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에서 일상까지, 나를 온전히 마주하는 고요한 순간들
※ 본 글은 앞선 글 <17화 생각할 '틈'을 잃어버린 당신에게>의 성찰을 잇습니다.
중학교 시절, 축구 경기 중 심각한 눈 부상으로 실명 위기에 처해 몇 개월 동안 세상의 빛과 멀어진 채 살아야 했다. 치료 끝에 시력을 조금이나마 회복했지만, 평생 안경을 끼고 살아야 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내게 가장 큰 좌절은 그 부상으로 인해 더 이상 축구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절망의 끝에 서 있던 내게 다가와 준 음악 선생님, 그리고 그분의 손에 이끌려 부산시민회관에서 처음으로 접했던 '오페라'. 장엄한 막이 오르고 무대가 펼쳐지는 순간, 나는 음악이라는 깊고 아늑한 심연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깊은 어둠 속에서, 내 삶을 새롭게 변화시킬 특별한 존재를 발견했다.
시간이 일순간에 마법처럼 사라지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게는 오페라 무대를 마주했던 순간이 바로 그 시작이었다.
무언가에 완전히 빠져들어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온 정신을 던지게 된다.
내면을 어지럽히던 불안도 사라지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자의식도 깨끗이 씻겨 내려간다.
그 순간만큼은, 마치 넓은 우주 공간에 오직 마주한 대상과 나만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심리학자들은 이 신비로운 상태를 '몰입(Flow)'이라 부른다.
단순히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차원을 넘어, 인간이 정신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충만하고도 신비로운 합일의 상태에 가깝다.
나는 오랫동안 그날 오페라 무대에서 마주쳤던 그 존재의 정체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성인이 되면서 만난 운동선수와 음악가, 작가들의 모습을 통해 내가 그날 경험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조금씩 깨달아 갔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1990년 『몰입(Flow)』을 통해 이러한 상태를 처음 학문의 언어로 체계화했다.
그 바카라을 읽으며 나는 전율했다. 그가 설명하는 몰입의 상태가, 내가 오페라 무대 앞에서 느꼈던 그 황홀경과 정확히 겹쳤기 때문이다.
그는 몰입에 이르기 위해 명확한 목표, 즉각적인 피드백, 그리고 도전과 능력 사이의 팽팽한 균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너무 쉬우면 지루하고, 너무 어려우면 불안해진다.'
그래서 몰입은 결국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그러나 그 꽃은 결코 저절로 피지 않는다.
처음엔 언제나 서툴고 자의식이 발목을 잡는다.
하지만 그 삐걱거리는 시간을 견디고 나면 어느 순간 생각이 스스로 흐르기 시작하고, 나를 이끄는 것이 내 의지 너머의 어떤 힘이라는 감각이 찾아온다.
그라운드 위의 축구 선수에게 그 순간은 'Zone(존)'이라 불린다.
슛을 날리는 찰나, 관중의 함성도 전광판의 스코어도 지워지고 오직 공의 궤적과 발끝의 감각만이 세상의 전부가 된다. 처음엔 근육이 굳고 호흡이 가빠지지만, 경기가 격렬해질수록 역설적으로 온몸의 감각은 열린다.
상대의 움직임과 잔디의 질감이 뇌를 거치지 않고 몸으로 곧장 전해진다. 시간은 느려지고, 공과 태클은 슬로 모션처럼 선명해진다. 경기가 끝난 뒤 그들이 느끼는 것은 단순한 승리의 쾌감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순간을 목격했다는 엄숙한 확신이다.
손흥민 선수가 자신의 존에서 골을 넣은 후, 그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음악가에게는 또 다른 문이 있다.
무대에 서는 순간 관객의 시선이 등을 찌르고 악기는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지만, 선율이 깊어질수록 자의식은 빛을 잃는다. 악보는 지도일 뿐 목적지가 아니다. 몰입에 들어간 연주자는 그 여백 속에 숨은 작곡가의 숨결을 비로소 끄집어낸다.
연주를 마친 뒤 "어떻게 연주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그들의 고백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그들은 곡을 연주한 것이 아니라 그 시간 동안 음악 자체가 되었던 것이다.
작가의 바카라상 위에서도 같은 흐름이 소용돌이친다.
텅 빈 원고지 앞에서 문장은 자꾸 덜컹거리지만, 그 고독한 씨름을 버텨내면 어느 순간 문장이 스스로 길을 찾아 흐르기 시작한다.
창조의 자아가 비판의 자아를 압도하는 순간, 마치 내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받아 적는 듯한 감각이 찾아온다. 갈증도 배고픔도 잊은 채 밤을 넘기고 나서야, 창밖의 푸르스름한 새벽빛을 보며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다.
그라운드와 무대와 바카라상, 이 세 곳을 바라보며 나는 깨달았다.
몰입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흩어진 나를 모아 가장 나다운 나를 마주하게 하는 열쇠라는 사실.
우리는 너무 많은 가면을 쓰고 산다. 온라인 게임에서, 가정에서, 소셜 미디어 속에서 자아를 쉼 없이 분열시킨다. 그러나 몰입의 순간이 오면 그 단단하던 껍데기는 허물어지고, 아무런 치장 없는 순수한 나만이 남는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안타깝게도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이 소중한 감각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여러 개의 탭을 열어둔 채, 쇼츠와 알림 속에서 주의력을 사정없이 조각낸다. 몰입의 문은 방해받지 않는 고요한 시간 뒤편에 존재하는데, 우리는 그 문 앞에 설 최소한의 기다림조차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몰입은 오직 천재적인 운동선수와 예술가들만의 특권일까.
칙센트미하이는 단호히 아니라고 말한다. 평생 메스를 잡아온 외과의사 친구는 환자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손끝에 온 우주를 모으는 그 정교한 반복 속에서, 세상 어떤 예술가보다 깊은 몰입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갓 지은 밥 한 그릇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손길에도 이와 같은 몰입의 장이 펼쳐진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지금 마주한 일에 얼마나 정성을 쏟느냐에 달려 있다.
거창한 결심은 필요 없다.
양파를 다듬을 때 칼날의 감각에 집중하는 것, 길을 걸으며 뺨을 스치는 바람을 온전히 느끼는 것, 대화 중에 스마트폰을 뒤집어두고 상대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
이 작은 순간들이 모두 몰입의 시작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소음을 꺼야 한다. 스마트폰을 서랍에 넣고, SNS를 닫으며, 나만을 위한 시공간을 지켜내야 한다. 몰입은 하루아침에 찾아오는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매일을 정성스럽게 벼려가는 삶의 방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경기장에서, 콘서트홀에서, 그리고 새벽의 바카라상 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결국 하나로 수렴된다.
온 존재를 던져 가능성의 한계와 마주하고, 그 거울 속에서 가장 진실한 나를 발견하는 일.
진정한 성공은 메달의 색깔이나 박수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 내가 가진 최고의 순간을 온전히 살아냈다"는 내면의 굳건한 확신에서 온다.
속도와 효율만을 숭상하는 시대에 몰입은 어쩌면 사치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몰입이 배제된 일은 영혼 없는 지루한 반복일 뿐이다.
몰입은 평범한 노동을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키고, 차가운 의무를 뜨거운 열정으로 변화시킨다.
손 안의 작은 액정 불빛에 눈이 멀 것인가, 고요한 몰입 속에서 진정한 나를 마주할 것인가.
우리에게도 저마다 달릴 경기장과, 연주할 무대와, 묵묵히 써 내려갈 바카라상이 있지 않은가.
이제 그 눈부신 존(Zone)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갈 차례다.
자신을 유혹하는 빛들을 끄고, 눈앞의 고요를 응시하자.
그 깊고 아늑한 침묵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가장 참다운 우리 자신이 될 것이니까.