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를 신포도라 부르지 않기 위해

공백과 여백 사이, 나를 속이지 않는 정직한 눈빛에 대하여

byItz토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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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침묵과 여백


침묵으로 채운 여백은,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말할 것을 아껴둔 자리다.


하지만 무기력 속의 침묵은 다르다.

그곳에는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말조차 닿을 수 없는 두터운 벽이 서 있다.


하나는 비어 있음으로 깊어지고,

다른 하나는 비어 있음에

갇힐 뿐이다.


149fe358-a86c-458f-8767-b0459aea371e.pngby ChatGPT

#2 여백인가, 공백인가


독서모임에서 한 청년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지난 3개월 동안 나는 실직 상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평소 하지 못했던 취미생활을 마음껏 할 수 있었죠. 그러다 다시 온라인 게임으로 돌아와 일을 시작하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함께 일하던 모두가 나보다 한 걸음 더 앞서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렇다면 그 3개월은 공백이었을까요, 아니면 여백이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쩌면 이러할지도 모른다.

“공백일 수도 있고, 여백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같은 3개월이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시선의 각도가 달라지면, 동일한 사건에서도 완전히 다른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청년의 3개월은 ‘공백’이었을까, 아니면 ‘여백’이었을까?


나는 여백과 공백을 가르는 기준이 시간의 길이나 슬롯적 평가가 아니라, ‘그 빈자리에 실제로 무엇이 채워졌는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평소 하지 못했던 취미를 즐기고,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며,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자신에게 시간을 돌려준 경험이 있다면 그 3개월은 충분히 ‘여백’이라 부를 수 있다.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그저 흘려보냈다면, 나중에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포장한다 한들 그것은 ‘공백’에 가까울 것이다.


결국 시간의 성격은 사후적인 해석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시간을 보내는 동안 무엇을 했고, 무엇을 경험했으며, 그 시간이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지가 이미 그 의미를 결정짓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복직 후 느껴지는 ‘뒤처졌다’는 감각만으로 그 3개월의 성격을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그 감정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생겨난 사후적인 느낌일 뿐, 3개월이라는 시간 자체가 지닌 본질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만약 ‘뒤처졌다’는 결과만을 기준으로 과거를 판단한다면, 결과가 좋지 않을 때마다 지나온 과정 전체를 부정하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하나의 사건에는 두 개의 이름이 동시에 붙을 수 있다. 경력이라는 선형적인 기준에서 보면 그것은 ‘공백’일 수 있다. 하지만 삶의 회복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그것은 분명 ‘여백’이다.


이 둘은 모순되는 말이 아니다. 단지 서로 다른 기준에서 같은 시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점이 있다. 사람은 때로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의미를 비틀곤 한다. 특히 결과가 기대와 다를 때 더욱 그렇다. 이솝우화의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


높은 곳에 달린 포도를 따지 못한 여우는 돌아서며 “저 포도는 어차피 신 포도일 거야”라고 말한다. 처음부터 포도가 필요 없었던 것이 아니다. 가질 수 없었기에, 원했던 마음을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우리 삶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돌아온 자리에서 남들보다 뒤처졌다는 사실이 불편할 때, 지나간 3개월을 억지로 ‘여백’이라 포장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사실은 아쉬움이 남아 있으면서도, 그 아쉬움을 인정하는 대신 “나를 위한 시간을 보냈어”라며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정한 ‘여백’일까, 아니면 신포도를 포도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자기 위안일까?


결국 중요한 것은 ‘공백인가, 여백인가’라는 이름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 3개월을 돌아보았을 때, 나는 정말 그 시간을 주체적으로 살아냈는가. 아니면 지금의 결과를 견디기 위해 그 시간을 아름답게 미화하고 있는가.


아마도 우리가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던져야 할 질문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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