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침대: ‘회귀’ 아닌 ‘회복’을 향해

byJoanne

딸 J의 시선


이번 회차의 [온라인카지노]에서는 무슨 영화를 다룰지 생각해 보던 중 불현듯 강제규 감독의 1996년 작 [은행나무 침대]가 떠올랐더랬다. 사실 개인적으로 그닥 애정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한국 영화사에 꽤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작품이라는 의미에서 한 번쯤 다루어 보려고 벼르고는 있었고 가을을 맞이하는 지금의 분위기와도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워낙 전설적인(?) 영화이긴 하지만 그래도 줄거리를 한마디로 정리할 경우 [은행나무 침대]는 "전생과 현생을 넘나드는 천년의 사랑 이야기"라고 요약될 수 있다. 작품의 남자 주인공인 "수현"(한석규)은 화가이자 대학 강사로, 외과 의사인 연인 "선영"(심혜진)과 언젠가 아이를 낳아 가족을 완성시킬 날을 꿈꾸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데, 언제부턴가 그의 꿈속에 고대(古代)의 인물로 보이는 의문의 여인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깨어 있는 동안에도 어렴풋이 거문고 소리가 들리는 등의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심지어 꿈속에서 본 나무 침대를 거리에서 발견하기까지 한 후 그 침대를 자신의 작업실에 들여놓은 수현은, 이후 악령으로 보이는 존재에게 쫓기거나 꿈속에서 보았던 여인을 실제로 만나는 등의 사건을 통해 자신의 ‘전생’에 대한 기억을 되찾기 시작한다.


수현의 전생은 천 년 전의 궁중 악사 "종문"이라는 인물로, 어려서부터 함께 가야금을 연주하며 자랐던 공주 "미단"(진희경)과 신분을 넘어선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이웃 나라의 이름난 무장인 "황장군"(신현준)이 전쟁을 일으켜 공주를 자신의 나라로 데려가면서 둘은 헤어지게 되는데, 그럼에도 두 연인은 서로를 잊지 못하고 계속 그리움을 쌓아 간다. 미단을 일방적으로 사모하는 황장군은 자신을 구하러 온 종문을 따라 도망치던 미단을 붙잡아 와서는 질투심에 몸부림치지만, 나름의 인내를 발휘해 종문을 죽이는 대신 고문하고 멀리 추방한 뒤 공주의 마음이 열리기를 또 다시 기다린다. 하지만 미단은 끝끝내 황장군을 돌아보지 않고, 결국 황장군이 미단의 눈앞에서 종문의 목을 베며 셋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둘 사이를 잔인하게 갈라 놓으려 했던 황장군을 비웃듯 두 연인은 한 쌍의 은행나무로 환생해 몇 백 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데, 이를 질투한 황장군의 환생으로 종문의 은행나무는 번개를 맞아 불에 타고 만다. 이를 통해 종문은 "수현"으로 환생한 반면 미단의 환생이었던 은행나무는 그녀의 혼이 깃든 상태 그대로 침대로 만들어지게 된다.



자신의 꿈에 나타났던 여인이 전생의 연인인 미단임을 깨달은 수현이 그녀를 보호하려 함에도, 미단은 황장군에게서 수현을 지키기 위해 그를 떠나 보낼 결심을 한다. 그녀는 자신과 영원히 함께하길 바라는 황장군에게 마지막으로 수현을 만날 수 있게 해 주면 그가 원하는 대로 따르겠다는 제안을 하고, 황장군은 마지못해 이를 승낙하는 동시에 수현의 현재 연인인 선영의 목숨을 약속의 담보로 잡는다. 수현과 미단은 월식 기간의 짧은 시간 동안 나눈 슬픈 재회를 끝으로 결국 작별하지만, 질투와 증오에 휩싸인 황장군은 미단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자 수현을 죽이려 든다. 이때 월식이 끝나 정신을 차린 선영이 미단의 옛 부탁대로 은행나무 침대를 불살라 버리고, 침대에서 나오라며 애타게 미단의 혼을 부르던 황장군은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답하지 않는 그녀의 외면에 절망하면서도 함께 불태워지기를 택한다. 영화는 훗날 수현과 선영의 딸이 이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수현이 죽는 날까지 미단을 그리워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앞서 언급했듯 이 영화는 완성도나 작품성을 떠나 한국 영화사에 큰 의미를 가진 작품이라고 생각되는데, 일단 우리가 생각하는 "동양풍 판타지" 장르의 거의 첫 성공작이자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최초판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 이후 [은행나무 침대]의 후속작으로 의도된 [단적비연수]나 [중천], [비천무] 등등 비슷한 느낌의 작품들은 물론, 넓은 의미에서는 2009년 작 [전우치], 그리고 3년전 여름 이 공간에서도 다루었던 [아라한 장풍 대작전] 같은 영화들 또한 [은행나무 침대]가 물꼬를 트여 놓은 덕을 톡톡히 보았던 셈이다.


기술의 발전에도 이 작품이 기여한 바는 크다. 영화 속 CG와 다른 특수효과들이 당시에는 상당히 혁명적이었을 텐데(물론 지금 보면 촌스럽기는 하다), 황장군의 원혼이 등장하는 도입부나 그가 벽을 통과하는 연출 등등은 [터미네이터] 같은 기존의 영화들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어쨌든 당시 세계 시장을 제패했던 할리우드 작품들과 비견될 만큼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만도 꽤 고무적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영화계의 종사자들과 관객들이 할리우드 같은 해외 영화 제작 환경의 자본과 기술력에 미리 주눅들지 않도록 훈련시키기 시작했다는 면에서 한국 영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도 생각된다.

다만 개인적인 견해로는 영화가 상당히… 오글거린다. 당시의 연출, 연기 스타일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연극적인 대사들과 배우들의 감정 과잉 연기는 - 물론 영화의 내용 자체가 인물들에게 극적 감정을 요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 현재의 감성으로 보기에는 솔직히 괴로운 면이 있다. 이는 이 작품의 서술적 결핍과도 관련이 있는데, 사실 [은행나무 침대]는 영화 자체를 아우르는 근본적인 서사의 뼈대 외에는 내용을 전개하는 방식에 크게 관심이 없는 편이다. 조금 부연하자면 장면과 장면 사이를 자연스럽고 합리적으로 연결시키는 일관성과 개연성에는 별 힘을 쏟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승전결이 딱딱 이어지는 영화라기보다 중요한 장면들을 얽어 놓은 요약본을 보는 듯한 기분, 혹은 내용이 대충 이어지는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물론 꿈과 회상을 통해 서사를 풀어 내는 작품의 연출법 자체가 영화의 몽환적 분위기에 일조를 하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설명과 납득보다는 ‘너낌’으로 밀어붙이는 쪽을 택한다. 어쩌면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기현상들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로 뭉뚱그려지는 것, 이에 대해 논리적으로 납득 가능한 설명을 구하는 선영의 동료 의사들이 주인공들에 의해 ‘적대적’인 역할을 부여받게 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아니 이 둘이 천 년을 사랑했다는데, 으이? 뜨거운 심장을 가진 한국인이라면 응당 알아서 이해하고 감동해 줘야 할 것 아닌가?! 뭘 또 그렇게 따지고 드냐, 말이다.


나는 심장이 차가운 모양인지 두 연인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그닥 절절하게 다가오지 않았는데, 아마도 이 영화가 환생이라는 소재를 활용한 방식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전생과 환생을 가르치는 윤회 사상을 전혀 믿지 않지만 픽션의 요소나 서술적 장치로서의 ‘환생’이란 개념은 꽤 흥미롭다고 생각하는데, 최근 들어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회귀’라는 주제가 인기를 끄는 이유와 비슷하게 그것이 이미 지나가 버린, 그러니까 "고치거나 회복할 수 없어 보이던 무언가를 바로잡을 수 있는 두 번째 기회"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욕망을 파고드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픽션 속에서의 ‘환생’이란 지난 생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달성한다거나 해 내지 못한 복수를 완성시켜 ‘한’을 푼다는 식의 '목표' 지향적 사고뿐만 아니라(이는 ‘회귀’를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하기에) 지난 생에서의 인연을 다시 잇는다는 ‘관계’ 지향적 의도까지 포함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난 생에서 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성취해 내는 ‘변화’뿐만 아니라 지난 생에서의 관계와 인연, 사랑을 연결해 이어 나가는 - 지난 생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라면 더더욱 - 부동, 불변, ‘영원’을 희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에서 관계 지향적 의도의 ‘환생’을 의인화한 사람은 주인공이 아니라 엉뚱한 인물이다.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수현(이자 종문)인데도 작품의 개봉 이후 "황장군 신드롬"이 전국을 휩쓸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수현은 전생에서 미단과 그렇게나 애틋한 사랑을 했음에도 환생 이후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고, 새로운 연인과 미래를 그리며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에 비하면 황장군은 미단을 향한 자신의 사랑에 대해 단 한 번도 ‘보답’받지 못했으면서 천 년이 넘는 시간의 굴레 동안 그녀만을 그리고 생각한다. 물론 스토킹과 데이트 폭력에 대한 인식이 건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요즘의 감수성으로 보자면 황장군은…… 짝사랑 대상을 자국에서 납치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일방적인 마음을 강요하다 상대의 연인까지 죽여 버리는 '쓰레기'가 맞다. 하지만 문화 창작물 안에서의 흡입력이나 ‘매력’(이성으로서의 매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으로만 봤을 때는 음침한 맹목성과 집착심을 가진, 브론테 자매나 앤 래드클리프의 고딕(Gothic) 로맨스 소설 속 남주인공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황장군에게 관객들의 눈길이 쏠리는 것이 당연하다. 조금 무섭게도 영화 안에서 진짜 일편단심을 증명한 남자는 주인공인 수현이 아니라 황장군이니까.


이렇게 잘못된 감정이 중요한 서사를 독식하는 바람에 이 영화 속에서 환생이란 소재는 사랑의 연속과 불변성보다는 이미 끝난 관계를 어리석게 이어 붙이려는 미련을 지칭하게 된다. 마지막까지 미단에게 거부 당하고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황장군은 원혼이 되어 인간 세상을 헤매며 미단을 찾고, 전생의 연인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한 미단 또한 침대에 깃든 채 수현을 기다리다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 세상에 관여하는 과정에서 미단과 황장군은 모두 살아 있는 사람의 생명력을 빼앗게 되는데, 가차 없이 사람을 죽이는 황장군과 그 의도나 가혹성은 달랐을지라도 미단 역시 누군가가 시력을 잃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선영의 삶에도 큰 피해를 입힌다. 황장군의 미련은 특히 자기파괴적인 방향으로 발현되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미단을 끝까지 쫓다 못해 그녀를 태우는 불길 안에서 소멸되기를 택하기까지 한다. 어떤 쪽으로든 이미 끝나고 만 전생의 사랑에 대한 미련이 주변에 피해를 끼치는 정도를 넘어 자기 자신마저 파괴시키고 만 셈이다. 수현 또한 전생의 기억을 되찾음으로 인해 도리어 불행해지는데, 애초에 혼으로만 존재하는 미단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데다 남은 여생 내내 닿을 수 없는 누군가를 그리는 ‘미련’에 붙잡혀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 속에서 환생을 통해 연결되고 이어지는 것은 사랑과 이타심이 아닌 욕심과 슬픔일 뿐이고, 그렇다면 이것은 낭만적 사랑이라기보다 끔찍한 악몽일 수밖에 없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애정의 불변과 사랑의 영원을 바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에 대한 시사일지도 모르고.



회귀든 환생이든 결국 우리의 ‘미련’을 조준하는 개념이 아닐까 싶다. 후회와 미련의 감정이 인간의 공통적 본성일 수도 있겠으나 그로부터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비극을 되풀이하는 굴레에 갇히게 될 테고 말이다. 이 땅에서의 삶 동안 회복하고 복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최선의 노력을 쏟아야 함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와 동시에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두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위해 기도한다. 일단, 그…… 황장군의 반대로만 가면 되지 않을까?



엄마 C의 시선


1996년 개봉되었던 “은행나무 침대”는 이후(1999년) “대한민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연 기념비적 작품”이라고까지 불리던 “쉬리”를 연출하며 전국적 지명도를 얻게 된 감독 강제규의 데뷔작입니다. 역시 “쉬리”에서 주연을 맡았을 뿐 아니라 그 두 영화 사이에 발표되었던 “초록물고기,” “넘버 3,”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등이 모두 성공하면서 당시 “흥행 보증 수표”로 불리던 배우 한석규, 모델로 데뷔해 배우로 성공한 심혜진과 진희경, “장군의 아들” 시리즈에서 “하야시” 역을 맡으며 이름을 알리게 된 신현준 등 중장년 층에게는 이름만 들어도 반가울 추억의 배우들이 다수 출연한 작품이지요. 그해의 “좋은 영화”로 선정되었을 뿐 아니라 제 34회 대종상의 여우주연상, 신인감독상, 남자인기상, 그리고 제 17회 청룡영화상의 신인감독상, 촬영상, 음악상 등을 수상하면서 작품성을 인정 받기도 했습니다.


공주와 궁중 악사의 천 년에 걸친 사랑을 모티브로 삼은 이 영화에서, 그 ‘사랑’ 때문에 목숨을 잃은 두 사람이 은행나무로 환생을 한 후 그중 하나가 장인에 의해 침대로 만들어지고 다른 하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작품의 기본 설정인데, 그들 둘을 둘러싼 또 다른 남자와 여자까지 포함된 네 사람의 남녀가 천 년의 시간이라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고통 받는 모습이 보는 이의 마음까지 힘들게 합니다. 내용의 전개 방식에 그 시절 우리나라에서는 찾기 어렵던 “SF 판타지”라는 장르를 사용하여 “한국형 판타지”라는 별칭이 붙었던 데다가, 당시만 해도 “방화”로 불릴 만큼 외화에 비해 규모가 작던 한국 영화의 스케일을 상당 정도 확장하며 “한국 최초의 블럭버스터”로 불리기도 했던 작품이지요. 또한 영화 안에서 조연 정도로만 인식되던 약역이 작품의 성공에 크게 기여한 – 선한 역할의 주인공보다 오히려 더 – 최초의 작품으로도 평가 받는다고 합니다.



두 남녀 주인공(석판화가이자 대학 강사인 “수현”과 외과 의사인 “선영”) 사이에 태어난 딸이 부모님의 과거 삶에 대해 내레이트 하는 형식으로 영화의 시작과 끝이 구성된 이 영화에서, 사랑하는 연인 관계인 그 두 사람에게 뜻하지 않은 혼란과 갈등이 발생하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됩니다. 꿈에서 생생하게 본 노천 시장과 흡사한 곳을 우연히 지나던 수현이 그곳에 버려져 있는 은행나무 침대를 발견하고 자신의 작업실에 들이면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데, 이 은행나무 침대로 인해 지금까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던 자신의 전생과 그 전생에서 겪었던 처절한 사연을 수현이 조금씩 깨달아 감과 함께,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았던 과거의 문제들이 지금의 삶에 피할 수 없는 결과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수현이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천 년 전의 전생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는 궁중 악사 “종문”이던 그는 공주인 “미단”과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이웃 나라의 공주인 그녀를 사모하다 못해 전쟁까지 일으킨 상대국의 무관 “황장군”으로 인해 이들의 운명에 엄청난 비극이 펼쳐집니다. 자기 나라까지 데려왔으나 자신을 향해서는 도무지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던 미단이 끝내 종문과 함께 도망치다 붙잡힌 뒤에도 그의 목숨을 살려 둔 채 추방했던 황장군은, 그녀의 방 앞에 꿇어앉아 온몸에 눈을 맞으며 – 이후 한국 영화 역사에 두고두고 회자하는 장면으로 남게 된 – 그녀의 마음이 열리기를 기다리지만 끝내 미단이 받아 주지 않고 종문을 따라가 만나자 결국 말을 타고 쫓아가 종문의 목을 베어 버립니다. 이 충격적 광경에 삶의 의지를 잃은 미단도 종문을 따라 목숨을 끊고, 두 사람은 은행나무로 다시 태어나 서로 마주 보면서 긴긴 시간을 함께 보냅니다.





이 상황에조차 질투로 분노하는 황장군은 자신도 매로 다시 태어나 종문의 은행나무에 번개가 떨어지도록 하고, 나무로는 불타 없어진 종문이 수현으로 환생하기까지의 시간 동안 미단의 은행나무는 그녀의 혼이 깃든 침대로 만들어지게 된 것인데, 자신의 존재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수현 옆을 계속 떠돌며 그가 자신을 알아봐 주기만을 기다리는 미단의 영혼을 황장군의 영혼이 다시 따라와 훼방하면서 그들 간의 악연이 재현됩니다. 다른 사람의 정기를 흡수해 “R”이라는 기이한 존재로 태어난 황장군이 종문을 죽이려 하자 미단의 영혼도 다른 사람의 기를 빌어 육신을 입은 채 수현에게 나타나 위험을 알리지만, 그 '다른 사람'이 바로 선영의 환자였고 그러는 사이 잠시 숨졌던 그가 얼마 후 되살아나는 혼란이 – 순조롭게 회복 중이라고 가족들에게 고지했던 환자가 갑자기 사망하고, 또 사망 선고를 하고 났더니 이번에는 다시 살아나는 – 벌어지면서 선영은 엉터리 의사로 비난 받으며 병원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끝끝내 자신을 포기하지 못해 수현을 죽이려 드는 황장군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사람의 몸을 입고 수현을 만나게 해 주면 그의 명하는 바를 따르겠다고 미단이 사정하자 황장군은 월식이 일어나는 잠시 동안의 만남을 그들에게 허락합니다. 이런 가운데 자신은 오진을 한 것이 아니고 영혼이 사람의 몸을 빌리는 일이 가능함을 증명하기 원하던 선영이 미단에게 자기 몸을 빌려 주기로 결정하면서 선영의 기를 빌어 육신을 입은 미단은 수현과 짧은 만남을 나누게 되지요. 이후 미단이 약속대로 돌아오지 않는 것에 분개하며 수현에게 울분을 쏟아내던 황장군은, 목숨을 되찾아(미단이 그녀의 몸을 떠난 후) 작업실로 돌아온 선영이 은행나무 침대에 불을 붙이면서 미단의 영혼도 영원히 사라질 상황에 놓이자 그녀에게 침대에서 나오라고 절규하다가 결국 자신도 불타는 침대에 자진해 들어가 스스로 끝을 맞이합니다.



워낙 오래전,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에 보았던 영화라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세계관 자체가 완전히 바뀐 후 다시 보다 보니 '어이없다'고 여겨지는 부분들이 적지 않았고 “윤회”나 “환생” 같은 어휘들은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거북한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개념이 당시의 관객들에게 불교적 요소로 명확히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고 함에도 “전생 신드롬”이라는 현상이 대중문화의 한 흐름처럼 퍼지는 데에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만은 분명한 듯합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직접 쓴 감독이 그 같은 종교적 배경으로 내용을 구성한 것인지, 아니면 “암수딴그루”라는 특성으로 자주 언급되는 은행나무들을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만들게 된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이처럼 ‘진리’가 아닌 ‘가설적’ 개념들에 신뢰를 두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은 우리의 삶이 단 한 번뿐이라는 엄중한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또 그 한 번뿐인 인생에서 “only way”인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으면 일어날 귀결을 직면하고 싶지 않은 심리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도 마음을 열고 조금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경우, 말 그대로 “유명(幽明)을 달리한” 연인(혹은 사랑하던 누군가)을 한 번만이라도 다시 만나 보고 싶어하는 주인공들의 애틋함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오래전, 이와 유사한 소재를 다룬 영화 “사랑과 영혼(Ghost)”을 보면서도 하게 되었던 생각이지만, 세상을 떠나 다시 볼 수 없게 된 사랑하던 가족, 연인, 친구 등을 잠시라도 다시 만나 품에 안고,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이야기 나누는 일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크면 세상 떠난 사람이 산 사람의 몸을 빌어 육화되는 상상을 근거로 영화를 만들었을까 하는 사실에는 마음이 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 언제든 전화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찾아가 만날 수 있고, 안아 주고 손 잡아 주며 따뜻한 눈길을 전할 수 있는 그들과 기회가 주어져 있는 동안 자주 교류하며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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