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J의 시선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그러니까 OTT 플랫폼 대신 VHS 플레이어(!)에 비디오테이프(!!)를 넣어 - 요즘 청소년들은 들어 본 적도 없을지 모르는 - 영화를 보던 나의 유년기 자주 감상했던 작품들 중 하나가 1987년 작 [Batteries Not Included (8번가의 기적)]였다. 10대 시절 이후 다시 보지 않아 거의 잊고 있다시피 하던 이 영화를 엄마의 제안으로 이번 주 감상작의 주인공으로 정하면서 무척 반가웠다. 이제는 비디오테이프를 집어 드는 대신 OTT 플랫폼에서 작품을 재생하며 뭔가 남다른 감회를 느끼기도 했고 말이다. 한국에선 [8번가의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는 이 작품의 원제는 사실 [배터리 미포함] - 즉, 장난감이나 전자기기 제품을 구입할 때 보게 되는 안내 문구이다. 당시의 한국 관객들에겐 생소한 문장이었을 테니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제목을 의역한 것이리라 짐작되지만 원래의 영어 제목에서 느껴지는 장난기와 소소한 귀여움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점은 살짝 아쉽다.
작품은 한국에서 붙인 제목대로 뉴욕 이스트 빌리지(East Village)의 8번가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한다. 부유한 사업가 "레이시"의 건설 회사가 주변 땅들을 모두 매입해 호화 고층 빌딩 건축을 계획하는 가운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아파트 한 채만이 꿋꿋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재 그곳의 주민이라곤 건물 1층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노인 프랭크(험 크로닌)와 그의 아내 페이(제시카 탠디), 만삭의 몸으로 혼자 삶을 일구어 나가는 마리사(엘리자베스 페냐)와 화가인 메이슨(데니스 부치캐리스), 한때 유명 복싱 선수였지만 지금은 건물의 관리인으로 일하는 해리(프랭크 맥레이)뿐이다. 어떻게든 공사 기간에 맞춰 건물을 철거하려는 건설업자는 후한 보상금을 제시하는 동시에 동네 건달 칼로스(마이클 카마인)를 고용해 위협을 가하며 주민들을 몰아내려 들지만, 이처럼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입주민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칼로스의 행패로 프랭크의 식당은 난장판이 되고, 치매 증상을 보이는 아내 페이를 돌보는 일만도 힘에 부친 프랭크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초라한 모습으로 ‘누군가’에게 - 혹은 ‘아무나’(“somebody”)에게 - 도움을 청한다. 그날 밤 프랭크와 페이의 작은 아파트로 들어온 ‘무언가’가 페이의 잠을 깨우는데, 초소형 우주선처럼 생긴 작은 비행 물체 2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외계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며 ‘남편’과 ‘아내’로 보이는 이 한 쌍의 로봇들이 깊은 밤 아파트 건물 전체를 탐색한 후, 다음날 아침 그곳 주민들은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던 거실, 타일이 부서진 로비 바닥, 구멍이 뚫렸던 현관문 등이 완벽하게 고쳐져 있는 기이한 현장을 목격한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며 모이게 된 이들은 순수해진(?) 정신만큼 편견이 없는 페이의 안내로 건물 옥상의 작은 창고에 자리 잡은 두 로봇을 마주하고, 그들이 금속과 전기를 음식 삼아 먹으며 망가진 물건을 '즐겨' 고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주민들은 이 신비로운 생명체(?)와의 기묘한 동거를 시작하고, 로봇 부부는 주민들의 보호 아래 아이(!) 셋까지 낳으며 아파트 주민들의 삶 속으로 녹아든다. 수리와 보수에 재능이 있을 뿐 아니라 말도 잘 알아듣고 일도 열심히 하는 이들 덕분에 프랭크의 식당은 다시 번창하고, 상대의 이름도 모르던 주민들은 서로 가까이 교류하며 점차 웃음을 되찾는다.
기가 꺾이기는 커녕 더욱 똘똘 뭉치는 아파트 주민들의 행보에 인내심을 잃은 건설업체는 더 이상 칼로스에게 의지하지 않고 새로운 ‘철거 전문가’를 고용하는 등 보다 극단적인 방법을 모색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그리고 이 일을 성공의 발판으로 여기고 있던) 칼로스가 조급해진 마음에 건물의 물과 전기를 끊으려 하는 과정에서, 막아서던 ‘아빠’ 로봇이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고 이에 놀란 아기 로봇들이 달아나 실종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아파트 주민들의 갖은 노력 끝에 세 아이를 찾기는 하지만 이 일로 화가 난 로봇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 버리고, 혼자 집에 남아 있던 페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철거 전문가가 건물을 불태우면서 그녀의 신변이 큰 위험에 놓이게 된다.
연출을 맡은 감독은 매튜 로빈스임에도 제작자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감성이 오히려 더 진하게 느껴지는 이 작품은, 실제로 스필버그가 자신의 TV 시리즈를 위해 만들어 낸 아이디어에 기반을 두고 있기도 하다. 귀엽고 특이한 외계 생명체가 인간과 만나 우정(?)을 쌓는다는 내용은 스필버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E.T.]와 비슷한 면이 많지만, 그가 제작한 영화들 중에서도 특히 전형적이지 않은, 이성보다는 감성을 앞세운 따뜻한 SF 장르의 대표격이라 할 1985년 작 [백 투 더 퓨처]나 소년들의 모험 영화 [구니스]와도 결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고, 우주선처럼 생긴 로봇들의 디자인에서는 감독의 1977년 작 [미지와의 조우]가 언뜻 보이기도 한다(물론 훨씬 더 귀엽게 변형된 모습으로, 여담이지만 같은 해인 1977년 개봉한 [스타 워즈]의 비행체들이 생각나는 측면도 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작품은 스필버그 감독을 ‘거장’의 반열에 올린 영화들과는 차원이 좀 다르다. 뭐랄까, 스필버그 감독이 뇌에 힘 빼고 즐겁게 제작에 참여하면 나올 것 같은 결과물이랄까? 따뜻하고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작품이지만 영화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보기도 어려울 테고 말이다. 그래서 영화를 다시 보기 전엔 5월 가정의 달이 가기 전에 다룰 만한 사랑스러운 가족 영화, 혹은 힐링물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음. 영화를 보는 내내 바보처럼 계속 울었다. 작품 그 자체의 훌륭함을 이제야 발견했다기보다 달라진 시선, 성숙해진 관점으로 영화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았다는 설명이 더 적절할 텐데, 이런 해석의 여백을 남기는 것 또한 작품의 역량을 증명하는 요인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 영화를 보는 동안 계속해서 ‘공동체’에 대해 곱씹게 되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의 나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였기도 하다. 흔히 말하는 ‘쿨병’에 걸려 세상과 인류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관망하는 것이 멋있고 ‘현실적’이라 생각하던 예전과 달리, 철이 들어 갈수록 희망과 낙관으로 슬롯 속에 온몸을 던질 수 있는 용기를 보다 선망하게 된다. 우리가 경험하는 실질적 구원, 또한 인간을 통해 일하시는 주님의 역사는 혼자 동떨어져 있는 개인이 아닌, 여러 사람이 모여 교류하는 ‘공동체’를 통해서 외에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하나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작품 초반, 아파트 주민들의 모습에서는 균열된 슬롯의 실태가 그대로 드러난다. 아파트 건물에 마지막까지 남은 네 가구의 사람들은 이곳에서 나가지 않겠다는 의지와 목표에서 공통점을 보이지만 서로의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단절’ 상태의 관계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같은 주소에 사는 ‘집합체’라고 할 수는 있어도 ‘공동체’라고는 부를 수 없는 사이인 것이다. 흥미롭게도 서로가 서로로부터 차단된 상황에서의 그들은 ‘현실’을 살면서도 제대로 현실을 마주하지 못한다. 아들 "바비"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옛 기억 속으로 도피한 페이는 물론, 아내와 요양원에서 편히 살 수 있을 보상금을 아집 비슷한 무언가로 거부하는 프랭크나, 임신한 자신을 두고 제멋대로 사는 무바카라임한 애인을 기다리는 동안 두려운 마음에 혼자 산부인과도 가지 못했으면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는 마리사, 다 쓰러져가는 이 아파트가 ‘현실’(reality)이라 중요하다고 우기면서도 예술이라는 낭만(혹은 허상)과의 괴리로 인해 괴로워하는 메이슨, 복싱 선수를 그만둔 후론 허름한 아파트에서 TV를 보며 광고 문구로만 소통하는 해리 등 이들 모두가 각박한 현실 속에서 길을 잃어 버린 사람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곧 철거될 건물 입구의 낡은 바닥을 고치고 있는 해리의 묵묵한 노력은 가망 없어 보임을 넘어 어리석은 낭비로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이때 갑자기 등장하는 외계 로봇들, 그러니까 이 ‘비현실적’인 존재들은 마치 ‘기적’처럼 보이고, 실제로도 이 우렁로봇(?)들이 고장난 물건과 가구를 고쳐 준다는 설정에는 일정 부분 초자연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이 판타지적인 존재들은 아파트 주민들이 처한 문제를 없애 주거나 현실을 바꿔 주는 기적을 행한다기보다 그들이 현실을 마주하고 스스로 바꿀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엉망으로 부숴졌던 식당이 복구된 뒤 실제로 손님들을 불러 모으고 주변 인부들의 마음까지 움직이는 것은 프랭크와 페이이다. '로봇 사건'으로 만나게 된 후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공유하게 된 메이슨과 마리사는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 현실이 여전함에도 각각 화가다운 열정과 자부심을 되찾거나 이기적인 연인의 실체에 눈을 뜨며 자기희생적 관계를 끊어 내는 변모를 보인다.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꾸조차 않던 해리 또한 로봇 부부의 막내 아기를 돌보며 점차 다른 주민들과 어울리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로봇들과 소통할 뿐 아니라 왕년의 실력으로 칼로스를 쫓아내기까지 한다. 영화 속 진짜 ‘기적’은 외계 로봇이 날아다니며 건물 구석구석을 보수하고 햄버거를 굽는 판타지적 상황이 아니라 같은 건물에 살면서도 서로에게 이방인과 다름없던 주민들이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면서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함께 감당하기 시작한 변화된 일상이다. 로봇 가족을 걱정하며 아이들을 찾아나선 그들이 서로 손을 꼭 잡고 뉴욕 시내를 누비는 모습을 볼 때 여러 모로 뭉클했는데, 이렇게 뿌려진 공동체의 씨앗은 영화 전반 가장 직접적으로 주민들에게 ‘악’을 행하던 칼로스가 불타는 건물 안에 갇힌 페이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장면에서 마침내 꽃을 피운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때에야 로봇 가족은 진짜 ‘기적 같은 기적’을 실행한다. 건물이 완전히 불타 허물어지고, 빼앗기지 않으려 그토록 집착했던 그낡은 빌딩 밖으로 주인공들이 발을 내딛었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로봇 가족은 다른 외계 로봇들을(어찌 보면 그들의 공동체를) 데려와 주민들을 위해 새로운 빌딩을 지어 주는 것이다. 잔해만 남은 낡은 건물을 복구하는 일을 넘어 새롭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복원’하는 그 장면은, 집합체가 아닌 공동체의 정체성을 되찾은 아파트 주민들의 회복을 상징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분열된 듯한 세상을 보며 절망감을 느끼게 될 때가 많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포용을 약점이나 허상쯤으로 취급하면서 상대의 고통과 상처를 조롱하는 것이 강함이자 승리인 양 행동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평화와 평등, 사랑을 위해 들이는 노력마저 철거를 앞둔 건물 입구의 타일을 다시 붙이는 일만큼이나 쓸모없는 행동이 되지 않을까 허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기적’이 더욱 간절해진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간의 힘으론 바꿀 수도 넘을 수도 없을 듯 보이는 거대한 벽과 방해물들을 한순간에 쓰러트릴 힘의 개입을 위해 기도하게 되는 것은 그렇기에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진정한 기적이란 완성품의 상태로 누군가가 손에 쥐어 주는 '현상'이 아니라 배터리를 찾아 넣어야만 비로소 작동하는 기구처럼 함께 참여해야 이루어지는 '결과'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광장으로 나온 민중의 외침이 탄압의 발길질을 막았고, 거리에서 함께 나눈 음식들이 서로의 굶주린 영혼을 어루만졌으며, 약자를 위해 손 내밀다 짓밟힌 두 시민의 죽음이 평범한 이들을 일깨워 온몸으로 권력을 막아서라도 이웃을 보호하려는 영웅들로 성장시킨 것처럼 말이다. 하늘까지 닿을 듯 보이는 강한 힘과 흐름 사이에서도 주변 사람들의 손을 꼭 잡는 결심으로 회복되는 작은 공동체들은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선 채 반드시 기적을 증언하리라 믿는다.
엄마 C의 시선
“배터리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batteries not included)”라는 원제를 가지고 있고 한국에서는 “8번가의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번안, 개봉되었된 이 영화는 처음 본 직후부터 ‘사랑’에 빠지고 만, 제가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는 1987년 작품입니다. 한국어로 번안된 제목이 원제의 익살스러움과 내용의 아기자기함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는 데다, 역시 제가 좋아하고 영어 원제와 한국어 제목이 같은 크리스마스 영화 “34번가의 기적(Miracle on 34th Street)”과의 혼동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적지 않은 안타까움을 갖게 됩니다. 이에 더하여 일반적 분류 방식을 따라 “SF 영화”로 규정하거나 ‘외계 생명체’를 다루고 있다는 정도로 정의하는 일은 - 오래전 한국에서도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이티(E.T, the Extra–Terrestrial)”의 경우와 유사하게 -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선입견을 제공하며 이 작품이 가진 따뜻한 면모와 나름의 깊이를 간과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영화 팬들 사이에 잘 알려진 “미믹(Mimic)”이라는 1997년 개봉작의 연출가인 매튜 로빈스(Matthew Robins)지만, 작품의 특성에 관해 논할 때는 오히려 제작자인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의 영향력이 더욱 부각되곤 하는데, 위에서 언급했듯 역시 인간이 아님에도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아름답게 소개했던 영화 “E.T”와 연결해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스필버그의 부모가 아들의 ‘창의력’ 향상을 위해 어린 그에게 베풀었다는 남다른 교육법과 관련된 – 자고 있는 아들을 깨워 장거리 운전을 하고 가서 밤하늘에 쏟아지는 유성비를 보게 했다는 아버지와, 집안을 엉망으로 만드는 아들의 괴상한 ‘실험’들을 허락하고 방안에 뱀 같은 파충류를 키우는 일도 금지하지 않았다는 어머니의 – 유명한 일화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애초 TV 시리즈인 “어메이징 스토리(Amazing Stories)”를 위해 기획된 단편 에피소드였지만 스토리와 아이디어에 크게 매료된 스필버그가 장편영화 제작을 추진해 만들어졌다는 이 작품은, 여러 등장인물 중 단연 ‘원톱’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배우 제시카 텐디(Jessica Tandy)의 감동적인 연기 - 치매 증상을 보이는 “페이 라일리(Faye Riley)” 역을 맡은 - 덕분에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영화 안에서 정신이 온전치 않은 할머니로 출연하는 그녀는 젊은 시절 여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여러 작품들보다 이 영화를 포함한 노년의 명작들로 – 역시 제가 좋아하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Fried Green Tomatoes)”나 “노바디스 풀(Nobody’s Fool)”과 같은 – 더욱 큰 각광을 받으며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했고, 특히 1989년 개봉되었던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Driving Miss Daisy)”로 아카데미 역사상 최고령 여우주연상 수상자가 되면서 진정한 연기인의 모범을 보이기도 했지요. 이 작품에 남편 “프랭크 라일리(Frank Riley)” 역으로 출연했던 흄 크로닌(Hume Cronyn)과는 실제 부부 사이로서, 3편의 연극 작품을 비롯해 1985년 작 “코쿤(Cocoon)”과 1987년 “폭스파이어(Foxfire)” 등의 영화에서도 함께 공연한 바 있습니다.
“*batteries not included”라는 – 다른 일반적 영화들의 경우와 달리 맨 앞에 별표(asterisk)를 붙이고 단어의 첫글자들을 모두 소문자로 표기한 – 이 작품의 특이한 제목은 장난감이나 전자 제품 판매 시 배터리를 따로 구입하도록 고지하는 명시 방식을 빌린 것으로 설명되곤 하는데, 영화에 등장하는 다섯 비행물체(아빠, 엄마와 자녀 셋) 가운데 가장 어리고 약한 – 태어났을 때부터 ‘회생’ 가능성이 없어 보여 모두가 포기했을 만큼 – ‘아이’를 설명하는 대사로도 사용됩니다. 그 ‘연약함’ 때문에 인간과 맺게 되는 특별한 관계가 영화의 기발하고도 장난스러운 아이디어와 스토리 라인 속에서조차 울컥울컥하는 감동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어 주지요.
뉴욕 8번가, 낡은 건물들이 집결해 있는 한 지역에서 재개발을 위한 건물 철거가 한창인 가운데, 영화의 중심 인물인 프랭크(Frank)와 페이(Faye), 메이슨(Mason)과 마리사(Marisa), 해리(Harry) 등의 주민은 철거민들에게 지급되는 소정의 보상금도 마다하면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낡은 아파트를 떠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합니다. 거주 중인 건물 1층에서 본인들의 이름을 딴(“Riley’s Cafe”) 작은 다이너(diner)를 운영하는 프랭크–페이 부부를 포함하여, 무명 화가인 메이슨, 임신 후 남자 친구가 떠나 버린 마리사, 은퇴한 권투 선수인 해리 등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는 지금까지 그저 ‘그렇고 그런’ 삶을 이어온 어려운 처지의 서민들입니다. 오래된 저층 건물을 부수고 고층 빌딩을 신축하기 위해 이 지역의 땅을 사들인 개발업자 “레이시(Lacey)”는 폭력배들을 동원해 입주자들을 신속히 내쫓으려 하는데, 이 폭력배들의 대장 격인 “카를로스(Carlos)”가 위협을 위한 본보기 삼아 순순히 말을 듣지 않는 프랭크의 음식점 이곳저곳을 야구 방망이로 무참히 부숴뜨려 버립니다. 그 처참한 상황 속에도 깨진 유리와 기물들을 치워 보려다 허탈하고 무기력해진 프랭크는 ‘막연한 대상’을 향해 자신들을 좀 도와 달라고(“Please, somebody help us”) 혼잣말을 하다 지쳐 잠이 들지요.
그날 밤, 거짓말처럼 이상하고도 신기한 일이 일어나는데, 작은 비행선(혹은 접시) 모양의 물체 두 개가 그들이 사는 건물로 들어온 것입니다. 겉모습만으로도 한 쌍의 부부임을 짐작케 하는 이들은 사람이 음식을 먹듯 전기와 금속 조각을 먹어 치우는 존재들로, 프랭크와 페이 집 부엌의 콘센트에서 충전을 해 기운을 얻고 나자 그에 대한 보답인지 부숴진 집기로 엉망이 된 프랭크의 음식점을 전과 같이 깨끗한 상태로 고쳐 놓습니다. 그러고 나선 카를로스가 방망이로 뚫어 버린 메이슨의 방문과 떨어뜨려 산산조각 낸 마리사의 성모상까지 거짓말처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지요. 다음날 아침 이 믿기 어려운 상황 때문에 함께 모이게 된 주민들이 이유를 두고 설왕설래하자 밤중에 깨어나 그들(비행체들)의 ‘작업’을 관찰했던 페이가 자신이 본 광경에 대해 설명하지만, 그녀의 온전치 못한 정신 상태를 아는 입주자들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자신들도 직접 그 두 비행 물체를 목격하고부터는 반갑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동시에 그들이 자신들의 건물에 ‘와 준’ 이유를 두고 또 다른 설왕설래를 이어 가기도 하지요.
그 두 비행체가 세 아이를 ‘출산’하는 과정에서 그중의 하나가(앞서 말했듯) 회생 불가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큰 체격과 달리 세심하고 수줍음도 많은 해리가 그 작은 아이를 데리고 가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 살려 내는 데에 성공하고, 마치 ‘양부모’나 되듯 그 작은 비행체와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런 일들 가운데 프랭크의 음식점이 오히려 근처의 공사 인부들로 북적이는 등 철거 작업이 뜻대로 진척되지 않자 초조해진 레이시가 건물 화재와 폭발을 일으켜 ‘자동 철거’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데, 지금까지 막무가내로 입주자들을 괴롭혀 오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을 친아들로 생각하는 페이에게 연민 같은 감정을 갖게 된 카를로스가 혼자 건물에 남아 있던 그녀를 살리기 위해 온통 불바다인 건물로 뛰어들어 구출해 내는 모습을 보이지요. 그날 밤 다 무너져 내려 잔해만 남은 건물 계단에서 넋을 잃은 듯 앉아 있던 해리 앞에 카를로스에게 심한 가격을 당한 후 떠났던 비행체 가족이 다른 일단의 비행체들을 데리고 나타나 허물어진 건물을 완벽하게 복원시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예전의 한국에서는 거주지를 떠나지 않겠다고 버티는 재개발 지역 주민들을 강제 퇴거시키기 위해 조폭들을 동원하는 경우가 흔했었기에, 이 영화를 보면서도 과거의 그런 행태들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집(home)이 더 이상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home, sweet home)’이 아니라고 생각될 때 닥쳐오는 위기감과 불안감은 그 어떤 감정 못지않게 위협적일 것이고, 또한 자기와 가장 가까운 누군가가 온전치 않은 정신으로 자신의 보호와 돌봄이 아니면 일상생활조차 불가능한 상태일 때 느끼게 될 부담감과 두려움 또한 엄청난 것일 텐데, 그 두 가지 상황을 동시에 겪고 있는 프랭크가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어느 정도일지는 감히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렇게 사방이 막힌 프랭크가 누구랄 것 없는 막연한 대상을 향해 도움을 간구했을 때 믿기 어려울 만큼 비현실적인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던 일은, 하나님을 만난 이후 모든 예술/문학 작품을 하나님과 저의 관계에 대입해 생각하게 된 저에게 - 저희 바카라 “영상이몽”의 맺음말에도 적었던 것처럼 - 그같이 절박한 순간 손을 내민 저를 찾아와 만나 주셨던 하나님을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작가나 감독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깨지고 부숴진 프랭크와 페이의 음식점을 밤 사이 원래대로 복구해 놓거나 불에 타고 폭발해 잔해만 남은 그들의 아파트를 하루 밤 사이 새 건물처럼 만들어 놓는 어떤 존재의 이야기는, 모든 망가지고 부숴진 - 도저히 희망이 없어 보이던 - 것들을 고치고 회복시키시는, 더욱이 단 한 번의 눈길, 단 한 번의 손길만으로도 그 일이 가능하신 하나님을 저절로 떠올리게 만듭니다.
한편, 앞서도 언급했던 영화 “E.T”에 등장하는 미지의 생명체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필 어린 소년인 “엘리엇(Elliot)”에게 처음 목격되고 또 그와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도 주위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니(crazy)”라고 손가락질하는 페이에게 이 비행체들이 제일 먼저 발견된다는 사실은, 일반적 상식에서 보면 남들보다 ‘연약’하거나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그런 생명체와 교감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신앙적 관점에서 해석해 보도록 이끄는 측면도 있습니다. “너희가 변화돼 어린아이들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우리말성경 (unless you change and become like little children, you will never enter the kingdom of heaven)”라는 하나님의 말씀(마 18:3; 막 10:15; 눅 18:16-17)을 떠올리게 하는 이런 상황들은, 소위 ‘성숙’하고 ‘정상적’이라고 평가 받는 - 그러나 내면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가득한 - 대다수 ‘어른’들이 인격적인 하나님을 본모습 그대로 만나 진정한 신앙을 갖게 되는 일에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생각해 보게도 하지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어떻게든 그 ‘이유’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우리 인간이 종종 그렇듯, 이 영화의 주인공인 낡은 아파트의 주민들도 그 비행체 가족이 자신들에게 나타나 도움을 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리하는 과정에서 저마다 ‘자기 때문에’ 온 것일 거라는 말들을 한 번씩 합니다. 노년의 나이에도 경제적 어려움에 허덕이고 있는 데다 치매인 아내까지 돌봐야 하는(그녀와의 대화 속에서 하나뿐인 아들마저 젊은 나이에 사고로 잃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프랭크는 그런 자신의 처지 때문에 그들이 거기에 와 준 것이라고, 또한 아이를 임신해 출산이 임박했지만 무바카라임한 남자 친구가 다른 도시로 가겠다는 일방적 통보만 남기고 떠나 버린 마리나는 그처럼 힘겨운 자신의 상황 때문에 그들이 그 건물에 나타난 것이라고 - 그러다 나중에는 어쩌면 재능에 비해 일이 잘 풀리지 않는 화가 메이슨을 위해 그들이 그곳에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세상적 관점에서 보면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으로 들릴 수 있을 그들의 그런 말이, 본시 순수하고 선량한 그들의 면면 때문인지 저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역시 세상적 관점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 분명한, “나를 위해” 돌아가신 주님에 대한 감사가 결코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시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그런 생각 또한 단순히 아전인수(我田引水) 식의 해석이 아니라 진정으로 ‘인격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된 누군가를 향해 자연스레 갖게 되는 - 그런 관계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 특별한 ‘예지’ 혹은 ‘직감’일 것이기에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