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C의 시선
영화 “초콜렛(Chocolat)”은 영국–프랑스계 작가인 조앤 해리스(Joanne Harris)에 의해 1999년 발간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하여 2000년 개봉(한국에서는 2001년 공개)되었던 작품입니다. 작가 자신이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프랑스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는 데다, 영화의 주인공인 쥘리에트 비노슈(Juliette Binoche)가 프랑스인이고 영화의 전체 배경도 프랑스 부르고뉴(Burgundy) 지방의 한 마을이어서인지 – 코트도르(Côte-d'Or)에 위치한 중세 마을 플라비니쉬로즈레(Flavigny-sur-Ozerain)에서 대부분 촬영되었다고 하니 – 영국과 미국의 공동 제작으로 만들어진 양국 합작품임에도 오래전 관람했던 내용과 장면들을 떠올릴 때마다 프랑스 영화처럼 기억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개봉 당시 한국에서 “초콜렛”이라는 제목을 사용했지만 한국어 맞춤법에 따른다면 “초콜릿”으로 표기해야 옳을 이 영화는 그 원제가 불어 “Chocolat”이기에 사실상 “쇼콜라”로 읽어야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으로, 어느 언어로 읽어도 기분 좋은 어감의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2001년도 아카데미상(Academy Awards)과 글든 글로브상(Golden Globes)에서 최우수 작품상, 최우수 각본상, 최우수 음악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등의 여러 부문에 후보로 오른 후 제 14회 유럽 영화상 여우주연상(Juliette Binoche)과 제 7회 미국배우조합상 여우조연상(Judi Dench)을 최종 수상한 바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쥘리에트 비노슈는 – “세 가지 색 블루(Trois couleurs: Bleu)”에 출연하며 한국 관객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 이름(성) 앞에 정관사를 붙인 “La Binoche”라는 명칭으로 불릴 만큼 프랑스에서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배우로, 세계 3대 영화제로 일컬어지는 “칸 영화제,” “베니스 국제 영화제,” “베를린 국제 영화제” 모두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최초, 유일의 여배우로도 유명합니다.
1959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가 프랑스의 “랑스케네(Lansquenet)”라는 - 가상의 지역인 - 적막한 마을을 첫 장면에 비춰 주면, 그에 이어 이 마을이 사람들에게 “평온(Tranquility)”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는 내레이션이 등장합니다. 주민들 삶의 세세한 부분은 물론 주일 미사 내용까지 일일이 관장하는 “르노 백작(Comte de Reynaud)”이 시장직을 맡고 있는 이 작은 마을은 ‘종교 생활’을 포함한 모든 일상이 공동체 형태로 운영되면서 각 개인의 사적인 삶은 거의 금기시되는 수구적 지역입니다. 조용하고도 ‘고루한’ 그 마을에 차가운 북풍이 몰아치던 어느 겨울날 빨간 망토를 맞춰 입은 모녀가 거센 눈보라를 헤치고 들어선 이후 마을의 오랜 ‘평온’이 깨어지기 시작하는데, 아래층에 허름한 가게 자리가 있는 작은 건물로 딸 “아누크(Anouk)”를 데리고 들어가 상점과 위층 아파트를 함께 빌어 장사하며 생활하겠다고 말한 엄마 “비안(Vianne)은, 주인인 “아르망(Armande)”에게 월세를 내고 짐을 푼 후 오래도록 방치되어 거미줄 투성이던 가게를 부지런히 쓸고 닦은 후 귀엽고도 사랑스럽게 꾸며진 초콜릿 가게의 문을 엽니다.
고요하고 단조로운 마을의 외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들 모녀뿐 아니라 보통의 초콜릿 상점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의 가게 안으로 늘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온 마을 사람들이 쉽게 발을 들이지는 못하지만, 나름 ‘용감하게’ 그곳을 방문했던 이웃들에게 그녀가 만든 초콜릿은 신비한 – 우울하던 사람들을 행복하게, 무기력한 사람들을 열정적으로 만드는 – 힘을 발휘합니다. 오픈을 준비 중인 그녀를 방문해 주일 미사 참여를 강권했다 거절 당한 르노 백작은, 결혼한 적이 없다면서 딸이 있는 데다가 사순절에도 가게 문을 열겠다고 하는 비안을 마을의 안정과 질서를 해칠 위험성이 큰 ‘사탄’으로 규정합니다. 갓 부임한 젊고 미숙한 신부 “앙리(Henri)”의 설교문을 미리 읽어 보고 교정까지 해서 돌려주곤 하는 그가, 새로 문을 연 초콜릿 가게에 한번 가 보도록 신부에게 권하면서 “자신의 적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니까(It’s important to know one’s enemy)”라는 ‘조언’을 덧붙일 정도로 말이지요.
마을 사람들이 그의 ‘권력’ 앞에는 움츠러들지만 ‘권위’는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시장 르노는 이곳저곳을 다니며 비안의 험담을 늘어놓고 아누크가 ‘사생아’라는 것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데, 이런 사실은 머지않아 비안의 귀에도 들어가게 됩니다. 비안이 세 든 집과 가게의 주인인 아르망이 비안이 만들어 준 핫초콜릿을 마시며 털어 놓은 속마음을 통해 그녀가 자기 딸인(르노의 비서로 근무하고 있는) “카롤린(Caroline)”과 불편한 관계이고 그래서 카롤린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뤼크(Luc)”를 그리워하면서도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뤼크를 초콜릿 가게로 초대해 할머니와 만날 수 있게 해 주려고 애쓰는 비안에게 뤼크가 곤란해하며 전해 준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지요. 이 말을 듣고 화가 치솟은 비안이 시장의 사무실로 직접 찾아가 자신의 죄가 대체 무언지 - 자신이 법을 어기거나 사람을 해친 일이 있는지 - 따져 묻자 르노는 그 힐문에 대한 대답 대신 그녀의 가게가 부활절 전에 문을 닫게 될 거라는 악의 섞인 ‘예언’으로 응수합니다.
비안 못지않게 마을 안에서 완고한 주민들에 의해 백안시되고 있는 또 하나의 인물은 “조세핀(Josephine)”이라는 여성으로, 차림새가 단정치 않고 손버릇도 나빠 보이던 그녀는 사실 남편 “세르주(Serge)”로부터 구타를 당하며 하녀 취급을 받고 사는 자기 삶에 대한 도피 심리를 도벽과 같은 일탈 행위로 표출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자신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따돌림 당하는 비안에게 ‘동병상련’을 느껴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된 그녀가 남편을 떠나 비안의 가게로 ‘피신’해서 초콜릿 만드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자 비안에 대한 르노와 세르주의 악감정이 더욱 격화되는데, 배로 유랑하는 집시 일행이 그 마을의 강둑에 다다라 잠시 머무는 상황이 벌어지며 사태는 훨씬 더 심각해집니다. 이런 ‘불청객’들을 용인할 수 없다는 르노의 격노와 달리 시의회가 집시 일행을 쫓아낼 법적 명분이 없다고 – 강변은 모든 사람의 공동 소유물이기에 – 판단했음에도 시장은 여전히 마을 사람들을 선동하며 이들의 마을 방문을 보이콧하도록 독려하지요.
그들을 맞으러 아누크와 함께 강가에 나갔던 비안이 집시 일행의 리더 격인 “루(Roux)”와 왕래를 이어 가다 연인의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되지만, 자신과 친구가 되면 다른 이들과는 적이 될 것(You make friends with us… you’ll make enemies of others)이라던 그의 ‘경고’처럼 이런 그들의 관계는 결코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안 그래도 비안에게 반감을 갖고 있던 조세핀의 남편 세르주가 비안이 주최한 아르망의 70세 생일 잔치 중 디저트 파티가 한창이던 루의 배에 불을 질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뻔하는 아찔한 일이 벌어진 후 처음부터 비안에게 가해질 불이익을 걱정하던 루는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비안의 집과 루의 배에서 행복한 생일 파티를 치뤘던 아르망이 그날 밤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아르망의 장례식에서는 그녀의 사망이 비안의 바카라임이라는 – 당뇨가 있는 그녀에게 초콜릿을 준 때문이라는 – 압박이 공공연히 가해지고, 이 일련의 일들로 자바카라에 빠진 비안도 마을을 떠나겠다고 마음 먹지요. 그러나 비안 덕분에 삶의 희망을 되찾았던 조세핀이, 역시 그녀로부터 얻은 생기와 활력으로 삶의 모습이 변화된 마을 사람들을 비안의 가게로 모아 그녀가 결코 ‘이방인'이 아니며 마을에 꼭 필요한 존재임을 알려 주면서, 이에 감동한 비안은 그곳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바꿉니다.
개봉 직후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동화나 판타지 같은 환상적 내용과 분위기에 매료되어 영화의 중반 이후 등장함에도 작품 전체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치는 “루”와 비안의 사랑을 로맨틱한 인상으로 뇌리에 남겨 두었고, ‘자유로운 영혼’임을 자부하던 여성이 자신보다 ‘더 자유로운 영혼’의 상대를 만난 탓에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는 점에서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와 유사한 측면이 많다고 생각했었지만,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본 이후엔 그런 낭만적 측면보다 비안의 영향으로 삶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지고 이후에는 오히려 입장이 바뀌어 비안의 삶에 의미 있는 존재로 역할하는 조세핀과 나누는 ‘인간적’ 관계에 더욱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는 남편을 자신 역시 사랑할 수 없으면서도 스스로를 속이며 참고 살아왔던 조세핀이, 마을을 떠나려는 비안에게 “당신이 떠나면 모든 것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카롤린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고 데려와 비안으로 하여금 자신이 이웃들로부터 사랑 받는 존재인 것을 깨닫고 그곳에 남기로 마음을 바꾸도록 - 그래서 마을을 더욱 ‘변화’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 돕기에 말이지요.
딸과 함께 이곳저곳을 떠돌며 내심 많이 지쳤을 – 자신도 이제는 어딘가에 정착해 살고 싶었을 – 비안이 그 마을에서도 다시 떠나야겠다고 결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시장인 르노와 아르망의 딸 카롤린, 그리고 조세핀의 남편인 세르주 등으로 대표되는 완고하고 강퍅한 이웃들로서, 그런 그들의 억압의 결과는 조세핀의 비정상적 행동, 카롤린 아들의 해괴한 그림, 르노 스스로의 예상 밖 돌발 행위와 같은 결과로 발현됩니다. 도벽이나 대인 기피 같은 이상 행동을 보이던 조세핀의 경우는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엄마의 과잉보호와 지나친 통제 아래 놓여 있던 뤼크는 그림에 소질이 있음에도 온통 뼈와 해골, 창과 칼, 시체로 가득한 그림들만 그리는 기현상을 보입니다. 성당에 나오지 않는 비안을 부도덕한 인간으로 낙인 찍으면서 막상 본인이 사순절 기간 지킨 금식은 ‘억지로’ 참는 - ‘기쁨'과 ‘자의'로서가 아니라 - 행위였던 르노는, 그의 그런 면모를 견디기 어려웠을 아내가 자신을 떠나 끝내 돌아오지 않자 그동안 억눌러 온 감정과 욕망에의 자제력이 한계치를 초과했는지 비안의 가게에 무단 침입해 정신을 잃을 만큼 초콜릿을 탐닉하다 다음날 아침 비안과 앙리 신부에게 추한 몰골로 발견되기도 하니까요.
음료수를 사기 위해 자신의 가게로 들어온 집시 루를 향해 조세핀의 남편 세르주는 “나는 짐승에겐 물건을 팔지 않아(I don’t serve animals)”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는데, 이런 그의 모습은 비안의 행실을 비난하려 동네방네 돌아다닐 때 그녀의 딸인 아누크가 “불법적인 아이(illegitimate child)“라고 소근대던 르노의 모습과도 오버랩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사실상 “사생아(私生兒)”라는, 한자로는 그저 “사사로이(개인적 관계로/법률상 정식 혼인 관계가 아닌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평범한' 의미의 어휘가 영어로는 여전히 “부정한/위법적 아이”로 표현되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스스로를 고고한 신앙인이라 자처하면서도 본인의 가치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인간 이하’나 ‘부정한 존재’로 지칭하는 그들의 - 70년 전 다른 나라에 살았던 - 모습과 2026년을 살아가는 오늘날 한국 기독교인들의 모습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인간 가운데 부당한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거나 ‘불법적’ 인간으로 분류되어야 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테니 말이지요.
사도 바울의 “…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사람들이나 탐욕하는 사람들, 약탈하는 사람들이나 우상숭배하는 사람들과 전혀 어울리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하려면 여러분은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말성경 (I wasn’t talking about unbelievers who indulge in sexual sin, or are greedy, or cheat people, or worship idols. You would have to leave this world to avoid people like that; NLT)”라는 고언(고전 5:10)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향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나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우리말성경 (Assuredly, I say to you that tax collectors and harlots enter the kingdom of God before you; NKJV)”라고 하신 예수님의 질바카라(마 21:31)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작정된 시기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말성경 (while we were still weak, at the right time Christ died for the ungodly; ESV)”라는 엄숙한 선언(롬 5:6)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고 말입니다.
딸 J의 시선
한국에서 살던 어린 시절, 엄마가 집안 곳곳에 영화 포스터들을 감각적으로 걸어 두었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그 작품들을 실제로 보기 전부터 포스터를 통해 영화의 내용이나 분위기 등을 상상하곤 했는데, 포스터만으론 도무지 내용을 추리할 수 없던 몇몇 작품들과 달리 [초콜렛]의 포스터를 보면서는 초콜릿을 만드는 얘기겠거니, 하고 스스로 납득했더랬다. 하지만 이 영화를 처음 관람했을 때는 예상보다 훨씬 귀엽고 장난스러운 분위기에 조금 당황스러웠고, 지금까지도 줄리엣 비노쉬가 조니 뎁에게 초콜릿을 먹여 주는 이 작품의 유명한 포스터를 보면 여전히 ‘인지부조화’ 비슷한 느낌을 갖게 된다.
따뜻한 가족 영화와 귀여운 로맨스를 여럿 탄생시킨 라세 할스트룀 감독의 2000년 작 [초콜렛](원제의 프랑스어 발음을 따르면 [쇼콜라]가 더 정확하겠지만)은 조앤 해리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멕시코 소설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Like Water for Chocolate)과도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해리스가 에스키벨의 소설을 표절했다는 뜻이 아니라 에스키벨 및 여러 남미 출신 작가들이 즐겨 쓰는 마술적 사실주의(magic realism), 특히 ‘음식’과 ‘요리’라는 문화적 요소를 상징적으로 이용하는 작법이 이 작품에서도 드러난다는 것이다.
영화는 1950년대, 100년간 "아무 변화가 없었다"는 사실을 자랑으로 여기는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주민들 모두가 마을의 암묵적 규칙을 예외 없이 따르느라 조금이라도 '튀는' 것을 큰 수치로 여기는 단조로운 삶의 풍경이 이어지는 가운데, 북풍을 따라 발길을 이끌던 이방인 모녀가 이 마을에 불현듯 나타난다. 아름다운 엄마 "비안"(줄리엣 비노쉬)과 눈에 보이지 않는 캥거루 "판투프"가 유일한 친구인 딸 "아누크"는 자유분방한 외양과 태도를 서슴없이 드러내며 절제와 순응이 미덕인 마을의 고지식한 사람들을 크게 당황시킬 뿐 아니라 사순절(Lent) 기간에 초콜릿 가게를 여는 만행(?)도 주저하지 않는다. 마을의 ‘큰 어른’ 역할을 자처하면서 공동체의 규율을 열정적으로 수호해 온 르노 백작(알프레드 몰리나)은 갑자기 나타나 마을을 어지럽히는 비안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남편 없는 그녀의 사생활을 은근히 퍼뜨리거나 남들과 다른 그녀의 행동을 비난하는 내용을 미사 설교문에 넣도록 하며 비안을 따돌리려고 든다.
하지만 비안이 직접 만들어 내는 초콜릿에는 무언가 신비한 힘이 있는 듯하고, 그녀가 선물한 초콜릿을 통해 과거의 정열을 되찾은 부부, 몇 십년 만에야 용기를 내어 손을 맞잡은 노년의 연인, 저열하고 폭력적인 남편을 떠나 새 삶을 살게 된 조세핀(레나 올린), 자신의 개인사를 털어 놓는 초콜릿 가게 건물의 주인 아르망(주디 덴치) 등 비안의 아군은 점점 늘어만 간다. 르노 백작이 비안과 ‘대적’하는 일에 더욱 전력하던 무렵, "강의 쥐새끼"(River Rats)라고 불리며 멸시 당하는 아일랜드 출신 유랑자들이 마을 근처 강가에 배를 정박시키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이 유랑객들을 유흥과 범죄를 일삼는 타락한 무리로 규정하고 마을에서 내쫓으려 들던 르노 백작은, 유랑단의 우두머리인 "루"(조니 뎁)가 비안과 친해지며 몇몇 마을 사람들과도 가까워지자 분노심을 감추지 못한다. 아내의 일로 비안에게 악감정을 품은 조세핀의 남편 세르주(피터 스토메어)가 유랑단의 배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하며 이들 사이의 긴장 상태가 극단으로 치닫는 가운데, 르노 백작은 어느 날 밤 무언가에 씌인 사람처럼 비안의 초콜릿 가게로 향한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공동체에 생기 가득한 이방인(주로 젊은 여성)이 등장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는 꽤 흔한 편으로, 2003년 작 [도그빌](Dogville)처럼 잔인하고 냉소적으로 서사를 풀어 나가는 ‘절망편’이 있는 반면 이 작품은 귀엽고 장난스러운, ‘어른들을 위한 동화’와도 같은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인물들의 삶을 비춘다. 사실 이 작품에는 ‘악역’이 없다고도 할 수 있는데 - 그중 세르주가 전통적 의미에서의 ‘악인’이라 할 수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도 약하고 못난 사람일 뿐이다 - 등장 인물들은 모두 이런저런 결함과 비겁하고 이기적인 면을 갖고 있음에도 전반적으론 공감을 불러일으키ㅣ는 보통 사람들이다. 비안의 가장 큰 ‘적수’라고 할 수 있을 르노 백작이 특히 그런데, 귀족적인 말투나 행동거지와 달리 꽤나 비열한 방식으로 비안을 깎아내려 소외시키려 들고, 부임한지 얼마 안 된 젊은 신부 앙리(휴 오코너)를 불쌍할 정도로 들볶으며 자신의 엄격한 도덕성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그는, 그러나 아내 조세핀을 폭행한 세르주의 행위를 알게 되자 의로운 분노를 내보이면서 그를 교화하고 ‘개심’시켜 자신의 신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한다. 남들에게 단호한 만큼 자기 자신에게도 혹독하게 굴고, 세르주가 비안과 조세핀에 대한 복수로 유랑단의 배에 불을 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그의 끔찍한 범죄에 경악하며 심하게 화를 내기도 하고 말이다. 다시 말해 르노 백작은 위선자도, 본인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신념까지 저버릴 수 있는 광신도도 아닌, 최대한 선하고 옳게 살아 보고자 몸부림치는 ‘선의’의 인물인 것이다.
그렇기에 비안의 ‘초콜릿’이 영화 속에서 르노 백작에게 상징하는 것은 어떤 육체적 유혹이나 타락은 아닌 듯하다(물론 이 작품 속의 초콜릿도 많은 대중 매체에서 그렇듯 관능이나 쾌락의 상징으로 쓰이는 때가 있기는 하다). 르노 백작의 가장 큰 두려움은 초콜릿을 통해 자신의 이성과 절제력이 무너지며 ‘죄’를 짓게 되는 일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 다시 말해 ‘삶의 방식’ 그 자체가 무너지는 상황이다. 절제(더 정확히는 ‘결핍’)에 의한 성취와 자신의 삶을 엄격한 규율 안에 구겨 넣음으로써 얻게 되는 안정감에 의지해 평생을 살아온 그에겐 ‘누림’(enjoyment)에서 오는 기쁨이나 자유를 통해 얻는 평안이 이해할 수 없는 '무질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더 큰 문제는 르노 백작이 ‘결핍’과 ‘억제’로 점철된 지금의 삶에 완벽한 확신이 없다는 것으로, 말쑥한 겉모습과 달리 사실은 몇 개월 전 집을 나간 듯한 아내의 문제로 힘들어하는 동시에 자신의 비서이기도 한 카롤린(캐리-앤 모스)에게 조심스런 호감을 느끼고 있고, 사순절을 지키기 위해 거의 굶는 가운데에도 가정부가 두고 간 달콤한 잼에 자꾸 눈길을 보내는 모습을 숨기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방식과 따르고 있는 신념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이나 확신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의 삶과 철학을 뒤흔들 비안의 초콜릿을 두려워하는 셈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르노 백작이 비안을 “적그리스도”처럼 경계하는 것과 달리 비안이 이 마을에 끼치는 영향들은 꽤나 건설적이고 모범적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초콜릿이 열정과 욕망을 일깨운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부부 금슬을 돕고, 외로운 노년의 신사 숙녀를 이어 주고, 오랫동안 남남처럼 지내야 했던 할머니와 손자의 관계를 회복시키며, 가정폭력을 겪으면서 스스로를 가두고 미워했던 여인의 삶을 해방시켰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비안이 마을 내에서 추문 하나 일으키지 않은 데다가 나중에는 그 마을에서 초콜릿 페스티발을 열며 지역 경제를 부흥(?)시키는 일에 일조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존재하지 않는 침대 밑 괴물을 무서워하는 어린아이처럼 르노 백작과 몇몇 마을 사람들이 비안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과 경계심에는 사실 실체가 없음에도,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비안에게서 거리를 두고 그녀로부터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으려 한다.
영화의 후반, 이성을 잃고 한밤에 비안의 초콜릿 가게에 침입한 르노 백작의 모습에서는 그래서 어떤 ‘희망’이 보인다. 예쁘게 진열된 초콜릿 작품들을 부서뜨리다 결국 초콜릿을 집어 먹기 시작한 그는, 그 달콤함에 취해 웃다가 나중에는 아이처럼 울어 버린다. 유혹을 이겨 내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의 발로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이번에 다시 영화를 보는 동안은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상대가 사실은 그저 달고 귀엽고 삶에 행복을 더해 주는 ‘별 것 없는’ 무언가임을 깨달은 이후의 허탈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그토록 집착적으로 따르던 신념과 삶의 방식 또한 사실은 ‘별 것 아니’었음을 인정하게 된 후의 허무감일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초콜릿을 먹다 지쳐 잠이 든 다음 날 아침 르노 백작의 불쌍한 꼬라지(?)에서는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거나 잘못을 저지른 자의 볼품없음보다는 깨달음을 얻은, 혹은 세례를 받고 새로 태어난 사람의 얼떨떨함이 느껴진다. 정신을 차린 그가 가장 먼저 입에 대는 것이 비안이 내어 준 “물 한 잔”이라는 것 역시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공동체가 점점 경직되고 배타적으로 변해 가는 이유를 두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신념이나 이념을 기반으로 상대편을 거부하며 완벽하게 타자화(othering)하는 경우에 대해 특히 그렇다. 무시무시할 만큼 집요한 독선과 빗나간 열정으로 타인을 재단하고 정죄하며 밀어내는 행위는 사실 자신의 삶과 생각에 대한 불안감, 또는 확신의 부재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진정한 확신과 애정이 없기에 조금이라도 나의 삶을 흔들고 변화시킬 수 있을 요소들을 향해 예민한 증오로 반응하는 것은 혹 아닐지. 그에 대한 단단한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우리의 삶과 슬롯에 침입한 위험 요소처럼 보이는 생각들과, 사람들과, 접근 방식이, 사실은 예쁘고 달콤한, 우리 인생에 작은 기쁨을 더해 주는 선물임을 깨달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단단한 기반 위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상대의 아름답고 사랑스런 부분에서 선한 영향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상대에게도 그런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쳐와도 당당할 듯하던 비안은 유랑단의 배가 불타 없어지자 모든 의욕을 잃은 사람처럼 보이고, 계속해서 자신들 모녀를 거부하며 이방인 취급하는 마을에서 영영 떠나 버리려고 한다. 바람따라 정처없이 떠돌던 자신의 어머니처럼 비안은 이번에도 문제와 상처로부터 도망치려 하지만, 그녀의 도움으로 자유를 선택한 친구 조세핀이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다 함께 초콜릿을 만드는 광경을 그녀 앞에 펼쳐 보인다. 위로를 받은 비안은 마을에 남기를 선택하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낯선 곳으로 이끌려는 듯 찾아온 장난스런 북풍에 어머니의 유해를 날려 보내며 지금까지의 방황에 마침표를 찍는다. 비안이 마을에 영향을 끼친 것처럼 마을 사람들 또한 비안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건넨 것이다. 스스로의 신념과 믿음에 진정한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상대와의 교류를 통해 좋은 쪽으로 변화하고 진화할 뿐 아니라 상대의 삶 또한 바꾸고 어루만질 수 있음이 이 장면에서 확인된다.
우리를 죄로 이끌려는 상황과 요소들을 경계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자세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 창조의 순간 우리에게 내려진 마땅히 누려야 할 축복들을 제대로 인식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싶다. 짧고 짧은 인생을 증오와 정죄에 낭비하며 스스로를 결핍과 공포의 한계에 가두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늘 안타깝다. 나와 다른 상대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거리를 두는 대신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위로를 주고받으며 진정한 공동체를 일구려는 이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악의와 경멸, 상처를 피해 세상을 떠돌던 영혼들이 단단하고 확실한 믿음에 뿌리를 내린 이웃들의 곁으로 옮겨 와 잠든 바람처럼 고요한 휴식과 평온을 얻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