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에만 남긴 진심
종이
위에는
두 개의 손이 산다.
한 손은
마음 가는 대로
선을 긋는다.
끝을 정하지 않은 곡선 하나,
뜻을 얻기도 전에 멈춘 단어 하나,
채 잉크도 마르지 않은 채
흐려져 버린 문장 하나가
빈 종이 위를 길바람처럼 헤맨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구겨 던져 버리면 그만.
종이는 아무 말이 없고
펜은 지나간 자리를
기억한 적이 없다.
공복에 마신 술에 취해
갈 곳도 없이 비틀거리는 사람처럼,
그 손도 어디에도 닿지 않은 채
이리저리 백지 위를 헤맬 뿐이다.
이것도 쓸모 있는 시간일까.
목적을 잃은 걸음 사이로
제법
날숨과 들숨이
서로의 보폭을 맞추고,
갈 곳 없는 선인 줄만 알았는데
어느 순간
오래 접어 두었던 마음 하나가
뜻밖에도
제 모양을 찾아
그 선을 따라 지나간다.
흐르는 대로
흘려보내는 시간,
그 느슨함이
때로는 굳어 있던 어깨를 풀어주고
오래 조여 있던 마음의 매듭을
조금씩
서툴지만
조금씩
느슨하게 풀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백지가 끝내
그런 선들로만 채워진다면,
먼 훗날
오래 접어 두었던
한 페이지를 펼쳤을 때
내가 무엇을 사랑했는지도,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도 모른 채
지나간 마음의 흔적만
어지럽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한 손은
조금 다르게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