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C의 시선
영화 “브로커(Broker)”는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각본과 연출을 담당해 2022년 개봉되었던 한일 합작 영화로, 주연을 맡은 배우 송강호가 75회 칸 영화제의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면서 당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던 작품입니다. 같은 해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Palme d'or)”의 후보로 선정되었고 “에큐메니컬(Ecumenical) 영화제”에서도 - 기독교의 일치 정신(Ecumenism)을 근거로 신앙적/인간적 가치를 추구하는 예술성 높은 영화를 선정해 상영하고 시상하는 - “심사위원장상” 수상과 더불어 “남우주연상”을 하나 더 추가했습니다.
저희가 오래전(2023년 1월) 이 공간에서 다루었던 일본 영화 “원더풀 라이프(After Life)”의 연출가이기도 한 고레에다 감독은 데뷔작인 “환상의 빛”으로 “베니스 영화제”의 “촬영상”을 수상한 이후 칸 영화제를 비롯한 다수의 유명 영화제에서 수상을 거듭했을 만큼 실력을 인정 받는 연출가입니다. “원더풀 라이프(1998)” 같은 초기 작품들에서는 ‘기억’과 ‘상실’이라는 소재를 다루던 그가, 2008년 작품인 “걸어도 걸어도” 이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와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태풍이 지나가고(2016)” 등의 영화에서 ‘가족’을 주제로 하는 메시지에 꾸준히 천착해 오다가 2018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어느 가족”에 이르러 그 같은 열정에 정점을 찍게 되는데, 한국에서 촬영하고 제작한 고레에다의 첫 작품인 이 “브로커” 역시 그가 추구해 온 일관된 관심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비가 내리는 밤 갓 태어난 아기를 교회 현관 밖에 놓아 두고 가는 한 젊은 여성의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여 주며 시작되는 이 영화는, 늘 여의치 않은 경제 상황으로 생활고를 겪고 있는 작은 세탁소 사장 “상현”과 위 교회에서 운영하는 “베이비 박스” 시설에 근무하는 “동수,” 그리고 자신의 아기를 ‘유기’한 미혼모 “소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갑니다. 아이가 바닥에 놓여지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다가 바로 위에 있던 베이비 박스 안에 넣어 주는 형사 “수진”과 “은주”의 개입도 이야기 안에서 함께 전개되지요. 이 베이비 박스 안에 있던 아기를 곧바로 꺼내는 것은 목사복을 입은 상현과 그의 ‘동업자’ 동수로, “우성아, 미안해. 꼭 데리러 올께”라고 적어 남겨 둔 쪽지에 엄마의 이름도, 연락처도 없는 것을 확인한 – 신생아 ‘매매’를 ‘업’으로 삼고 있는 – 상현은 아기 엄마가 아이를 찾으러 올 일은 결코 없으리라고 안심하며 ‘동업자’인 동수에게 CCTV에 남아 있을 영상을 모두 삭제하도록 시키고 아기를 승합차에 태워 자신의 세탁소로 데리고 갑니다.
형사 수진과 은주가 상현과 소영을 각각 뒤쫓는 가운데, 온 곳으로 돌아가려고 찾아간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마음을 바꾼 소영은 아기를 찾기 위해 다음 날 곧장 교회로 되돌아옵니다. 전날 당직이던 동수가 거짓말로 둘러댄 설명을 들은 소영은 경찰에 신고하려 전화 부스로 향하지만, 뒤따라온 동수가 그녀를 제지한 후 상현의 세탁소로 데려가지요. “데리러 오겠다”는 노트를 남기면 교회 측에서 오히려 입양 리스트에서 제외시키고 보육원으로 보내기 때문에 자신들이 아이를 잘 키워 줄 사람을 찾기 위해 도모한 일이라는(얼토당토않은) 그들의 설명을 들은 소영은 어차피 이렇게 된 상황에 상현과 동수가 아이를 입양하는 과정을 직접 보기 위해 - 거기에 자신도 아이에 대한 ‘대가’의 일부를 나눠 받겠다는 의사도 보이며 - 그들과 동행하기로 결정하고, 범행 현장을 잡아 검거하려는 목적의 수진과 은주도 이들의 행적을 따르며 미행을 계속합니다.
자신과 알고 지내다 조직폭력배의 삶을 살게 된 “태호”로부터 빌려 쓴 돈의 상환을 독촉받은 상현이 동수, 소영과 함께 아이를 거래하는 ‘작업’을 서두르지만, 연결된 ‘고객’을 만나기 위해 낡은 승합차를 타고 울진으로 향한 그들은 아기를 시장통의 물건 고르고 가격 흥정하듯 하는 부부에게 분노가 폭발한 소영이 심한 욕을 해 대는 바람에 일을 그르치고 맙니다. 그들의 터전인 부산으로 되돌아가기 전 동수가 자란 보육원에 들러 하룻밤을 보내는 동안 ‘관계’가 영 애매해 보일 상현과 소영을 부부라고 동수가 소개하는 바람에 그곳에서 지내던 아이들 중 하나인 소년 “해진”이 자신을 입양해 달라고 상현에게 계속 조르는데, 상현의 매몰찬 거절을 들은 뒤 그들의 차 안에 숨어들어 와 있던 아이를 출발 후에야 발견한 일행은 자신들이 가족이 아니며 우성을 팔려 하는 걸 안다고 ‘협박’하는 해진을 되돌려 보낼 수 없어 피치 못해 동행을 허락하게 되지요.
‘거래’가 결렬되어 현장 검거가 어려워지자 ‘대역’을 동원해서까지 신생아 매매 장면을 유도하려는 수진의 시도를 포함해, 우성의 친부인 중년 남성의 아내가 아이를 찾아 내려고 조폭 일당(태호를 포함한)까지 끌어들이는 등의 여러 복잡한 상황 가운데, 아이를 빼앗아 가려던 우성의 친부를 소영이 살해했다는 사실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성을 – 살인자의 아이라는 낙인이 찍힐 – 떼어 놓으려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들의 차량에 추적기를 붙이고 소영을 몰래 불러내 형량 감량을 협상하며 도청 장치를 착용시켰던 수진과 은주는 그들을 미행하고 대화를 도청하는 과정에서 그 다섯 사람(아기 매매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가족’ 같은 사이가 된 상현, 동수, 소영, 해진, 우성) 각각의 아픔과 애환을 자세히 알게 되고 처음에 가졌던 편견과 선입견을 점점 버리게 되지만, 그럼에도 범죄에 대한 처벌은 불가피한 일이기에 마지막으로 우성이를 데려가려던 – 최근 아이를 사산했다는 마음씨 착한 – 부부와의 거래 현장에 출동해 관련된 사람들 모두를 체포합니다.
동수와 그 부부가 경찰에 송치되는 와중에도 소영은 ‘자수’를 통해 형이 감경되는 쪽으로 – 우성을 입양 보내지 않고 나중에 출소해서 직접 키울 수 있도록 – 형사들과 타협하고, 태호와 마주친 후 갑자기 사라져 버린 상현은 영화의 끝부분 태호(자신의 부채 문제와 관련된 협박은 물론 우성을 어떻게든 빼앗아 가려고 할 것이 분명한)를 살해했음이 암시됩니다. 소영이 3년간의 형기를 마치고 나와 주유소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구속 직전이던 소영의 부탁으로 우성을 맡아 키우고 있는 수진이, 역시 ‘죗값’을 치르고 나온 동수와 보육원으로 다시 보내졌던 해진, 그리고 “인신매매” 혐의로 기소된 후 아직 집행유예 기간이라 우성을 입양할 수 없음에도 여전히 정기적으로 아이를 찾아와 만나는 부부를 포함한 그들 모두가 함께 만나 아이의 미래를 의논할 것을 제안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됩니다.
뛰어난 재능이나 연출력을 넘어 제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이유는, “원더풀 라이프”의 영화평에서 저희가 언급했던 것처럼 작품의 내용 중 “관동대지진” 당시의 일들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노부인의 사연을 통해 당시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악의적 소문의 피해자가 되었던 한국인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려 한 감독의 노력에 진심으로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브로커”라는, 부정적 인상을 줄 수 있는 제목의 이 작품 또한, “에큐메니컬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장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물론, 과거 감독이 천착하던 ‘기억’과 ‘상실’에의 모색을 넘어 ‘영원’과 ‘회복’을 추구하고 있는 - 본질적으로 기독교적 이념과 부합하는 - 영화라는 점에서 작품과 감독에 대한 호감도를 더욱 상승시켜 주고 말이지요.
처음부터 소영에게 매몰차고 쌀쌀하게 대하던 동수가 “아이에게 다시 데리러 오겠다는 글을 남기고 간 엄마 중 정말로 다시 돌아오는 사람은 40명 중 한 명 꼴”이라고 말하며 그런 노트를 남긴 소영의 행동을 더욱 비난하지만, 동수가 그러는 이유에 대해 “자기 엄마가 그 ‘한 명’이기를 바랐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배신감 때문”이라고 전해 주는 상현의 설명을 통해 소영도 그의 아픔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 반면, 엄마를 기다리느라 입양 기회도 마다하고 보육원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머물렀던 동수 또한 우성을 키우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소영의 처지를 보며 자신의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는 것 같다면서 “우리 엄마도 어쩔 수 없이 날 버려야 했던 이유가 있던 것 아닐까 싶어서”라고 이유를 설명할 만큼 자신의 상처 회복에 실마리를 찾게 되지요.
긴 여정을 함께하며 서로의 내면과 아픔을 공유하게 된 그들이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밝히는 – 처음에는 본인의 이름을 “선아”라고 소개했던 소영이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본명을 밝히고, 상현 역시 그 이름은 아들을 낳으면 붙여 주고 싶었던 이름일 뿐 진짜 이름은 따로 있다고 고백하는 – 대목은 “진짜 ‘가족’이 되는 과정은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숨김없이 드러내게 되는 과정”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영화의 설정이 아닐까 생각하게 합니다. 그토록 타고 싶다던 관람차에 오른 뒤 도리어 물에 젖어 다함께 깔깔대며 즐거워하던 세차장에서의 기억을 그리워하는 해진을 보며 가족 간에는 대단한 일의 성취보다 소소한 기쁨의 공유가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도 됩니다. “우리가 조금 더 일찍 만났다면 우성이를 버리지 않아도 됐을지 모르는데”라는 소영의 대사에서는, 놓치고 흘려 버린 시간을 안타까워 하는, 잔뜩 비틀리고 꼬이기만 한 듯 보였음에도 이제 그들 네 사람을 자신의 진정한 가족으로 받아들인 그녀의 변화를 엿보게 되고 말이지요.
고레에다 감독의 명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응용해 이 영화의 부제를 “그렇게 어머니가 된다”로 붙일 수도 있을 듯하다는 영화평을 본 적이 있는데, 처음엔 우성에게 정을 붙이지 않으려 눈도 맞추지 않던 소영이 아이에게 자장가를 불러 주고 아픈 아기를 데리고 병원을 오가면서 엄마로서의 사랑이 싹트는 모습과, ‘기르지도 못할’ 아이를 낳은 소영을 무바카라임하다고 비판하던 수진이 소영의 아픔을 이해한 후 그녀의 부탁대로 복역 중인 3년의 기간동안 아이를 돌보며 친엄마처럼 사랑으로 키우는 모습, 그리고 태중의 아기를 사산한 직후 우성에게 젖을 물렸던 기억 때문인지 아이에 대한 애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자주 찾아와 만나며 사랑의 관계를 이어 가는 여성의 모습 등이 엄마가 ‘되어 가는’ 과정에의 묘사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그런 해석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아빠나 엄마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지만, 성인이 되어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 나이에 이르면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어리고 연약한 존재에게 누구나 아빠, 엄마 같은 존재가 ‘되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그렇게 아버지가 되고” 또 “그렇게 어머니가 되어 가는” 것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딸 J의 시선
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무척 좋아한다. 감독의 연출 방식과 특유의 분위기는 물론 그의 작품 대부분을 관통하는 ‘가족’이라는 소재를 향한 시선과 고찰에 언제나 깊은 울림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가족의 탄생]을 다룬 예전 글에서도 언급했듯 ‘혈연’보다는 만들어진, 직접 ‘선택’한 가족(chosen family)에 더욱 관심을 느끼는 나는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들 안에서 그와 유사한 정서를 발견하곤 한다(물론 감독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 관계를 주제로 한 영화도 여러 편 만든 전적이 있지만 말이다). ‘가족’이라는 개념이 유대감과 소속감, 안정감과 사랑을 대변하던 본래의 의미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듯 보이는 요즘, “가정의 달”인 5월을 맞아 다루기에 적합한 작품으로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가 바로 고레에다 감독의 2022년 작 [브로커]였다.
[브로커]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밤, 한눈에 보기에도 아이를 낳아 기르기엔 너무나 어리고 가냘파 보이는 한 여성이 갓난아기 “우성”을 교회에 설치된 베이비 박스 앞에 두고 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경찰로 추정되는 “수진(배두나)”과 “은주(이주영)”는 차에서 잠복하며 교회를 주시하다 이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은주가 여자를 쫓는 동안 수진은 아기를 따뜻한 베이비 박스 안으로 넣어 준 뒤 자리를 피한다. 교회가 운영하는 베이비 박스 시설의 당직을 맡은 “동수(강동원)”와 목사로 보이는 “상현(송강호)”이 박스를 열어 우성을 맞이하지만, 어딘가 수상쩍은 모습의 상현이 아이를 자신의 가게인 세탁소로 데려가면서 사실은 상현과 동수가 베이비 박스에 남겨진 아기들을 몰래 빼내어 아이를 원하는 부부에게 ‘판매’하고 있다는 사정이 드러난다.
아기 엄마 “소영”을 쫓던 은주가 그녀를 놓쳤으나 곧 마음을 바꾼 듯한 소영은 자기 발로 교회로 돌아와 우성을 다시 찾는데, 베이비 박스 시설의 직원인 동수의 뒷처리로 우성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소영이 경찰에 신고할까 염려가 된 동수는 그녀를 상현의 집으로 데려간다. 우성에게 좋은 부모를 찾아 주려는 ‘선의’의 행동이라며 변명하는 상현에게 소영은 그들이 ‘브로커’일 뿐임을 날카롭게 지적하지만, 아이를 ‘팔면’ 꽤 큰 금액의 ‘사례비’를 받는다는 말에 생각을 바꾸는 듯 보인다. 그렇게 셋은 아이에게 새로운 부모를 찾아 주는, 더 노골적으로는 우성을 데려갈 가장 좋은 ‘구매자’를 찾는 기묘한 여행에 함께하게 되고, 인신매매 혐의로 이미 상현과 동수를 추적하던 수진과 은주 또한 조용히 이들의 뒤를 쫓는 여정을 시작한다.
이 애매한 브로커들과 그들을 미행하는 경찰의 행보는 어둡고 우울한 범죄극보다는 우당탕탕 소동극에 더 가깝게 진행된다([기쿠지로의 여름] 같은 작품들과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상현과 일행은 먼저 울진의 수산시장에서 우성에게 관심을 보인 부부를 만나지만, 아이의 외모를 트집 잡고 ‘가격’을 흥정할 뿐 아니라 무례한 말을 서슴지 않는 상대 부부에 분노한 소영이 판을 뒤집어 엎으며 거래는 무산된다. 일행은 근처에 위치한 보육원에 들러 하룻밤을 보내는데, 이를 통해 소영은 자신에게 가시를 세우던 동수 또한 이 보육원에서 자라며 자기를 버리고 간 엄마를 기다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사정이 어지럽게 뒤섞인 상태에서 둘은 어떤 휴전 상태에 이르고, 다음 부부를 만나러 가며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곧 상현이 보육원에서 만났던 한 아이가 차 뒤에 숨어 있음을 알아채고, 8살이라는 나이 때문에 입양의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졌음에도 여전히 가족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은 아이 “해진”까지 이들의 여정에 동행하게 된다. 아기를 함께 돌보고 챙기면서 이들은 어느새 가족 비슷한 형태를 띄게 되지만, 소영이 연관된 살인 사건의 수사 상황을 알게 된 수진과 은주가 이들 뒤를 바짝 쫓으며 상현 일행의 불안정한 평화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민감하고 암울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영화는 상당히 ‘재미’있는데, 고레에다 감독 특유의 고요함과 평온함을 잃지 않는 가운데 풋, 하고 웃을 수 있는 포인트들이 군데군데 적절히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사 속의 과하지 않은 유머는 물론 능청스럽게 각본의 맛을 살리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어우러져 슬픔으로 축 쳐지지 않는, 비극 속에서도 미소와 가벼움을 찾는 아름다운 완성품이 탄생한다. 가히 역대급이라 할 수 있을 캐스팅은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은 조연들과 카메오 출연진에서도 빛을 발하지만 특히 주연 배우들의 연기는 별다른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허허실실하는 얼굴 아래에 상처와 상실을 숨기고 사는 상현 역의 송강호 배우와 개인적인 아픔 때문에 이 브로커 일행을 쫓는 일에 강박적일 만큼 집착하는 수진 역의 배두나 배우는 자세한 서사나 설명 없이도 관객들을 설득하는, 섬세하고도 넉넉한 연기를 선보이며 극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 준다.
일본인 감독의 각본과 연출로 제작되었으면서도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또한 모든 출연진이 한국 배우라는 흥미로운 결과물을 통해 일본과 같은 듯 다른 한국의 정서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 속에서, 감독의 예전 작품과 구별되는 부분들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포인트 중 하나이다. 분명히 한국의 건물과 풍경들을 비추고 있음에도 왠지 일본의 해안 도로를 보여 주는 듯한, 어딘가 이국적인 색채 조합과 미장센이 감지될 때가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감독이 어색하지 않게 새로운 문화에 녹아들면서도 자신의 작품을 차별화하는 강점 또한 놓치지 않은 성공적 도전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삶 속의 부당함과 비극을 그려 내는 그의 방식이 특히 더 그렇다.
영화는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들 대부분에서 만나게 되는 먹먹함(정확히는 절제된 참담함)으로 주인공들의 삶을 비춘다. [브로커] 속 중요한 등장인물들은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상황의 현현으로, 그들 모두가 상처 받은 사람들이다. 동수는 보육원에서 자라는 동안 “데리러 오겠다”는 쪽지를 남긴 엄마를 기다리던 아픔에 인이 박힌 인물이며, 상현은 아내와 헤어지고 딸과도 멀어지면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 한 켠에 품은 채 사는 사람이다. 소영은 보호 받아야 할 어린 나이부터 ‘포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여자를 “엄마”로 부르며 성착취를 당하다 아이를 갖게 된 후 우발적으로 아이의 친부까지 살해한, 나열해 놓고 보면 기구하기 짝이 없는 인생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작품은 인생의 이 처절함과 불공평함 속에서도 품위와 고결함을 잃지 않는다. 사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에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신파’라 여기는 소재들이 적지 않지만(장남의 제삿날 모인 가족의 하루를 그린 [걸어도 걸어도], 아이가 병원에서 바꿔치기 되었다는 사실을 몇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 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외도 상대에게서 태어난 이복 여동생과 함께 살게 된 자매들의 이야기인 [바닷마을 다이어리], 도둑질로 생계를 꾸릴 수밖에 없는 가난한 가족이 주인공인 [어느 가족] 등등), 그의 작품들은 단순한 신파적 비극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번에 영화를 보는 동안 ‘신파’에 대해 조금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우리가 신파를 주로 감정의 ‘과잉’으로 정의하는 것과 달리 어떤 비극을 “신파극”으로 격하시키는 요소는 감정의 ‘착취’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 인물들은 극단의 감정, 즉 울분과 억울함과 슬픔과 원망을 느낄 법한 상황들에 처해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런 감정들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의 시선은 이런 감정에 줌인하여 관객들을 슬픔과 처절함의 관음자(voyeur)로 만드는 대신 그로부터 정중한 거리를 둔다. 소영이 우성의 친부를 죽인 사건은 정확하게 묘사되지 않고, 동수의 외로운 과거나 상현의 부정 당하기만 했다는 삶 또한 관객에게는 공백으로 남겨진다. “자식을 버린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며 소영에게 미움과 분노를 투사하는 듯한 수진의 모습에서 아이를 잃은 그녀의 과거를 유추할 수 있음에도 영화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울먹이는 그녀의 표정을 담담하게 포착할 뿐 그의 사적인 비극을 건드리려 들지 않는다. KTX 열차 안에서 상현과 대화하던 소영이 자신이 정말 아이를 버리려고 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조금 더 일찍 상현과 동수를 만났더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라는 가장 밑바닥의 ‘진심’과 ‘진실’을 전할 때, 그리고 “아직 늦지 않았다”며 상현이 그동안 숨겨 왔던 진정한 선의와 이타심을 내보일 때, 둘의 모습은 그림자와 기차의 소음에 묻혀 드러나지 않는다.
이 작품이 타인의 아픔을 비추는 방법은 상현 일행이 ‘진짜’ 가족처럼 월미도에서 시간을 보낸 뒤 소영과 동수가 관람차에 탄 장면에서 가장 간결하게 요약되고 있다. 살인자로 쫓기는 처지에서는 우성이를 데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란 희망이 없다며 소영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자 동수가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가려 주는데, 이는 곧 슬퍼하는 그녀 곁에 함께 있어 주는 동시에 소영의 지극히 은밀한 슬픔과 절망을 모두로부터, 그녀에게 혹독했던 세상으로부터 숨겨 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관객들은 소영의 슬픔을 엿보며 추측하는 대신 그녀의 사적인 순간이 거두어들여진 공백 속에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돌아보게 된다.
영화가 전개되는 방식 또한 타인의 삶에 대한 작품의 존중을 잘 반영한다. 관객이 주인공들의 삶과 과거, 개개의 사연을 깨닫거나 유추하게 되는 과정은 점진적이고 비선형적(non-linear)으로, 관객은 등장인물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연민하게 되는 여정과 거의 같은 속도로 그들의 사연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소영이 자신을 가명인 “선아”로 소개했었고 상현 역시 법적 본명은 “진영”이라는 사실이 나중에야 밝혀지는 것 또한 제한된 첫인상과 겉모습에 가려진 ‘진짜’ 모습을 발견하는 데 필요한 일정한 시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소영과 상현 일행에 대한 경멸을 굳이 숨기지 않던 수진이 마침내 이들에 대한 어떤 이해와 공감을 보이게 되는 서사 역시, 약자와 피해자가 살기 위해 내리는 선택들에 정죄와 분노부터 먼저 내던지려고 하는 슬롯에게 “잠시만 기다려 주길” 부탁하는 간청과도 같은 것이라 하겠다.
영화 [브로커]는 비혼모와 입양, 임신 중절과 같이 민감하고 복잡한 주제들에 대해 섣부른 결론을 내리려 들지 않는다. 버릴 거면 낳지 말지, 하고 쏘아붙이는 수진도, 우성이 앞에서 그 말을 해 보라며 분노하는 소영도, 좋은 집으로 입양되는 것이 우성이에게 더 좋을 거라는 상현과 동수의 주장도 모두 틀린 말이 아닌 데다 각 인물들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충분한 근거를 가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라는 어려운 질문에도 이 작품은 쉬운 답을 내놓을 생각이 없다. 다만 ‘어떻게 사는’ 것이 ‘가족 같은’ 삶인지에는 여러 길을 제시한다. 비가 오면 함께 우산을 쓰는 삶, 울고 있는 사람의 곁에 앉아 그의 눈물을 가려 주는 삶, 아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누군가를 통해 자신을 버렸던 엄마를 이해하고 그녀를 대신 용서하는 삶.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태어나 줘서 고마워”라는 말을 서로에게 들려 주며 함께 상처를 보듬는 삶. 흑백으로 명확히 나누어지지 않는 복잡한 상황 속에서 골치를 썩이고 의견과 신념이 충돌하여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상대방의 셔츠 단추가 떨어지면 대신 꿰메어 건네 주는 삶 말이다. 그 무엇보다 사랑이 으뜸이라는 주님의 말씀도 이와 비슷한 뜻이 아닐까 싶다.
혈육의 유무와 관계없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맘 붙일 수 있는 구석 없이 고아와 같은 영혼을 부여안은 채 하루하루 묵묵히 견뎌 내고 있는 세상이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그리고 그 이후로도, 우리의 시선이 자신의 직계 가족을 넘어 주변의 구석구석까지 가닿을 수 있다면 좋겠다. 우성이 결국은 자신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천진하게 웃는 아이가 된 것처럼, 세상 모든 외로운 이들이 포근한 다정함과 넉넉한 이해심에 둘러쌓인 삶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