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지켜라!: ‘지금 이 순간’ 지구 지키기

byJoanne

딸 J의 시선


장준환 감독의 2003년 작 [지구를 지켜라!]는 내가 어렸을 적, 혼자 영화를 보고 돌아온 엄마의 얼떨떨하던 반응이 얼마 후 내가 직접 보고 난 뒤의 감상보다 더 기억이 뚜렷한 작품이다. 영화의 분위기를 뭐라 설명하지 못한 채 그… 음… 하며 ‘고뇌’하던 당시 엄마의 고민스런 표정은 다시 떠올려도 여전히 웃음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큰 배경 지식 없이 이 작품을 갑작스레 맞닥뜨린 관객들 대부분의 반응이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넌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몰라”라는 대사로 시작하는 영화는 이 전제에 충실하게도 ‘미쳐 보이는 짓’의 향연으로 점철된다. 주인공 “병구”(신하균)는 동료 혹은 조수 비스무리한 관계인 “순이”(황정민)와 함께 “유제화학”이라는 기업의 사장인 “강만식”(백윤식)을 납치한 뒤 자신의 집 지하실에 감금한다. 강 사장이 외계인이라는 확신으로 그의 납치와 감금을 기획한 병구는 지금 당장 안드로메다의 왕자를 만나지 못하면 지구에 엄청난 재앙이 몰려올 것이라 우려하며 강 사장을 통한 외계인 왕자와의 대화를 시도하는데, 외계인들이 머리카락으로 텔레파시를 주고받는다는 생각에 강 사장의 머리를 삭발시킬 뿐 아니라 그의 신경 시스템을 약화시키겠다며 때수건으로 피가 날 때까지 문지른 발등에 물파스를 바르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한다.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고문으로 고통스러워하던 강 사장은 순이와 병구의 사이를 이간질하거나 병구가 모아 둔 외계인 관련 자료를 보고 말을 지어내는 등 탈출을 위한 여러 노력들을 거듭하면서도 매번 병구에게 다시 붙잡히고 만다.


SE-92b1f63a-c5dc-4147-b12f-24730cf9c0b0.jpg?type=w966


한편, 뇌물 사건의 누명을 쓰고 경찰 식당 직원으로 좌천되어 있던 추 형사(이재용)는 강 사장의 실종에 개인적 관심을 갖고 조사하다가 병구를 사건의 범인으로 의심하게 된다. 병구의 집까지 찾아간 추 형사는 병구의 개 “지구”가 씹고 있던 뼈가 사람의 것(!)임을 깨달으면서 그가 강 사장 납치뿐 아니라 그동안 벌어졌던 실종 사건들의 진범이기도 함을 확신하지만 그를 쫓아온 병구에 의해 끔찍한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추 형사에게서 온 연락으로 범인을 추정하게 된 그의 후배 김 형사(이주현) 역시 병구의 집으로 향하고, 강 사장은 다시 한 번 지하실에서부터의 탈출을 감행하며 상황은 점점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영화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표현이 “불운의 명작” 혹은 “저주 받은 명작”이 아닐까 싶은데,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대체로 호평 받은 작품임에도 흥행에는 대차게 실패했음을 한마디로 요약한 논평이다. 포스터와 예고편만 보면 영화의 분위기를 “B급 코미디” 정도로 오해할 수 있도록 만든 마케팅을 탓하는 의견이 많으나 개인적으로는 작품 자체가 대중적 호응을 얻기에는 지나치게 기괴(?)하고 난해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작품 내용을 지금의 슬롯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입시켜 봤을 때, 또한 작년에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지휘하에 [부고니아](Bugonia)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 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이 영화는 시대를 ‘잘못 만났’다기보다 시대를 앞서 나간, 더 정확히는 ‘선지자’(prophet) 역할을 한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우선 영화 개봉 후 20여 년 지난 지금이 바로 가짜 뉴스, 역정보(misinformation), 그리고 음모설(conspiray theory)의 시대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다시 보며 사뭇 다른 시선을 가지게 된다. 영화 개봉 당시에는 그처럼 아슬아슬해 보이는 병구의 정신 상태가 슬롯적 약자로 태어나 갈취와 고통을 겪으며 사는 비참한 삶의 대변이자 슬롯를 고발하는 역할로 작용했다면, 지금 보는 병구는 듣고 싶은 것만 들려 주고 보고 싶은 것만 보여 주는 알고리즘에 빠져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면서 ‘악’과 ‘적’의 존재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파괴적인 자기 연민에 갇힌 음모론자로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실제로도 리메이크 작인 [부고니아]에는 주인공들이 외계인의 존재를 음모론적 시각에서 다룬 유튜브 프로그램을 보는 설정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작품을 보는 동안에는 병구를 극단적인 상태로 몰고 간 그의 참담한 과거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외계인’이 세상을 망칠 것이라는 음모론에 매몰된 그의 자기 파괴(self-sabotage)와 강박(obsession)에 더 주목하게 되었다.

SE-30e6be1d-bd98-425a-a8fe-63d191eac7d0.jpg?type=w966


‘음모론’에 대해 공부하며 자주 듣게 되는 지적은 모든 음모론이 ‘약간’의 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예로 세상의 경제와 정치를 조종하는 비밀 슬롯가 존재한다는 음모론에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평범한 시민들보다 슬롯에 더 큰 영향력을 끼치면서 특별 대우를 받고 있다는 ‘현실’에의 불만이 반영되어 있듯 말이다. 영화 속에서도 병구의 범죄 행동과는 별개로 그가 슬롯에 대해 느끼는 분노는 타당한 면이 있으며 그의 어머니가 강 사장의 화학 공장에서 일하다 약품 중독으로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설정을 감안하면 병구가 강 사장에게 가진 적대감도 충분히 이해되는 면이 있다. 여담이지만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는 동안 병구가 제약회사 사장을 납치하는 대목에서 2024년 12월 유나이티드헬스 그룹이라는 의료 보험 회사의 CEO가 살해되고, 그 후 대부분의 여론이 오히려 그 살인자를 두둔하며 미국 의료보험 산업에 대한 불만과 증오를 드러냈던 사건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여러 비현실적인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은 잘 속는(gullible)것이 아니라 복잡하고 불공평한 현 상황을 설명해 주는 주장을 믿고 싶은, 혹은 ‘믿어야만 하는’ 입장에 더 가까울 듯도 싶다. 사실 그래서 음모론자들은 그런 가설들에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득 당한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의지’하는 상태인 것으로 이해해야 옳을 듯하며 이 작품 속 ‘병구’의 모습이 또한 그렇기도 하다. 병구는 안드로메다의 외계인들이 지구를 위협한다는 음모론 그 자체의 논리와 일관성에 충실하기보단 자신과 가족에게 고통을 안긴 사람들이 외계인인 ‘적’이라는 확신에 더 집착한다. 자신은 외계인이 아니라며 강 사장이 발악할 때는 들은 척도 하지 않던 병구가, 영화의 후반부 강 사장이 자신을 외계인이라고 인정하며 이 세계의 문제들은 외계인이 아니라 인류가 폭력성과 잔인성으로 스스로 만들어 낸 결과라고 외치자 그의 말을 의심하면서 도리어 ‘인간’ 취급을 하는 장면에서 이 태도가 두드러진다. 다시 말해 병구는 세상에 고통이 넘쳐 나고 자신의 가족이 아픔을 겪어야 했던 ‘진짜’ 이유를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고통에 대한 바카라임을 돌리고 맘껏 분풀이를 할 수 있는 ‘외부인’(the other)이 필요했던 것이다.



병구의 이런 회피적 강박과 탓할 대상으로서의 ‘남’을 향한 집착은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의 곁을 지킨 순이와의 행복한 미래를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 뿐 아니라 결국 그 자신의 파멸까지 야기하게 된다. 한때 피해자 입장이던 병구는 ‘남’을 증오하고 그에 대한 정당성을 스스로 만들어 냄으로써 어느 순간 지구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연쇄살인자가 되어 있다.


물론 그렇다고 강 사장이 결백한 피해자라는 것도 아니다. 그가 진짜 ‘외계인’이냐 아니냐 와는 상관없이 강 사장은 주가 조작 등의 여러 스캔들에 연루되어 있고 직원들의 파업을 좌절시키기 위해 구사대를 동원하는 등 이기심이 극에 달한 인물인 데다, 영화 초반부 대리 운전기사에게 무례하게 굴며 최악의 인성을 과시하기도 한다. 또한 그는 병구를 진정시키려고 외계인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같은 동족에게 고통을 주고 학대하는 것을 ‘즐기는’ 인류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지탄하지만, 동시에 외계인들이 인류가 가지고 있는 “공격 유전자”를 제거하기 위한 실험의 일환으로 병구와 그의 어머니같이 ‘불행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부과한 사실을 시인한다. 병구의 일기를 읽고 그의 불행한 과거에 공감하는 듯 보이다가도 끝까지 그를 멸시하며 죽이려 들고, 나중에 자신을 구하러 온 ‘외계인’ 부하에게 폭력을 가하는 등 그렇게나 비판했던 인류의 폭력성을 자신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의 마지막, 강 사장이 실제로 ‘외계인’이었다는 반전은 망상으로 보였던 병구의 확신을 입증하거나 그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느낌보다는 어딘지 씁쓸하고 허탈한 뒷맛을 남긴다. 병구가 그렇게나 찾던 외계인 왕자 본인인 강 사장이 지구를 멸망시킨다는 엔딩이 현실일지 병구의 상상일지는 관객들 개개인의 해석에 맡기고, 대신 이번에 영화를 감상하며 이 장면에서 떠오른 조금 다른 생각을 나누고 싶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파괴된 지구의 모습은, 병구의 병적인 ‘남 탓’에 기인한 강박과 증오, 그리고 선민의식으로 점철된 강 사장의 경멸이 충돌하며 붕괴되어 버린 슬롯나 공동체의 파편과 닮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과 구조적 불이익에 대한 분노를 - 슬롯와 제도를 바꾸려는 노력으로 승화시키는 대신 - 쉬운 표적이 될 수 있는 ‘남’에게 투사할 때, 또 상대를 이해하거나 공감하려 하지 않고 무시하며 멸시하는 방식으로 강압하면서 인간 이하로 여기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확증 편향을 고집할 때, 우리 공동체는 결국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잃게 되는 것은 부모님과 웃으며 대화하고, 우주에 관한 바카라을 즐겁게 읽고, 서커스에서 멋진 묘기를 펼치는 순이의 모습에 감탄하고, 사랑하는 연인과 달콤한 순간을 보냈던 병구의 잊혀진 기억들처럼, 힘들고 불공평한 인생 속에서도 우리를 살게 하는 사랑의 시간들이다.


어둡고 축축하던, 인물과 상황들을 점점 더 황당하고 기괴하게 내몰던 이 영화가 마지막에는 병구의 행복한 순간들로 끝을 맺는다는 점이 그래도 애틋하고 사랑스럽다. 나의 설움과 고통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원하고 원망할 상대를 찾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라는 점에서 병구 역시 결국은 측은하고 안쓰러운 죄인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같은 입장에 놓였을 때 분노나 증오가 아닌 사랑과 연대에 의지하기를 바라는 것이 감독의 수줍은 부탁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야말로 지구를 지키는 진정한 방법일 테다.




엄마 C의 시선


2만 편에 달한다는 한국 영화들 가운데 – 사실은 제가 좋아하는 한국 영화들 가운데 – 오래전(3년 전) 이 공간을 통해 저희가 다루었던 “아라한 장풍대작전”과 더불어 유독 만화영화일 것 같은 느낌의 제목을 가진 또 다른 작품이 2003년 개봉작 “지구를 지켜라!”입니다. 우연히 여름이라는 계절에 다루게 된 이 두 영화 중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명확히 코미디 장르에 속하는 작품이라고 분류할 수 있다면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는 물론 개봉 당시 코믹 영화를 연상시키는 포스터와 홍보 방식을 사용했던 “지구를 지켜라!”는 사실 코미디 영화와는 거리가 멉니다. 굳이 ‘코미디’라는 말을 붙여야 한다면 “블랙 코미디,” “호러 코미디” 등의 표현을 사용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SF와 스릴러에 뮤지컬적 요소를 혼재시킨 작품”이라는 정의가 더욱 적절할 것으로, “혼합 장르/하이브리드(Hybrid) 장르” 또는 “장르의 패러디” 방식을 채택했다고 – 워낙 ‘설왕설래’가 많은 작품이기에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지만 – 평가되기도 합니다.


국내의 유명 평론가들로부터 “2000년대 가장 인상적인 한국 영화 감독 데뷔작”(이동진), “한국 영화사상 가장 기발하고 엽기적인 데뷔작”(김봉석) 등의 찬사를 받았을 뿐더러, 연출가인 장준환에게 “2003년 제 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작품상,” “2003년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감독상,” “2003년 대한민국 영화대상 신인감독상,” “2004년 브뤼셀국제판타스틱영화제 대상” 등의 다양한 상들을 안겨 준 이 영화는, 그러나 개봉 당시 입장 관객이 7만 명에 그칠 만큼 흥행에는 크게 실패하면서 이후 장준환 감독이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와 “1987” 등의 대중성도 갖춘 영화들에 의해 ‘설욕’할 수 있기까지 근 10년간의 공백기를 갖도록 만든 작품이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흥행 실패 원인에 관한 이런저런 분석들이 대두하며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23년 7월 포스팅)와 더불어 “저주 받은 걸작”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니까요.



이 영화의 작품성이 국내 평론가뿐 아니라 해외의 거장 감독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주면서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하여 지난 해(2025년 10월) 발표되기도 했는데, 엠마 스톤(Emma Stone), 제시 플레먼스(Jesse Plemons) 등의 연기력을 자랑하는 배우들이 주연을 맡고 칸 영화제와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여러 차례 수상 경력이 있는 요르고스 란티무스(Yorgos Lanthimos)가 연출을 맡아 “부고니아(Bugonia)”라는 제목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과 가족을 둘러싼 불행을 설명할 길 없는 청년이 지구를 망치러 온 외계인이 있다고 굳게 믿으며 벌이는 납치극”이라고 소개된 이 작품의 제목 “부고니아”는 죽은 소의 사체에서 꿀벌이 생겨난다고 여긴 고대 지중해 사람들의 신화적 믿음/의식(儀式)을 칭하는 말이라고 하는데, 정육면체로 된 작은 집을 만들어 그 안에 소의 시체를 넣어 두고 꿀벌이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 의식을 일컫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배우 신하균이 연기한 원작(“지구를 지켜라!”)의 “이병구”를 제시 플레먼스가 연기한 “테디(Teddy)”로, 백윤식이 맡았던 납치 당한 CEO “강만식” 역은 엠마 스톤이 분한 “미셸(Michelle)”로, 그리고 황정민이 연기한 병구의 조력자이자 여자 친구인 “순이”는 에이단 델비스(Aidan Delbis)가 연기한 “돈(Don)”으로 각각 ‘전환’되었고 말이지요.


자신의 어린 시절, 탄광에서 일하다 사고로 팔을 잃은 아버지가 자포자기의 삶 속에서 사고로 사망하는 비극을 경험했던 병구는 이후의 삶에서도 계속적인 고통과 시련을 반복하게 되는데, 학창 시절 급우들에게 시달리는 동시에 담임교사로부터 가해지는 체벌과 모욕을 참아 내야 했고, 어머니를 괴롭히는 불량배에게 보복을 시도하다 살인미수로 입소한 소년원에서도 간수에게 심한 폭행을 당했던 것이지요. 출소 뒤 일을 시작한 공장에서 연인 사이가 된 여성이 구사대에 맞아 목숨을 잃는 일까지 겪게 되면서, 자신에게 닥쳐 온 불행들의 이유를 알 수 없고 그런 불행을 자기 삶에 끼친 사람들에 대한 분노심을 가눌 길 없던 병구는 우주의 신비에 관한 바카라들을 탐독하다 외계인의 존재에 대해서도 심취하던 차, 화학 공장(“유제화학”)에서 일하던 어머니가 약품 중독으로 식물인간이 되자 그 회사의 대표인 강만식이 외계인이라고 믿으며 그들의 음모를 밝히기 위해 납치하기에 이릅니다. 이번 개기월식까지 안드로메다 행성의 왕자를 만나지 못하면 지구에 엄청난 재앙이 몰려올 것이라는 생각에, 그 왕자와의 만남을 주선할 수 있다고 자신이 믿는 강 사장을 납치하기로 한 것입니다.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던 강만식을 병구와 순이가 힘을 합해 기절시킨 후 자신들의 아지트로 끌고 가는데, 머리카락이 외계인들 사이의 텔레파시 교신 도구라고 믿는 병구는 강만식의 머리부터 삭발시킨 후 온갖 ‘희한한’ 고문을 자행합니다. 한편 경찰청장의 사위인 강만식의 납치 사건으로 경찰 내부에도 비상이 걸리면서, 뇌물 비리 의혹으로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있지만 한때 뛰어난 수사력과 추리력을 자랑하던 “추상철” 형사도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지요. 후배 경찰인 – 그를 따르고 존경하는 – “김 형사”로부터 현장에서 발견된 약품의 도난 신고 병원 목록을 받아 수사를 이어 가던 추 형사는, 의식불명 상태인 병구의 어머니가 최근 범인이 인출한 것과 유사한 금액의 입원비를 완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병구를 범인으로 지목합니다. 그의 주소지로 찾아가 밀렵 단속을 하러 온 경찰인데 하룻밤 묵을 곳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집 안까지 들어가는 데 성공한 추 형사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도리어 그에 대한 의심을 풀게 되지만, 다음날 아침 그곳을 떠나기 전 병구의 개 “지구”가 사람 뼈(!)를 씹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김 형사에게 전화로 그 사실을 알립니다.


사실 병구는 지금까지 겪어 온 자신의 불행에 일조한 사람들을 외계인이라며 납치한 뒤 고문을 가하다 죽이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 형사의 의심을 간파하고 뒤를 따랐다가 자신의 양봉장에서 전화 통화 중이던 추 형사를 발견하곤 그의 얼굴에 꿀을 뿌려 벌떼의 집중적 공격을 받은 그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추락사하게 만듭니다. 도주 시도 중 붙잡힌 강만식이 위기 상황을 모면하려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병구의 어머니를 살릴 수 있는 해독제라며 - 자신들의 ‘실험’ 과정 중 일어나는 현상이라며 - 벤젠을 먹게 해 숨지도록 하자 복수심에 불탄 병구는 서둘러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오는데, 같은 시간 추 형사의 정보에서 실마리를 얻고 병구가 범인임을 알게 된 김 형사도 강만식을 구출하고자 병구의 집으로 걸음을 재촉합니다. 강만식을 찾아 데리고 나오다가 병구와 마주친 김 형사가 총을 쏘려던 순간 몸놀림이 민첩한(서커스단 단원인) 순이가 다시 나타나 그들을 제압하지만, 병구를 그럴 듯한 말로 속인 강만식이 곧 다가올 월식 전에 외계 왕자와 접선할 수 있는 장소라며 강릉의 화학 공장 연구실로 병구와 순이를 유인한 후 기계를 사용해 순이까지 숨지게 합니다.


어머니와 순이의 죽음으로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자폭 장치를 가동하려던 병구가 강 사장과의 처절한 몸싸움 끝에 그를 제압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김 형사의 총에 맞아 쓰러지며 결국 사망하고 맙니다. 무사히 구조된 강만식을 형사들이 차에 태워 떠나려고 하던 순간 – 이때부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는데 – 하늘에서 외계인의 우주선이 나타나 경찰들을 쓰러뜨리고 강만식을 구출하면서 그의 진짜 ‘정체’가 밝혀집니다. 강만식이 외계인일 뿐 아니라 병구의 추측처럼 왕자와 텔레파시를 주고받을 수 있는 ‘고위층’ 외계인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그가 바로 왕자 자신이라는 것 말이지요. 더 빨리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은 신하에게 불같이 화를 내던 그는 실험체 결과와 남은 실험체 수를 확인하다 지구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며 실험 중단을 명령하는데, 병구를 속여 어머니의 치료제라고 벤젠 병을 건넬 때 그가 했던, 병구의 어머니가 실험체라고 했던 말이 사실이었음도 이 대목에서 밝혀집니다. 외계인들의 모선에 오른 직후 귓볼 긴 외계인(“꾸오아아떼꾹”)으로 변모된 강만식이 “지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우주선에서는 레이저 빔이 발사되어 지구가 파괴되고, 이후 우주 공간을 떠다니는 TV 화면을 통해 병구의 삶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이 화면 위에 비춰지면서 영화는 그 막을 내립니다.



2003년 개봉 당시 극장에 직접 가서 혼자 영화를 관람했던 저는,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보며 느꼈던 혼란스러움과 약간의 황당함을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물론 포스터에 ‘낚여서’ 코미디라 생각하고 보러 간 것은 아니었고 ‘엉뚱한’ 신예 감독의 ‘기발한’ 작품 정도로 – 뭔가 특이하고 형이상학적일 수 있을 – 짐작하고 극장으로 갔던 것이지만, ‘그 정도’까지 특이하고 형이상학적(?)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병구가 강만식을 납치해서 자신의 집으로 데려올 때만 해도 그럭저럭 가벼운 마음으로 보고 있었는데, 외계인인 그의 신경 시스템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들의 약점 3곳 중 하나라는 발등에 물파스를 바르면서 피부에 빨리 흡수되도록 때수건으로 심하게 문지른 후 그 부위에 바르던 괴이한 모습부터는 점점 ‘심화’되는 내용을 따라가기가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개봉 후 20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한국 영화계에서 유달리 빈번하게 회자되며 “비운의 명작,” “과소평가된 명작,” 때로는 “과소평가됨으로써 과대평가된 작품”이라는 등의 평판을 듣다가, 결국 작년에는 할리우드의 리메이크 작품으로 낙점까지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한번쯤 깊이 있게 다루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SE-336985ee-f67a-436c-ae4e-039ac0111755.jpg?type=w966


우선 이 작품의 성격은 리메이크 작인 “부고니아”의 설명에도 사용되는 “자신과 가족을 둘러싼 불행을 설명할 길 없는 청년이 지구를 망치러 온 외계인이 있다고 굳게 믿으며 벌이는 납치극”이라는 카피에서 요약되는 바가 큰데, 얼마전 포스팅했던 “8번가의 기적(*batteries not included)” 영화평에서도 제가 간략히 언급했듯 우리 인간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어떻게든 그 ‘이유’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존재이며, 더구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축복되고 행복한 일의 연유보다는 남달리 불행하고 억울하다고 여겨지는 상황들에 대해 어떻게든 원인과 근거를 알아내고 싶어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바, 아마도 이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담당한 장준환 역시 그러한 측면에 착안해 작품을 구상하게 된 것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많이 배우지도, 여유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지도 못하다 보니 ‘광부’라는 – “3D 업종(Difficult, Dirty, Dangerous)” 중에서도 최악이라 할 – 직업 밖에 가질 수 없었으며 결국 심각한 사고를 당한 후 목숨을 잃고 만 아버지와, 역시 위험한 화학 공장에서 일하다가 약물중독으로 식물상태가 된 어머니, 그리고 노동쟁의의 참여 과정에서 구사대에 의한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애인 등에 둘러싸인 병구가 그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의 원인을 밝혀 내려다 ‘외계인’ 연구에 천착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합니다.


강만식이 우주선에 올라 외모 자체가 변하며 외계인으로서의 ‘본색’을 드러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는 그것을 죽어가는 병구의 마지막 ‘환상’이라고 이해하는 관점과, 그간의 병구의 추정이 사실이었으며 인간의 혐오스런 본성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외계인들이 실제로 지구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 공존하는 모양입니다. 물론 어느 쪽이 작가의 의도인지는 각본을 쓴 장준환 감독에게 직접 물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겠으나, 저는 어쩌면 그 자신도 정확한 결말을 모를 수 – ‘열어 둔’ 결말일 수 – 있다고, 혹은 처음 영화를 제작하던 당시와 2026년 현재의 입장이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추측합니다. 만약 저에게 둘 중 하나의 경우를 고르라고 한다면 저는 후자를 선택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만약 병구가 그토록 빈곤한 환경에서 어렵게 자라느라 수업료를 제때 내지 못한다고 매질을 가하던 교사나, 소년원에 입소한 아직 어린 소년을 ‘힘도 빽도’ 없다는 이유로 마음껏 폭행하던 교도관, 그리고 역시 뒷배경이 없어 함부로 대해도 뒤탈 없을 병구 어머니 같은 직원을 유해 화학 물질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도록 방치한 강만식 사장 같은 이들을 여러 사람들 중 하나인 보통 ‘인간’으로 당연시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첫 관람 때는 황당하게만 여겨지던, 병구가 겪어 온 상황들에 대한 강만식의 설명과 관련해서는, 이번에 다시 보며 새로운 시각으로 이해하게 되는 몇 가지 부분들도 있었습니다. 전쟁처럼 같은 종족 간의 파괴적이고 자멸적인 행위가 반복되는 이유를 설명할 때 바벨탑, 노아의 방주 사건 등을 암시하는(한 선각자가 모든 생물의 유전자 샘플을 큰 배에 싣고 오랜 시간 여러 곳을 떠돌았다며) 장면들이 나열되는 것은 물론, 그런 비극들이 보다 희망적인 종족으로 개선하려던 자신들(외계인들)의 의도와 달리 스스로 유전자 조작을 반복해 자멸과 파괴의 길을 내달리고 있는 인간 자신에 의한 ‘자업자득’이라고 했던 그의 이야기들 말이지요. 물론 이런 시각으로 보면 병구가 피해자이고 강만식이 가해자라는 구도와 정반대의 해석도 가능해지지만, 탈출 시도를 차단하려는 병구에 의해 손에 못이 박혔던 강만식이 인간에게 행해 온 자신들의 실험은 이 아름다운 행성을 망치는 조작된 유전자의 발현을 되돌리기 위한 시도였으며, 병구 가족 같은 사람들을 실험 대상으로 선택한 이유도 “왜곡된 유전자의 결합 구조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고통이기에 가장 크게 고통 받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변화(개선)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 말을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 대한 다양한 비평들 가운데 가장 저의 눈길을 끈 문장은 이 작품이 사실 “평가가 아닌 연대감을 요구하는 영화”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구를 지켜라!” 이후 22년만에 리메이크된 “부고니아”에 등장하는 CEO 미셸은 – 직접 영화를 감상하진 못했지만 – 원작의 강만식 사장보다 조금은 더 ‘양심적’인 인물로 설정되었다고 하는데, 어머니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사태에 대해 테디 앞에서 정중히 사과하며 치료에 필요한 비용 전액을 부담하겠다고 약속하고, 인간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은 계속하더라도 자신들의 기술력을 사용해 ‘더 나은’ 지구를 만들겠다고 약속하는 등의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지요. 모쪼록 22년의 시차가 불러온 작품 간의 작은 차이가 그나마 실제 현실을 반영하는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왕조시대를 배경으로 한 한국의 사극이나 로마제국 당시를 그린 유럽의 역사극 등을 볼 때마다 지금의 현실과 조금치도 달라지지 않은, 동서고금을 불문한 부패하고 무자비한 세상의 양태, 이기적이고 반인륜적인 인간들의 행태로 인해 실망을 거듭하게 되던 마음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얻을 수 있도록 말이지요.

작가의 이전글초콜렛: ‘달콤함’을 ‘우정’으로 승화시킨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