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조리법의 모순

550ml와 4~5분, 그 친절한 정답에 대하여

byItz토퍼
by ChatGPT

어린 시절, 외가의 저녁상은 대개 마당에서 차려졌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외할아버지가 들마당 한쪽에 모깃불을 지피면 우리는 그 주위에 둘러앉았다. 모깃불에서는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고, 그 연기 사이로 저녁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들마당 한쪽 큰 가마솥에서 풍겨오는 그 냄새는 무엇이든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은 맷돌이 구르고 있었다.

바로 콩국수를 만드는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콩국수를 무진장 좋아한다. 여름에 한국에 가면 항상 남대문 시장 한 골목에 위치한 콩국수집으로 달려간다. 투박하게 손으로 버무린 겉절이 김치에 시원한 콩국수 한 사발을 비우고 나면, 잊고 지내던 고향이 내 속을 가득 채워주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도 콩국수를 좋아하셨다. 세월이 한참 흐르고, 이제 내가 그때의 외할아버지 나이가 되어 보니 알겠다.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면을 더 좋아하게 되는 모양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할 수 없어 한국 음식이 그리운 날이면 한국 라면을 끓인다.


세계 어디를 가나 구할 수 있는 이 라면, 대타 음식으로는 이만한 것이 없다. 파를 송송 썰어 넣고 계란을 탁 깨뜨린 후, 마지막에는 찬밥 한 공기까지 말아먹는다. 이쯤 되면 라면은 간식이 아니라 거의 한 끼 식사의 완결판이다.


그런데 라면이라는 음식에는 이상한 구석이 있다.

봉지 뒷면에는 아주 친절하게 조리법이 적혀 있다.


물 550ml. 수프와 면을 넣고. 4~5분.


간단하고, 숫자까지 정확히 적혀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숫자를 그대로 지킨 적이 없다.


어떤 날은 4~5분을 기다리지 못하고 30초쯤 일찍 불을 끈다. 그것도 눈대중이지 시계를 보는 건 아니다. 아무튼 면이 살짝 덜 익어야 한다. 젓가락으로 집었을 때 탱글탱글한 저항감이 있어야 한다. 너무 익은 면은 왠지 누가 먹다 남긴 것 같다.


그런데 어떤 날은 뚜껑을 덮어 놓고 조금 더 기다린다. 면이 푹 퍼지고 국물이 면발 사이사이에 스며들 때까지. 그때의 라면은 또 다른 음식이다. 같은 라면인데도 어제와 오늘의 취향이 다르다.

물의 양도 그렇다. 550ml를 정확하게 계량컵으로 재어 넣는 날, 없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Itz토퍼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삶의 향기를 나만의 색으로 물들이며, '나답게' 걸어가는 온라인카지노스트(Brunchist) Itz토퍼입니다. 삶과 사유, 그리고 빗각(BitGak)을 나눕니다.

365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19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475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작가의 이전글영원히 사랑한다는 말, 참일까 거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