앞서 언급했듯 나는 영화를 상당히 재미있게 감상했다. 어린 시절부터 고대 그리스/로마 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검과 샌들”(Sword-and-Sandal) 장르를 열정적으로 좋아했던 나는 - 엄마가 보여 주신 [벤허]나 [쿠오바디스]등의 고전 영화가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본다 - 그리스/로마 역사는 물론 신화에도 ‘미쳐’ 있었던 데다 학부 때는 고대 라틴어 강의를 듣기도 했다. 사실 [일리아드]를 [오디세이아]보다 더 좋아하긴 했지만 어쨌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오디세이아]를 영화로 만든다는 소식을 들으며 상당히 설레었고 말이다. 이렇게 영화를 즐길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던 입장에서도 [오디세이]의 비주얼적 완성도는 충격적일 정도로 뛰어났는데, 일단 그렇게나 방대한 스케일의 작품을 완성시켰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할리우드 역사에 충분한 기여를 하지 않았나 싶다(한편 분쟁 지역인 서사하라에서 영화가 촬영되었다는 사실은… 약간 아쉽다고 말할 수 있겠다).


기존의 영화 음악처럼 오케스트라를 쓰는 대신 작곡가에게 특별히 지시해 고대 악기들을 이용한 사운드트랙을 만들어 낸 것도 상당히 성공적인 시도였다고 생각되며, 특히 오디세우스가 활시위를 당길 때 등장하는 음(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잊을 수 없는)이 만들어 내는 임팩트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배경 음악이나 효과음마저 영화 속의 인물처럼 서사를 성장시키면서 관객들의 감정 이입을 돕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놀란 감독의 꼼꼼한 연출력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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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절제된 액션 신도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원작인 [오디세이아]가 [일리아드] 속 트로이 전쟁이 끝난 이후의 일을 다루는 만큼 이 영화 또한 ‘전쟁’의 중요한 전투들을 주목해 다루지는 않지만, 영화 내내 목마를 통한 트로이의 점령, 그리고 마침내 이타카로 귀환한 오디세우스의 복수(또는 기강 잡기)의 전조를 보이며 긴장 상태를 빌드업한 덕에 이후 터지는 액션 신들은 카타르시스가 배가 된다. 오디세우스가 마침내 이타카로 돌아와 아내와 아들을 위협하던 구혼자들과 싸우는 장면에서는 [다크 나이트]에서의 뛰어난 액션은 물론 [덩케르크]의 전쟁 신에서도 한 발 더 나아간 놀란 감독의 ‘액션’에 대한 이해도가 증명된다. 도전자들을 물리친 오디세우스가 아내를 향해 나아가는 동안 모든 사람들이 바닥을 두드리며 복종을 표시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피가 끓는 듯한 느낌까지 든다. 볼거리로 따졌을 때 이 영화를 따라올 만한 작품은 한동안 나오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캐스팅의_명과_암 #아르고스 #존_레귀자모의_재발견


이 작품 개봉 전부터 캐스팅에 관한 여러 말들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불만과 염려들에 동의하지 않았다. 영화를 본 이후의 소감을 말하자면 캐스팅 하나는 정말 ‘완벽 이상’이라는 것인데, 동시에 지나치게 완벽한 그 캐스팅이 영화에 반드시 득이 되지만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함께 든다. 조용한 우아함과 번뜩이는 야망을 지닌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의 역할을 맡은 앤 해서웨이에서 시작해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선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 역의 톰 홀랜드는 물론, 페넬로페의 옆자리를 노리는 구혼자들의 대표이자 영화 속 최고 빌런 “안티노오스” 역할로 거의 날아다니다시피 하는 로버트 패틴슨, 병사 “시논” 역의 엘리엇 페이지, “메넬라오스” 왕 역의 존 번탈, 바다의 여신 “칼립소” 역의 샤를리즈 테론, 마녀 “키르케” 역의 사만다 모턴 등 쟁쟁한 배우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열연을 펼친다.


다만 개개인의 배역으로 봤을 때 흠잡을 데 없는 싱크로율조차 작품 전체의 맥락에서 희석되는 면이 있는 것은, 인물들 대다수의 등장 비율이 크게 높지 않아 관객에게 충분한 시간을 두고 그 역할에 감정 이입할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명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는 영화의 ‘장점’이 오히려 작품의 흐름을 방해하거나 ‘할리우드 스타 찾기 놀이’로 변질되는 듯한 약점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아쉬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이 영화 속에서 그 어떤 위화감도 유발하지 않은, 진짜 ‘완벽한’ 캐스팅을 두 가지 꼽는다면 그중 하나로 오디세우스를 20년간 기다린 충성스러운 사냥개 “아르고스” 역할의 15살 연기견 “소이어”를 들 수 있다. 영화를 보기 전 나름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아르고스가 주인을 알아보며 마지막 힘을 내는 장면에서 정말 추잡스럽게(…) 울었는데, 개인적으로 1년 전 한국에서 입양한 유기견 출신 “루시”의 집사로 살고 있는 입장에서 정말 마음이 무너졌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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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한 배역은 오디세우스의 충직한 신하로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 역할을 맡은 존 레귀자모였다. 평론가들 대부분이 주연 배우들을 칭찬하지만 개인적으로 존 레귀자모야말로 이 작품의 감정적 구심점(emotional center)이라고 생각한다. [오디세이]를 구성하는 정서적 서사에는 ‘집을 향한 오디세우스의 그리움’과 ‘오디세우스를 향한 주변인들의 그리움’이 같은 무게로 존재하는데,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가 오디세우스를 그리워하는 마음보다 더욱 애틋한 것이 사실 에우마이오스의 그 마음이다. 오디세우스의 소식을 수소문하는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의 절박함과 그리움이 진실이라고 해도 그의 귀환을 바라는 그들의 마음 안에는 ‘정치적’ 이유가 있음(자신들의 개인적 이익과도 직결되어 있는)을 부인할 수 없다. 그가 돌아와 이타카의 왕좌를 탈환해야만 페넬로페는 이름뿐인 섭정에서 벗어나 왕비로서의 권위를 되찾을 수 있고 텔레마코스 또한 자신의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는 정적들로부터 든든한 방패막이를 얻어 진정한 후계자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미천한’ 돼지치기로 권력 싸움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에우마이오스는 전혀 그렇지 않은 데다 오디세우스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불필요한 괴롭힘까지 당한다. 오디세우스가 돌아온다 해도 실질적 혜택을 보기 어려운 그가 나타내는 그리움은 자신의 ‘왕’인 동시에 가족처럼 사랑한 오디세우스를 향한 헌신적인 애정, ‘진짜 왕’이 돌아와 질서를 바로잡길 바라는 정의감, 그리고 ‘옳음’에 대한 갈망 등을 대변하는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타카로 돌아온 오디세우스가 처음 찾아가는 인물이 에우마이오스라는 것, 악랄한 안티노오스의 빈정거림과 달리 페넬로페가 에우마이오스의 이름을 알 뿐더러 그에게 손수 중요한 임무를 맡긴다는 사실 또한 큰 의미가 있다.


늙은 몸과 지친 마음을 이끌고 희망과 실망 사이에서 간신히 자신을 다잡는 에우마이오스를 표현하는 레귀자모의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동안 꾸준한 활동을 하며 여러 작품에서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 준 존 레귀자모를 [오디세이]를 통해 ‘재발견’했다고 표현한다면 배우에게 실례가 되겠지만, 그래도 이 작품을 통해 그가 조금 더 주목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이번 아카데미에서 남우조연상 후보에까지 올랐으면 참 좋겠다.



#여성서사 #고뇌의_흔적 #유의미한_시도


크리스토퍼 놀란은 부인할 수 없는 뛰어난 역량의 감독이지만,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그의 방식은 평론가와 관객들에 의해 ‘아쉬운’ 요소로 꼽혀 온 부분이다. 정확한 표현을 사용한다면 그는 여성 캐릭터를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편이고, 놀란의 작품 속 대부분의 여성 인물들은 (남성) 주인공의 성장이나 각성을 돕는 도구 비슷한 용도로 쓰일 때가 많다. 이는 그가 성차별주의자여서가 아니라 - 실제로 그의 아내는 남편의 영화들을 함께 프로듀싱하는 멋진 사람이다 - 놀란이 집중하는 서사 그 자체의 특성에서 유래한 한계라고 할 수 있는데, 연출작 대부분에서 드러나는 그의 주 관심사가 불완전하지만 선한 남성 주인공(감독 자신의 페르소나로 추측되는)이 물리적, 정신적 고난과 역경을 뚫고 옳은 일을 하기 위해 고뇌하며 나아가는 여정과 맞물리곤 하기 때문이다.


그런 비평을 의식한 듯 이번 영화에선 의도적으로 ‘여성’ 인물의 서사에 관심을 기울인 흔적들이 보이는데, 20년간 군주의 대행으로 이타카를 지켜 온 페넬로페가 남편이 없다는 이유로 통치자 대접을 받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분노하는 장면이나 아가멤논 왕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자식을 신들에게 제물로 바친 남편에게 복수하는 대목 등이 특히 그렇다. 다만 몇몇 인물들을 제외하면 이 영화 속에서도 여성 캐릭터들의 비중이 크지 않다는 점(앞서 말했듯 대다수 등장인물들이 짧게밖에 등장하지 않기에 일부러 여성 인물들에게만 낮은 비중을 부여했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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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이 영화 안에서의 가장 복합적인 여성 캐릭터를 페넬로페 아닌, 사만다 모턴이 연기한 마녀 “키르케”로 여기도록 하는 요소는 그녀가 여러 모순과 결함을 가진,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영화 속 키르케는 원작 서사시에서와 정반대의 캐릭터로, 호메로스의 키르케가 오디세우스를 유혹하며 구애(?)의 일환으로 그의 부하들을 돼지로 바꾼 전형적 ‘요부’인 마녀였다면 영화 속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에게 두려움과 경멸을 느끼며 자신을 지키는 수단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인물이다. 물론 그녀는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이 본인에게 직접적 위해를 가하기도 전에 그들을 돼지로 바꾸지만, 자신의 섬에 갑자기 낯선 남성들이 들이닥쳐 음식과 휴식을 구하는 상황임을 생각할 때 그녀의 방어적 태도는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다. 뒤늦게 부하들을 찾으러 온 오디세우스를 질타하는 키르케는 전쟁의 폭력과 강탈의 문화에 젖은 군인들을 혼자 사는 여성에게 보내면서도 그녀의 안위보다 부하들을 중요시한 오디세우스의 이기심과 부주의, 자신의 의사를 배제(exclude)한 무례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피를 토하듯 분노를 발하는 그녀의 외침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남성(다시 말해 슬롯적 강자)에게 폭력과 착취를 당했던 피해자이자 생존자(survivor)의 울분을 엿보게 된다.


하지만 키르케는 결국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원상태로 되돌려놓고, 그의 여정에 약간의 도움을 주기도 한다. 어떤 평론가는 이 설정이 여성(혹은 약자)의 온당한 분노가 슬롯적 압박에 꺾여 버리는 상황을 연상시킨다며 아쉬워하기도 했는데, 물론 일리 있는 해석이지만 어떤 면에선 키르케를 인격체로 존중해 주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상을 향한 키르케의 분노와 증오가 타당하고 합리적일지라도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아직 그녀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기에 그녀가 그들에게 한 행동은 엄밀히 말해 분풀이, 혹은 엉뚱한 상대를 겨냥한 복수에 더 가까울 수 있다. 여성들, 그리고 슬롯적 약자들이 자신의 분노와 억울함을 호소할 때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증오와 되갚음의 악순환이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로서의 존중, 진심 어린 사과와 상황의 개선에 대한 확약이다. 오디세우스가 키르케와의 대화/협상을 시도하며(물론 협박을 곁들인) 완벽하지 않으나마 자신의 잘못에 대한 인정을 표할 때 키르케가 감정을 갈무리하고 부하들을 놓아주는 장면은 그녀가 ‘혐오’에 갇힌 괴물이 아니라 폭력을 거둬들일 수 있는 성숙한 인물임에의 묘사로 해석된다. 영화 속에서 키르케는 방어적이고 충동적인, 과거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사는 듯한 완벽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약자를 ‘완벽할 필요 없이’ 그대로 무대에 세우는 영화의 연출 또한 하나의 연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놀란 감독의 세계관 안에서 이 작품이, 특히 키르케가 유의미한 시도로 생각되는 이유도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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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색은_자유 #오디세우스와_오펜하이머의_상관성


지금까지 영화의 줄거리를 이야기하며 원작인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거의 비교하지 않았는데, 사실 나는 이 작품을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구별되는 독립적 작품으로 인정하는 편이다. 큰 뼈대를 제외한다면 이 영화는 호메로스의 시와 전혀 다른 서사로, 원작인 [오디세이아]가 세치 혀에 의지해 여러 여신들과 염문을 뿌리는 교활한 오디세우스의 모험극(신화적 괴물들로부터 도망치는) 또는 소동극에 가까운 것과 달리 영화 [오디세이]는 끔찍한 일을 저지른, 한없이 진지한 한 남자가 죄바카라감과 의무감 사이에서 고뇌하며 자신의 손으로 파괴했을지 모르는 ‘이상’을 향해 더듬더듬 나아가는 ‘순례’의 여정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여러 고전주의자들과 학자들은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이 대목에서 막히며 오디세이아는 이처럼 진지(혹은 지루)한 내용이 아니라고 반기를 들었지만 각색에 꽤 ‘너그러운’ 편인 나로선 별 다른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놀란 감독이 유쾌하고 살짝 비열한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를 주인공 삼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태생적으로 아니었으리란 생각은 든다. 앞서 언급했듯 놀란 감독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주제는 선하고 ‘올곧은’(decent) 사람이 최선을 다해 악과 유혹에 맞서 싸우는 여정이기에 그 악과 유혹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오디세이아] 속 오디세우스는 그가 추구하는 ‘영웅’(hero) 서사와 어울리지 않으니 말이다. 사실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는 원작에 충실한 각색판이라기보다 그의 전작인 [오펜하이머]의 정신적 속편(spiritual sequel)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합할 듯하다. 핵무기 개발에 결정적 역할을 한 줄리어스 오펜하이머가 끔찍한 자괴감과 참담함에 시달리며 자신의 평판과 명성에 대한 공격과 모함에 맞선다는 내용이, [오디세이]에서는 트로이의 멸망에 죄바카라감을 느끼는 오디세우스가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부하들의 무너지는 신뢰를 등에 진 채 고단한 귀환의 길을 걸어가는 식으로 재현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렇게 볼 때 어쩌면 원작 [오디세이아]는 이 영화에서 겉 포장지로 이용당한(ㅎ…) 상황에 가깝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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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_싶은_말이_너무_많다 #너무_사랑해도_문제다


조목조목 떼어놓고 보면 훌륭한 요소들이 넘쳐나는 이 영화가 왜 그렇게 얼떨떨하고 혼란스러운 느낌을 남기는지 꽤 오래 고민했더랬다. 아직도 완벽하게 ‘이것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짚어 내기는 어렵지만 놀란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다시 말해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들이 지나치게 많아 그 많은 메시지와 의도들이 하나의 일관성 있는 결과를 도출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로 인해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이 스스로의 자의를 가지고 행동하는 능동적 인물로보다는 정해진 운명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수동적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한다.


반복해 언급했듯 놀란 감독은 트로이의 멸망을 야기한 오디세우스의 죄바카라감과 자기 혐오에 조명을 맞춘다. 하지만 이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 때 당연히 뒤따를 죄바카라감’보다 조금 더 복합적인 감정으로, 전쟁과 수탈, 군사적 무력의 약육강식이 허용되던 당시의 문화에서 그 사실을 크게 악하거나 문제적인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국가 간 협력과 공생이 중요한 가치가 되고 전쟁이 범죄로 문서화된지 오래인 현대 슬롯가 기준하는 잔인함의 잣대를 고대 그리스의 문명에 똑같이 갖다 댈 수는 없는 일이니까. 따라서 영화 속 오디세우스가 가진 죄바카라감은 ‘문명’을 파괴한 자신의 행동, 즉 이방인이 찾아왔을 때 음식과 쉴 곳을 내어주며 그의 안전을 보장하는, 낯선 땅의 방문객과 그를 맞이한 사람들이 모두 안전하게 공존할 수 있는 장치인 “제우스의 법칙”(Zeus’ Law)을 자신이 무너뜨렸다는 두려움에 기반한다. 오디세우스의 계략 때문에 트로이 사람들은 적군이 여신 아테나에게 바칠 선물을 두고 철수했다고 믿고, 인간과 인간 간의 기본적 예의와 존엄성을 지켜 주는 “제우스의 법칙”에 따라 그 선물을 친히 자신들의 성벽 안으로 들였다가 화를 입는다. 그렇기에 오디세우스의 계략은 야만의 시대에조차 타인과 공생하며 슬롯의 불신과 파멸을 방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 장치를 파괴한 셈이고, 그런 만큼 그는 슬롯를 지탱하는 안전지대를 없애 버린 자신이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문명의 모든 것을 위험에 빠트렸다고 생각하게 된다.



오디세우스의 죄바카라감을 이런 식으로 조명한 영화의 접근법이 무척 흥미로웠는데, 제우스의 법칙이 파괴된 결과로 결국은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 연합군의 나라들마저 다가오는 전쟁과 이름 모를 약탈자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가진다. 협력과 공생 대신 협박과 불통을 선택하며 정치적, 물리적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태도가 국제 관계를 뒤흔드는 지금 특히 시기적절한 메시지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오디세우스의 죄바카라감은 더욱 넓은 가지로 뻗어 간다. 트로이 전쟁에서 잃은 부하와 군인들에게 느끼는 그의 죄바카라감은 지하 세계에 내려가 마주친 망자들이 “우리의 불명예를 나눠 가지라”며 오디세우스와 그의 일행을 쫓는 장면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오디세우스는 이 죄바카라감 때문에 영화 내내 여러 인물들이 건네는 경고(오디세우스 본인만 살아서 이타카로 돌아가리라는 예언)을 거부하며 신에게 맞서 운명을 바꾸리라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거창한 말들과 달리 그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방법으로 부하들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소수의 부하를 희생해 나머지를 살리기 위해 그들 앞에 도사린 위험에 대해 일부러 귀띔하지 않고, 수상한 동굴에서 나가자는 오른팔의 조언을 듣는 대신 주인을 기다리자고 했다가 동굴의 주인인 사이클롭스(외눈박이 거인)에게 부하들을 여럿 잃으며 그들의 신뢰를 점점 상실한다. 태양신의 섬에 정박한 후 부하들에게 태양신의 소를 절대로 잡아먹어선 안된다는 주의를 주었으면서도 막상 식량이 바닥난 병사들이 참지 못하고 몰래 소를 잡아먹은 현장을 목격하자 그닥 분노하거나 실망하는 태도를 보이지도 않는다. “남은 병사라도 살리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듣기 좋은 바른 말 정도로 여겨질 뿐 이 인물의 행동을 결정하는 간절한 동기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이 역시 오디세우스를 그의 각오처럼 ‘운명에 맞서는’ 사람이 아니라 ‘운명에 순응하는’ 인물로 보이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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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맥락에서 오디세우스의 죄바카라감, 자신의 행동이 고향 이타카마저 위험에 빠트렸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그의 잠재의식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도록 만든다. 이 때문에 그는 여신 칼립소의 섬에 조난을 당한 뒤 그녀가 주는 꽃을 먹으며 ‘망각’을 통해 평온을 찾는다. 그럼에도 기억을 잃은 그는 땟목을 만들기 위해 나무 조각을 주우러 다니고, 자기 신분을 잊었으면서도 ‘부하’들과 ‘아내’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을 놓지 못한다. 이렇게 상충하는 의지(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돌아가기 두려운 마ㄹ음)가 한 사람 안에서 공존하는 것 자체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해 가능한 일이지만, 문제가 되는 점은 영화 내내 오디세우스를 움직이고 행동하게 만드는 의지가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모든 부하를 데리고) 갈망으로 표현된다는 것으로, 칼립소가 그의 잠재의식 속 숨겨진 귀환에 대한 두려움을 짚어 주기 전까지 관객은 이에 대해 그 어떤 전조도 감지하지 못한다. 오디세우스를 규정하는 듯했던 한가지 동기마저 흐릿해지고, 칼립소가 기억해 내라며 등을 떠밀고 망각의 꽃을 거두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의 기억을 되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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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이런 설정들은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면이 없지 않는데, 그를 자의(agency)에 찬 다면적 영웅 대신 모든 상황에서 차악의 선택을 하는 것이 최선인, 자신의 삶 속에서도 구경꾼(bystander)에 가까운 수동적 인물로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연합군에 동참해 이타카를 떠나는 일부터 트로이 군을 속일 목마를 제작하는 일, 적군을 속이기 위해 소년 시절부터 함께했던 병사 “시논”을 미끼로 이용하는 일, 부하들이 죽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일에 이르기까지 오디세우스의 서사는 ‘어쩔 수 없는’ 일들, 말하자면 그 스스로 ‘선택’했다기보다 자기 삶에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인’ 것으로 요약될 사건들의 연속이다. 오디세우스가 끔찍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던’, 그럼에도 그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선하고 올곧은 사람으로 조명되는 것 또한 결과적으론 인물의 서사에 득이 되지 않는다. 죄를 짓고 잘못을 했더라도 그에 대한 자신의 바카라임을 능동적으로 통감하는 당당하고 선명한 주인공 대신,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던 ‘피해자’의 흐릿한 위치에 오디세우스를 세운다는 점에서 말이다. 뚜렷한 자아(ego)가 없는 주인공이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는 어렵다.


결국 이런 아쉬움들은 [오디세이아]의 근본적 개요, 즉 ‘온갖 고난과 고통을 뚫고 자신이 망쳐 버렸을지 모르는 선과 이상으로 되돌아가려는 속죄의 여정’이라는 서사를 통해 영화가 지나치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욕심의 부작용이 아닐까 싶다. 오디세우스가 가진 죄바카라감의 다양한 발로들 각각은 충분히 타당하지만, 런닝타임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2시간 52분이라는 긴 시간임에도) 그 모든 동기를 충분히 다루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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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_말_좀_그만해


비슷한 맥락에서 한 마디만 하자면… 영화 속 인물들에게 말 좀 그만하라고 부탁하고 싶다. 영화에 내포된 여러 가지 메시지가 관객들에게 자연스레 다가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설명할 시간이 없다 보니 인물들이 대사로 해설하게 만드는 결과가 빚어진다. 실제로 [제우스의 법칙]을 어겼다는 오디세우스의 죄바카라감은 영화 속에 유기적으로 녹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이타카에 돌아온 오디세우스가 정체를 숨긴 채 페넬로페와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 거의 노골적으로 설명된다. 심지어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의 시대를 스스로 “청동기의 시대”(age of bronze)로 설명하기까지 한다. 제발… 말 좀 그만해! 상황 설명 좀 그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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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_사랑해


그럼에도 다시 말하건대 영화는 아주 재미있었다. 아쉬운 점을 여럿 나열했지만 그만큼 작품의 가능성과 잠재력이 컸고, 그 외의 부분들이 뛰어났기 때문에 부족한 요소들이 더 눈에 띈다고 생각되는 측면도 있다. 사실 놀란 감독처럼 진지한 사람이 ‘신화’ 속 이야기를 이 정도로 표현해 냈다는 것 자체가 일견 신기하다. 여담으로 2004년 작 [트로이]를 놀란 감독이 연출할 뻔했던 전력이 있다는데 그가 해석한 [일리아드]는 어땠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일단 영화를 보고 이렇게나 머리를 굴려 가며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오디세이]는 확실히 뛰어난 예술 작품이 아닐까 싶다. ‘죄바카라감’의 여러 형태, ‘문명’을 지탱하고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 안전 장치와 슬롯적 합의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독려한다는 점에서 지금 같은 시대에 특히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을 테고. 부패한 세상으로 인해 변질된 선과 이상의 원형, 에덴의 질서로 되돌아가기 위한 우리의 귀환 여정에 영화 속 오디세우스를 반면교사 삼아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운명을 잡아챌 필요가 있다는 시사로 이해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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