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엔 외향인과 내향인이 함께 산다
아직도 폭싹 속고 살고 있나요?
어느 날,
한국드라마 광팬인 지인이 물었다.
"한국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보셨어요?
정말 감동적이에요."
사실 나는 TV 드라마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보지 않는다.
그래도
궁금해서 귀가 후 검색해 봤다.
"폭싹 속았수다"...?
무슨 뜻이야?
‘정말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제주도 방언이다.
그런데 나에겐
‘완전히 속았다’는 말로 읽혔다.
줄거리를 대략 훑어보니
정말 볼만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놈의 '버릇'이 또 설친다.
머리를 스치는 재미있는 생각.
이 이야기 줄거리를 보니,
정말 폭싹 속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나를 미소 짓게 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
재미있다.
일단 드라마부터 보기로 했다.
알고 보니, 이 드라마 너무 잔인(?)하다.
수십 년 마른 감정을 모두 긁어낸다.
휴지 한 통을 다 비워내고서야 끝이 났다.
밤을 꼬박 새우면서...
그리고 내가 예측했던
주인공들의 성격 반전이 보인다.
아주 선명하게.
애순은 어떤 사람이었나.
‘요망진 알감자’라는 이름처럼
억압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불합리 앞에서 반항할 줄 아는 성격이다.
울 때는 숨김없이 팡팡 울고,
웃을 때는 제주 바다가 넘실거리도록 웃던 그녀,
세상을 향해 불꽃처럼 타오르던
외향적 성격의 소유자다.
그런데 그 불꽃의 안쪽에는
시를 꿈꾸고 홀로 사색할 줄 아는
내향적 마음이 담겨 있다.
외향인 줄 알았는데,
폭싹 속았다.
관식은 또 어떤 사람이었나.
말없이 단단한 무쇠.
깊숙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심해 같은 마음으로 어떤 일이든
황소처럼 묵묵히 감당하는
내향적 성격 소유자다.
그 침묵은 무기력이었을까.
사랑이라는 이유를 만났을 때
몸을 던져 현실과 맞서던 그,
침묵의 전사로만 보였다.
내향인 줄 알았는데,
폭싹 속았다.
그렇다면 한 가지 물어보자.
애순은 관식 없이
그렇게 살아낼 수 있었을까.
관식은 애순이 없었으면
어떤 세상을 걸었을까.
물과 불처럼 달랐던 두 사람,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조각이지 않은가.
이가 빠진 동그라미의
잃어버린 한 조각 같은.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나는 내향인가, 외향인가?
그 물음보다 먼저
이렇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내 안에도
애순이와 관식이가
함께 살고 있지 않을까?
어떤 날은
불꽃처럼 앞장서는 애순이가,
또 어떤 날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관식이가
나를 대신해 하루를 살아내니까.
그런데 나는 그 둘 중
한쪽만 자주 불러내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다른 한쪽은
지금 어디에 웅크리고 있을까.
필요한 순간마다
그를 불러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보다 나에게 묻자,
나는 정말 내 안의 그를 믿고 있는가?
내가 불러내면 나타날 것이란 것을.
결국 성격이란,
하나로 굳어진 애순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관식이를 불러낼지를
선택하는 마음이 아닐까.
그것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가장 지혜로운 방식이라면,
오늘 나는 누구와 이 하루를 보낼까.
둘이라서 정말 좋다.
함께였기에 오늘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
애순이도, 관식이도 품고
여기까지 살아낸 나에게
이제야 인사를 건넨다.
“폭싹 속았수다.”
나 자신에게만큼은
폭싹 속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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