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에는 왜 둘만의 아지트가 필요하다

사랑은 공간을 기억한다

by추설

재밌는 로맨스를 떠올려 보면 이상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독자는 두 사람만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함께 있었던 장소도 함께 기억합니다.


늘 만나던 카페.

학교 옥상.

강변의 벤치.

버스정류장.

늦은 밤 편의점.

그 장소들은 특별해서 기억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그곳에서 시간을 함께 보냈기 때문에 특별해집니다.

그래서 좋은 로맨스에는 종종 둘만의 아지트가 등장합니다.


아지트는 사랑이 쉬어 가는 공간이다


로맨스에는 많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첫 만남도 있고,

엇갈림도 있고,

다툼도 있습니다.

하지만 관계는 사건 속에서만 자라지 않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에도 자랍니다.

함께 음료를 마시고,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고,

아무 말 없이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


이런 평범한 순간들이 쌓이면서 관계는 조금씩 깊어집니다.

아지트는 바로 그런 시간을 만들어 주는 공간입니다.


같은 장소는 관계의 변화를 보여 준다


좋은 아지트는 한 번 등장하고 끝나지 않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여러 번 반복됩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마주 앉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같은 자리를 찾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말없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집니다.


장소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변한 것은 두 사람입니다.

그래서 독자는 같은 장소를 볼 때마다 관계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느끼게 됩니다.


둘만 아는 공간은 둘만의 세계가 된다


아지트가 특별한 이유는 예쁜 장소라서가 아닙니다.

둘만의 시간이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카페일 뿐입니다.

평범한 계단일 뿐입니다.

평범한 놀이터일 뿐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다릅니다.

처음 웃었던 곳.

처음 다퉜던 곳.

처음 손을 잡았던 곳.


수많은 기억이 같은 공간에 쌓이면서 그곳은 둘만의 세계가 됩니다.

그래서 아지트는 공간이 아니라 추억이 됩니다.


아지트는 말하지 않아도 감정을 만든다


감정을 모두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대신 공간을 보여 줍니다.


다툰 뒤에도 습관처럼 같은 카페를 찾는 사람.

헤어진 뒤에도 같은 버스정류장 앞에서 한참을 서 있는 사람.

재회한 뒤 아무 말 없이 예전 아지트로 걸어가는 두 사람.

독자는 긴 설명이 없어도 이해합니다.


그 장소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아지트는 대사보다 많은 감정을 담아냅니다.


가장 좋은 아지트는 평범한 곳이다


많은 작가들이 특별한 장소를 찾으려고 합니다.

야경이 아름다운 전망대.

유명한 관광지.

멋진 레스토랑.

물론 그런 공간도 좋습니다.

하지만 오래 기억되는 아지트는 의외로 평범합니다.


학교 앞 추억을 회상하기 좋은 분식집, 혹은 카페

동네 놀이터.

작은 서점.

골목 끝 벤치.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


누구나 지나칠 수 있는 공간이 두 사람의 추억으로 채워질 때,

그 장소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공간이 됩니다.


그렇기에 독자는 장소를 보면 사랑을 떠올린다


좋은 로맨스를 다 읽고 나면 신기한 일이 생깁니다.

실제 길을 걷다가도 비슷한 골목을 만나면 이야기 속 두 사람이 떠오릅니다.

비 오는 버스정류장을 보면 그 장면이 생각납니다.

작은 카페를 보면 그들이 웃던 시간이 떠오릅니다.

좋은 아지트는 소설 속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독자의 기억 속에서도 계속 살아갑니다.

그래서 공간은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의 일부가 됩니다.


오늘의 작은 질문


지금 쓰고 있는 로맨스에는 두 사람만의 아지트가 있나요?

그곳은 단순히 자주 만나는 장소인가요?

아니면 두 사람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가는 공간인가요?

좋은 로맨스는 사랑하는 사람만 기억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사랑이 머물렀던 공간까지 함께 기억되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독자가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것도,


두 사람이 사랑했던 방식이 아니라

늘 같은 자리로 돌아와 서로를 기다리던 그 공간인지도 모릅니다.


표지.jpg한 번에 투고로 출간한 로맨스도서 '세상에 없던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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